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세상에는 다섯 가지의 의(義)와 세 가지 인(仁)이 있소. 그중 식의(食義)와 식인(食仁)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오. 식의란, 배부르지도 굶주리지도 않은 가운데서야 의를 이루기 쉽다고 하였고, 식인이란 식욕을 닫음이 덕의 시작이란 뜻이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충분히 배가 부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떼를 쓰고, 자신이 남긴 음식이 아까워 먹지도 않을 음식에 식욕을 부리니 어찌 의와 인을 이룰 수 있겠소. 보아하니 강호를 종횡하는 무림인인 듯한데, 내 근자에 먹기를 이렇듯 탐하는 강호인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소만 그대의 별호가 심히 궁금하기 짝이 없구려.”
“내 얼핏 보아하니 청의를 걸치고 검을 등에 메는 것이 마치 하북진가의 청의예검과 비슷해 보이는구려. 하지만 그대는 청의예검이 될 수 없소. 그는 당신처럼 남은 음식을 애써 지키려는 무뢰배가 아니기 때문이오. 혹여 그대가 청의예검 진찬월을 사칭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있는 힘을 총동원하여 당신의 목을 베려 할 것이오. 자, 그럼 이제 당신의 이름이 어찌 되는지 말해 보시오.”
이렇게 되자 진찬월은 스스로를 밝힐 수 있는 길이 원천봉쇄되어 버렸다. 만약 자신이 바로 청의예검이라고 말한다면 두 사람은 그 즉시 크게 웃어버릴 것 같았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하자니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의 모든 초점은 진찬월의 입술로 모아진 상태였다.
“두 분이 드시구려. 난 이만 가보겠소.”
진찬월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굳이 자신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 없이 개에게 아무 쓸모 없는 뼈다귀를 던져 주듯이 남은 음식을 선물한 것이다.
‘흐흐, 녀석들.’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고, 이 두 사람이 보일 당황스런 반응을 여유있게 기다렸다. 설마 하니 이렇게 쉽게 음식을 건네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니 제대로 뒤통수를 갈긴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렸다.
“야호! 우리가 이겼다.”
“유후! 그럼 그렇지. 우리가 이긴 거야. 이겼다고!”
너무나 기뻐하는 두 사내의 모습에 진찬월은 적에게 암습을 당한 것마냥 어두운 기색이 되었다.
그것은 뒤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는 어찌 되었든 두 사람에게로 넘어간 것은 확실했다.
“후후, 그럼 맛있게 드시오.”
급히 마음을 추스른 진찬월이 자리를 뜨자, 구경하던 이들도 분분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 두 사람은 진찬월이 떠나든지 말든지 즉시 남은 음식을 집어 들고는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저 녀석 좀 봐. 어깨를 바르르 떠는데?”
“역시 쩨쩨한 놈이었군.”
“사람은 생긴 것 가지고는 정말 모른다니까.”
“원래 말쑥하게 빠진 놈들이 더해요. 전에 거 있잖아, 산서성 묘추에 들렀을 때 보았던 인간?”
“아, 그때 그 녀석. 그렇지. 그러고 보니 저놈하고 많이 닮았는걸.”
두 사람은 나름대로 소곤거린다고 하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진찬월의 청력은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그는 계단을 중간 정도 내려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쟤 멈추네? 혹시 우리 말이 들리는 건 아니겠지?”
“설마, 지가 무슨 개도 아니고 그렇게 귀가 밝을 리가 없잖아.”
“하긴 그렇네. 우리 목소리가 들리면 그건 개지, 개.”
“저거 혹시 돈이 없는 건 아닐까?”
“뭐야, 그럼 우리보고 음식 값 내라고 하면 어떡해?”
“그래도 우린 할 말이 있지. 왜냐면 녀석이 먹으라고 한 것이니까.”
“흐흐, 그렇군. 그나저나 왜 안 가고 계속 서 있어, 신경 쓰이게.”
“내버려 둬. 식기 전에 어서 먹기나 하자구.”
진찬월은 분노에 치를 떨며 당장 달려가 요절을 내려 했다. 하지만 이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몸을 돌리게 되면 한순간 개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장애를 부숴 버리고는 신형을 뽑아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이놈들, 다 들었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창 쪽으로 등을 붙이고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거 개새끼였던 거야?”
