# 118
“아,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나온 것이랍니다. 그 녀석이 생긴 것과는 달리 그렇게 쩨쩨하게 굴 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이번에 강호의 친구들을 만나면 청의예검이라는 작자가 얼마나 좀생이 같은지 확실히 가르쳐 줄 겁니다.”
대화의 내용!
목소리!
진정 고래 힘줄만큼이나 질긴 인연이었다.
진찬월은 이 끈질긴 악연을 이번에는 잘라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계속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보건대 시골 노파를 앉혀놓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열심히 해대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노파가 다치지 않게끔 신속하게 처치해야 했다.
비록 그와 떠버리들 사이에는 기다란 풀숲이 가로막고 있어서 서로를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이미 음성의 크기를 통해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계산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는 마음으로 앞으로 펼쳐지게 될 상황을 그려보았다.
그대로 신형을 뽑아 올려 기다란 풀숲을 뛰어넘는다.
이어 착지하는 순간 검은 뽑아져 두 놈의 목을 베어낼 것이다.
그 즉시 노파에겐 수혈을 짚어 잠들게 한다면 깨어날 때 그저 악몽을 꾼 것이라고 생각할 터.
‘내 오늘 저승의 문을 열리라!’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뜬 상태에서 바라보니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두 놈이 노파를 가운데 두고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앗, 피해야 해!”
두 놈이 노파의 한 팔씩 붙들고 뒤로 물러났고, 진찬월의 신형은 아까 한참이나 떠들어댔던 곳 바로 앞 지점에 착지했다.
진찬월은 도망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기에 그 정도는 감안하였던 터라 착지하는 순간 튕기 듯이 몸을 날려 목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속에 그려진 영상이 되었을 뿐 안타깝게도 그의 몸은 착지하는 순간 땅으로 움푹 꺼져 들어가고 말았다.
그의 의지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던 데 반해 실제 몸은 속절없이 함정 속으로 빠져 버린 것이라 일시 제대로 대응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건 마치 일상생활 속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중에 마지막 계단 하나가 더 남은 줄 알고 밟았으나 실은 계단이 끝난 터라 발이 어색하게 딛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여서 진찬월 같은 고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으아아악~”
끝이 없는 어둠의 먹이가 된 뒤 정체불명의 쇠 마찰음이 들렸다.
기이잉, 철컥.
진찬월이 떨어지고 나자, 심온과 담유설이 쪼르르 달려와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여기에 함정이 있었던 거야.”
“오호라, 고놈 참 쌤통이다!”
“천지신명께서 우리를 도우셨구나. 아무렴, 그렇지. 악한 놈들은 하늘의 그물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니까.”
“저기에서 평생 살게 되는 거라면 그래도 꽤 불쌍한데…….”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만약 저놈이 빠져나오기라도 한다면 온 천하를 뒤져서라도 우릴 찾아내고 말 텐데 그땐 어떻게 감당할 거야.”
“흐흐, 그럼 못 나오는 게 낫겠네.”
“아무렴. 자, 그럼 위대한 검사여, 영원히 안녕!”
두 사람은 흥겹게 작별을 고한 뒤 노파에게로 갔다.
노파는 두 사람을 보면서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들아, 집에 데려다 주지 않고 뭐라고 자꾸 중얼거리는 거냐?”
“앗, 죄송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하지만 좋은 일 하신 것은 확실하니까 너무 원망하진 마세요.”
심온이 얼른 달려가 노파를 엎고는 산 아래 마을로 향했다.
오늘 이곳 곡주산에는 간단한 진법이 펼쳐졌고, 거의 대부분은 아예 산을 오르지도 못하였는데 노파는 어찌하다 길을 잃게 된 것을 발견하여 심온이 진찬월을 유인하는 작전에 참여시킨 것이었다.
진찬월이 빠진 곳은 오래전에 후흑문의 지하 뇌옥으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그가 빠진 후 금속성이 난 것은 아래쪽의 삼중 철망이 작동한 소리였다.
