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16화 (116/125)

# 116

둘은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결코 사랑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기에 각기 집안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물론 결과는 포악한 함성과 고함, 감금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두 사람의 의지는 강력했다. 금식을 선언하고 물조차 마시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다.

거의 열흘가량 금식이 이어지자 팔다리가 돌아가고 거의 죽기 직전이 되었고, 그제야 집안 식구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진정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원수를 집안으로 끌어들여 놓고 싶진 않았다.

진초연과 독고헌 또한 속절없이 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았기에 못 이기는 척 금식을 해제하고 험난한 감시의 눈을 피해 만남을 가졌다.

“고생이 많았지?”

“그대도요.”

“우린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겠어.”

“맞아요. 우리의 염원도 염원이지만 그동안 원한의 세월이 너무 길었으니까요.”

“다른 이의 힘을 빌릴 생각이야.”

“누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후흑문.”

“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하지만 후흑문이 의뢰를 받아들일까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길 바라는 수밖에.”

“그래요, 그렇게 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

이렇게 두 사람의 사연은 후흑문에 전달되었고, 다행스럽게도 후흑문은 의뢰를 수락하였다. 그들의 예상대로 두 원수 가문의 사랑 이야기는 후흑문주 심온을 비롯한 그 수하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 * *

후흑문에서는 곧바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두 사람의 간절한 염원을 어떻게 원만히 해결할 수 있겠는가라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회의의 내용은 두 가문이 현재까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강호의 객점에서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던 내용들이 재탕되었으며, 진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거의 한 시진 넘게 떠들다 정작 본론에 이르러 진지한 논의를 한 것은 딱 일 다경뿐이었다.

그런 상황은 마치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 같았고, 실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기이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내놓고 일치를 본 의견은 이것이었다.

“우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재화당주 엄장의 말에 모두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던 것이다.

“그렇지. 하하하하.”

“그럼 일단 알아보자구.”

“그래야겠는걸.”

“그럼 누가 알아보는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만추당이 수고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추적과 정보 수집에 능한 만추당은 그렇게 선별되었다.

두 달의 시간이 지나 만추당이 밝혀낸 것들은 상당히 고무적인 것들이었다.

주머니에 담아온 귀중한 정보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놓았다.

<두 사람의 사랑의 깊이는 이미 하늘에 닿을 정도임.

두 가문의 수장들은 의외로 너그러운 편임.

가장 큰 반대자는 독고화연과 진찬월임.>

이 세 가지 정보를 놓고 여러 머리들이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법을 찾아냈다.

―가장 반대하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만든다.

―겹사돈을 만든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뇌옥을 활용한다.

이 기초를 토대로 비밀 작전의 벽과 기둥이 올라가고 대들보가 쌓아졌다.

* * *

풍화루의 점소이 백표는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나고 졸음이 몰려올 시기에 주렴을 걷으며 들어오는 한 사람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주루에는 총 다섯 명의 점소이가 일하는데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뒷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다들 쉬는데 혼자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리 만무하였기에 이 시간대의 손님은 누가 되었든 ‘짜증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표는 의자에 달라붙어 떨어지기 싫어하는 엉덩이를 억지로 떼내며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는 많으니 편안한 곳에 앉으시지요.”

일층과 이층을 합해도 손님의 숫자는 다섯 명이 되지 않았기에 좋은 자리는 널린 터였다.

속마음과 달리 백표는 꽤 친절한 음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손님의 인상과 지닌 무기에 의한 것이었다.

차가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청의무복을 입은 삼십대 정도로 추정되는 손님은 정기가 흐르는 눈동자에 예기를 머금고 있어 슬쩍 곁눈질로 마주쳤음에도 오금이 저려왔고, 등에 걸린 장검은 일체의 어색함도 없이 마치 몸의 일부인 양 어울렸기 때문에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가 대뇌에 강하게 울려 퍼진 것이다.

점소이 백표의 그러한 변신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랄 수 있었다. 하잘것없는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워 처음 먹었던 귀찮은 감정을 표면화시키지 않은 것은 위선이라기보다는 처세술이라고 해야 옳았다.