“그럴 리가! 내가 보기엔 사람 새끼처럼 보이는데 개새끼일 리가 없어. 검을 등에 메고 다닌다는 개새끼를 본 적이 없다구. 하지만 정말로 우리 말을 들은 거라면 이 녀석은 정말 개새끼가 되는 건데 사람이 갑자기 개가 되어버리다니 이거 이거 보통 일이 아닌걸.”
“어서 몽둥이를 집어. 개새끼에겐 몽둥이가 약이잖아.”
“워이, 워이! 물러가라, 물러가.”
진찬월은 대놓고 모욕을 당하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산길을 걷다가 노인장에게 얻어터진 일 이후로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당시 노인장은 잘 가고 있던 그를 불러 세워놓고는 실실 웃으면서 용돈을 좀 달라고 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십 세였고, 강호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노인장의 산만한 표정과 몸짓을 통해 이것이 돈을 뜯어내는 수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 결과 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충고와 주먹질을 받았으며, 다다음날 정오까지 뻗어버렸다.
그 뒤 무공 수련에 온 힘을 기울인 것은 당연하였으며, 그 결과 오늘날의 명성에 이른 것이었다.
그는 당시 이 노인장의 정체가 원수 집안인 독고가의 인물이 아닌가 싶어 뒤에서 많은 조사를 해보았지만 독고세가 어디에서도 그 비슷한 노인장을 찾아내지 못했었다.
지금 문득 그의 뇌리로 노인장이 떠오른 것은 이 두 사람의 산만함이 가히 당시의 노인장과 흡사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추측은 사실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십 년 전에 진찬월 앞에 나타나 삥을 뜯으며 폭력을 행사한 노인은 다름 아닌 후흑문의 전대 문주인 심온의 사부 신비무영이었으며, 현재 소란을 떤 이 두 사람은 심온과 담유설이었기 때문이다.
“내 너희들을 제대로 훈계하리라!”
진찬월은 살인멸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단지 뼈다귀 몇 개 정도를 부러뜨려 놓으려 했기에 가전의 금나수법을 이용하여 손을 뻗었다.
심온과 담유설은 모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탁자를 뒤엎어 진찬월을 막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 자식, 아주 악질이야, 악질. 먹으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사람을 죽이려고 들다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구!”
“조용히 좀 해. 귀가 얼마나 밝은지 방금 봤잖아. 아까도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는데 개새끼마냥 다 들었는데 이렇게 큰 소리로 욕을 하면 우리는 매를 곱절로 버는 것이란 말이야. 이제부터는 입 닥치고 우리의 장기 중의 장기인 달리기로 놈을 뿌리칠 수밖에 없어.”
“오늘 정말 운수 사납군. 개에게 쫓기는 날이 될 줄은 몰랐는걸.”
심온과 담유설은 이층에서 곧바로 뛰어내려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경공을 펼쳐 달렸고, 그 와중에도 시끄럽게 떠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진찬월은 뜻밖에도 금나수가 허공을 할퀴고, 둘의 신법이 소란스러운 중에도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겐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 어찌하여 저런 무공을 쥐게 되었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십 년 전의 깡패노인도 돈 몇 푼을 바라고 험한 주먹질을 퍼붓더니 이젠 또 별 희한한 놈들이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미친놈들에겐 그만한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다. 이대로 보내준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것이 아닌가.’
당시 깡패노인도 힘만 믿고 그 뒤로도 젊은 놈들의 푼돈을 뜯어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공을 더욱 열심히 연마했던 그였다.
하지만 정녕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당시 깡패노인, 즉 신비무영이 실은 그를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점이었다.
그의 자질이 뛰어나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공의 경지가 정체되는 것을 간파하고 타법을 통해 혈맥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또한 지금도 이 두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먼 장래를 위해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놓치고 말았다.
숨바꼭질은 열흘이나 계속되었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손아귀를 빠져나가더니만 이젠 아예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오 일이 지나면서 진찬월은 그만 쫓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열흘이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두 놈이 시야에 잡힐 때면 어김없이 숨을 헐떡였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다. 당장 쓰러질 듯 숨을 몰아쉬는데 그 광경을 보고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자신이 청의예검이라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보기 좋게 놓친 것이라면 몰라도 눈앞에 두고도 쫓지 않는다면 두 놈의 시끄러운 언변을 감안할 때 강호상에 괴상한 소문이 돌 것은 불을 보듯 뻔하리라는 생각이 그를 쉴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청의예검은 겁쟁이다.