또한 심온과 담유설이 진찬월이 함정에 빠진 후에도 여전히 엉뚱한 말로 대화를 나누었던 이유는 진찬월이 어떤 음모에 의해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임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저 지독히 운이 없어 괴상한 함정에 빠졌다고 믿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미 함정에는 진찬월의 짝이 될 독고화연이 또 다른 작전에 의해 갇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바다에서 표류하다 무인도에 단둘만이 살게 된 것과 같은 입장이 된 것이다.
***
12.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진찬월은 뇌옥으로 떨어지면서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추락하는 중에 무리하게 위로 솟구치려 기를 끌어올린 탓에 기혈이 뒤틀린 탓이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뇌옥 안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무공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문의 원수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독고세가의 맏딸인 독고화연, 강호에서 불리는 그녀의 별호는 북풍냉화(北風冷花)였다.
5년 전 낙양의 한 공자묘에서 섬서삼숙과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섬서삼숙은 그녀의 북풍한설 같은 차가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그만 굳어버려 손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곤란한 지경에 빠진 것이 북풍냉화라는 별호가 된 이유였다.
뒤에 냉화라는 말을 통해서 단순히 차가운 여인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외모와는 달리 그녀의 속마음이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그녀가 뇌옥에 갇히게 된 것은 사흘 전이었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동료를 맞은 것이다.
그녀는 혼절한 진찬월을 바라보고 다시 높은 천장으로부터 미세하게 비취는 빛을 올려다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흘 동안 오만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 탈출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무슨 마법처럼 위쪽의 철장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처음 이곳에 갇히게 되었을 때는 그래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면서 초조함을 금할 길이 없었고, 결국 누군가가 꺼내주지 않는다면 영영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그녀는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었고, 아이도 갖기를 원했다. 하지만 뇌옥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병들고 늙어간다고 생각하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벽을 타고 올라가 위쪽 천장을 뚫고 나가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천장까지는 점점 좁아지는 원통형으로 되어 있고, 경사가 급격할 뿐 아니라 매끄러운 재질이라서 도무지 잡고 올라갈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출구가 없는가 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한숨을 쉬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물과 식량을 발견한 것 정도였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엿새가 흘렀고, 그때부터 독고화연은 하늘을 향해 기원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간절히 구한 것은 이곳을 벗어나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으나 엉뚱하게도 하늘의 응답은 말쑥한 남자 하나를 떨어뜨려 주셨다.
“하늘이시여, 이건 아니잖습니까! 여기에서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잘 살아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자꾸 왜 그러세요.”
그녀는 정말 울고 싶었다.
독고화연이 뇌옥에 빠진 것은 그녀로서는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경우를 당했다고 생각하였지만, 실은 진찬월과 다름없이 함정에 빠진 것뿐이었다.
작전명, ‘산삼’.
만추당주와 그의 직속 부하 두 명이 관여했다.
만추당주는 산삼을 발견하고 도주하는 역할을 맡았고, 두 부하가 쫓는 자가 되었다.
만추당주는 몸 곳곳에 부상을 당한 상태로 위장하였고, 중도에 독고화연을 만나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도주하였다.
그러던 차에 곡주산(曲周山)까지 이르렀고, 추적자들을 피하는 와중에 그녀가 유인하겠노라고 하다가 결국 뇌옥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진찬월이 정신을 차렸다.
독고화연은 뇌옥의 선배 된 입장에서 조금은 느긋한 자세로 깨어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보지 않으려 해도 지긋지긋하게 보게 될 텐데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진찬월은 정신이 들자 벌떡 일어나 천장을 향해 소리부터 지르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오로지 자신이 추락했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서 곁에 누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경황이 없는 탓도 있지만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물을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봐, 거기 아무도 없어? 떠벌이 녀석들아, 어서 나타나란 말이다.”
아무 반응이 없자 진찬월은 천장으로 기어올라 가려 했다.