―겁이 났던 거지. 막상 잡는다고 해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내가 저만치 있는데 못 본 척하고는 옆으로 달리더라니까.
―그 녀석 귀만 밝았지, 싸움은 동네 양아치 수준도 안 되더군.
이런 소문들은 다시금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자신을 덮쳐 올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진찬월은 이를 악물고 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해방이 된 것이다. 놈들의 탁월한 경공과 도망자로서의 끈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푸풋.”
지난 며칠을 돌아보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 동서로 광분하며 날뜀이 사실 알고 보면 고작 음식 찌꺼기가 발단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당시 내가 못 들은 척하고 주루를 나섰다면 어땠을까? 옛말에 이르기를 현자는 많이 듣고 많이 보는 자가 아니라, 부러 듣지 않고 부러 보지 않는 자라는 말이 실감나는구나.”
실제로 지금껏 일어난 강호의 수많은 분쟁을 보자면 대다수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존심을 죽이지 못해 일어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이렇게 정리했어도 만약 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번엔 쓴웃음이 떠올랐다.
진찬월은 이틀 정도 객방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추격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을 것도 챙겨 먹지 못해 기력이 쇠한 부분을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틀이란 시간은 본래의 진찬월로 돌아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시금 상쾌한 상태로 돌아온 진찬월은 산서성 쪽으로 틀어진 길을 하북성 쪽으로 바로잡아 나아갔다.
지름길을 택해 나아가려다 보니 험한 산길을 택하였고, 어느덧 곡주산(曲周山)을 넘는 길이었다.
이른 아침에 산을 올랐기에 정오 무렵에는 산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좀처럼 산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빠져나가긴커녕 도리어 깊숙한 곳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느낌이 드는 터라 그의 미간은 잔뜩 찡그린 상태로 펴질 줄을 몰랐다.
산(山)사람이라도 만나면 좋으련만 아침나절에 산을 오르면서 서너 사람을 본 이후로는 아무도 구경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큰 산에 사람이라곤 마치 자신만 있는 것처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여기 아무도 없습니까?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혹시 근처에 누가 있다면 이쪽으로 와주시오!”
내공을 발휘하여 큰 음성으로 외쳤다. 거기에 대해 응답한 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혹시 목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지라 조금 시야가 트인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그러길 한 시진, 그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면서 자책했다.
“이 나이에 길을 찾지 못하다니… 어찌 이리도 바보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더 기다려 봤자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았기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산을 내려가 보기로 했다.
이제 두 시진 정도만 있으면 해가 질 것이기에 서둘러야 했다.
지나왔던 곳의 풀과 나무 등에 표시를 남기며 걸음에 속도를 높여 산을 누비길 일 식경 정도 지났을까. 그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감각을 활짝 열어놓고 인기척을 찾아내던 그에게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틀림없이 사람의 음성이었다. 아직은 꽤 먼 거리였기에 무슨 내용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니 적어도 두 명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사막에서 샘을 발견한 나그네처럼 있는 힘껏 달려가려던 그의 몸이 한순간 차분해졌다.
오늘 하루는 어쩐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접하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 탓이다. 어린아이마냥 산을 헤맨 것도 그렇고, 이제껏 사람을 못 보다가 겨우 찾은 것도 희한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 곳이 바로 강호요, 무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였고, 앞으로 보게 될 사람들이 평범한 약초꾼이나 농사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는 속담을 마음속에 중얼거린 후 아주 조심스럽게 기척을 죽이며 접근했다.
천천히, 신중하게, 저곳에 자신이 감당치 못할 마두가 서 있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야기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오기 시작하고 어느 지점부터는 명확히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 순간 진찬월의 안색에는 검은 비가 주르륵 내린 듯 사색이 되고 말았다.
“하하하하, 재밌지 않으세요? 그래서 저와 이 친구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답니다. ‘뭐야, 이거 개새끼였던 거야?’ 하고 말이죠. 솔직히 그렇게 조그맣게 소곤거린 것을 듣다니 정녕 개가 아니면 뭐냐는 거죠.”
“물론 그 뒤에는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정말 미친개가 쫓아오는 것 같았지요. 우리도 달리기는 꽤 하는 편인데 놈은 그동안 몸에 좋은 것들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지칠 줄 모르는 것 같더라니까요. 하지만 우리도 잡히면 죽는 것이니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달렸죠. 이렇게 살아서 할머니와 이야기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