하지만 떨어지면서 발을 잘못 딛는 바람에 발목 인대가 늘어져서 몸을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물론 몸 상태가 최고조라 해도 좁아지는 미끄러운 원통형의 높은 벽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르고 미끄러지길 반복할 때,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못할 짓이라 독고화연이 나직이 말했다.
“괜한 헛수고하지 말아요.”
진찬월이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만나게 되면 가장 두려울 존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도 여자.
“누, 누구요?”
경계심 가득한 몸짓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묻는 말에 독고화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놀라지 말아요. 난 사흘 전에 함정에 빠졌죠. 나도 처음엔 마구 소리를 지르고 기어오르려 했지만 얼마 안 가 포기했답니다. 벽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이에요. 거기에다 아래에서 아무리 내력을 실어 외친들 소리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아요. 위를 자세히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진찬월은 그제야 찬찬히 지형을 살폈다.
잠시 후 그는 그녀의 말뜻을 온전히 깨달았다. 위쪽 철장의 미세한 구멍들에 이르기까지 원통형으로 좁아져 가는 천장은 나선형 문양이 아래를 향해 끊임없이 이어진 형상을 띠고 있었다. 아마도 저 굴곡이 소리를 아래쪽으로 끌어내리고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진찬월은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다고 아예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여인은 사흘 동안 지내면서 아직까지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듯 보였으나, 그건 여인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지 자신이 노력한다면 조만간 탈출구를 찾게 되리라 믿었다.
단지 지금으로선 머저리들을 잡으려다 자신이 그만 머저리 같은 상황에 빠져 버린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것이었다.
“혹시 제가 떨어진 다음 무슨 소리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진찬월은 가능성은 없겠지만 혹시 자신이 의도된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라 듣고 나면 후회할 텐데요.”
“괜찮소. 빠짐없이 들려주시오.”
진찬월은 독고화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와의 거리는 약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어둠 중에 고운 선이 이어지는 얼굴을 보며 참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나더군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자 그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여기에 함정이 있었던 거야’라고 했고, ‘오호라, 고놈 참 샘통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비슷한 말로 연신 놀리더니 ‘자, 그럼 위대한 검사여, 영원히 안녕!’ 이라고 하더니 사라졌죠.”
진찬월은 분명히 다른 목소리로 전해 들었을 뿐인데도 대화 내용만으로 충분히 그 억양에 묻은 놀림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일단 우연히 함정에 빠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안심이 되었지만, 속이 부글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죽일 놈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네놈들을 반드시 찾아내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겠다.”
진찬월이 이를 부드득 갈았기에 독고화연은 부쩍 호기심이 일었다. 얼굴을 봐서는 호락호락 당할 인물은 아닌 듯한데 중도에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겠는지요?”
“그러니까 그게…….”
무심결에 이야기하려던 진찬월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돌이켜 보니 이건 정말 괴이한 일이자, 웃기는 일이었다. 누가 듣더라도 틀림없이 비웃고 말 것인데 절세의 미녀에게 털어놓자니 비웃음을 살 것만 같았다.
슬쩍 여인을 보니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깜박대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도 그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기에 진찬월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웃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내 말씀을 드리리다.”
독고화연은 뭐, 그 정도 못하겠느냐는 식으로 약속했다.
“어찌 남의 불행을 보고 함부로 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다짐은 확고했다.
“푸하하하하,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죄송해요. 호호호호, 하하하하… 고의로 이러는 것은 아니거든요.”
결과적으로 약속은 산산히 깨어졌다.
진찬월의 이야기가 중간에도 이르기 전에 독고화연은 약속을 깨뜨리고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진찬월의 얼굴은 깊은 우수에 잠겼다.
아니, 웃지 않는다 해놓고 왜 웃는 거요?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구려,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솔직히 자신이 제삼자의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 누구보다 크게 웃었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독고화연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애써 웃음을 참으려다 보니 그것이 더 자극이 되어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쪽은 어떻게……?"
진찬월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말을 시켜 어떻게든 웃음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배를 움켜쥐고, 한 손은 마구 내저으면서 지금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라는 동작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