백표야 손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어느 정도 강호의 고수를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자라면 그가 당금 무림의 신예 중 단연 돋보이는 무공을 지닌 하북진가의 장남인 청의예검(靑衣銳劍) 진찬월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진찬월은 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청의를 입었기에 그의 별호에는 자연스럽게 청의가 들어가 있었고, 검법의 날카로움을 가리켜 예검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졌다.

“이곳에서 잘하는 요리를 가지고 오게.”

진찬월은 이층 창가에 앉고는 곁에 서서 엽차를 따르는 점소이를 향해 말했다.

“네, 회고육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요. 술은 무엇으로 하시려는지요?”

“술은 됐네.”

“네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바로 대령하겠습니다요.”

점소이 백표가 물러나자 진찬월은 여유있게 창밖의 광경을 살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희희낙락거리는 아이들이 몰려왔다가 멀어졌다. 이어 한 노파가 걷는 것이 힘겨운지 나무 그늘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돌렸다.

가전의 정심한 내공심법을 이어받은 그의 눈에 언뜻 예기가 서리면서 노파의 오른쪽 어깨를 주목하였다. 노파의 어깨는 오른쪽이 처져 있었고 힘들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곳엔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피식.

진찬월은 슬며시 웃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검은 머리라곤 한 올을 찾기 어려운 백발에, 뼈는 삭고, 피부는 검버섯이 피어올라 이젠 파리 한 마리가 어깨에 앉아도 무겁겠다는 염려가 될 정도라니.

자식들을 위해 일평생 헌신하여 몸을 아끼지 않았을 그녀는 분명 지금도 한 치의 후회도 하지 않고 있으리라.

노파가 자리를 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시간이 꽤나 걸린 것이었지만 여러 상념에 빠진 탓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기에 진찬월은 점소이가 금방 돌아온 것만 같았다.

“손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너무 죄송합니다요. 점심때가 지난 후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터라서…….”

백표는 연신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괜찮네. 이 정도면 결코 늦었다고 할 수 없으니 미안해할 필요 없네.”

백표는 이 손님이 겉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다정한 것을 보고 얼굴이 환해져서 인사를 올린 후 총총히 물러났다. 역시 사람은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음은 물론이다.

음식 맛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기에 진찬월은 속으로 주루 이름을 되뇌었다.

그는 이번에 낙양의 외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이제껏 이곳을 지나면서도 풍화루는 처음 들어와 보았다.

여기 임주(林州) 지역은 산서성과 하남성, 호북성의 경계에서 가까운 요충지라 제법 상권이 발달되어 있어 여러 객잔과 주루들이 자리한 탓에 선택의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식사를 거의 마쳐 가며 포만감이 가득 차 오르는 중에 그의 시선은 다시금 창밖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사라진 아이들과 노파 대신 한 쌍의 원앙 같은 젊은 남녀가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연인들의 걸음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일 년 정도는 족히 걸릴 것처럼 지극히 여유로웠고, 모든 대화 속에 미소와 웃음이 가득했다.

진찬월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동생 진초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이번에 낙양에 다녀온 것도 여동생의 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세상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서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원수 집안의 아들을 사랑하였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내야 할 일이었다.

지금 현재 상황은 무엇보다 급박하고 간절했다. 강경해야 할 아버지께서 이미 팔백 년 전의 일이 아니냐며 흘러가는 대로 둬보자고 말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또한 여동생의 고집은 단순히 고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공할 집착을 보이는 탓에 모든 가족들의 일치단결한 거부가 필요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열렬히 설득하는 한편 여러 친척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면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였을 경우 힘을 보태주십사는 뜻으로 그는 요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젊은 연인들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이고 마저 식사에 전념했다.

그 짧은 순간에 입맛은 줄행랑을 놓아버려 아까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몇 젓가락을 끼적대다가 내려놓았다.

그때 주루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실내를 휘몰아치면서 장터를 방불케 했다.

단 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의 이십 명 정도 되는 분량의 시끌벅적함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에 웃기는 경외감을 느끼며 진찬월은 서서히 길 떠날 준비를 했다.

옆 의자에 놓아둔 장검을 잡고 막 등에 걸쳐 메려 할 때 두 사람은 어느새 자신의 탁자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와아, 저거 맛있겠는걸. 나 저거 한번 먹어보고 싶다.”

“뭐 어려울 것 있나. 먹어보면 되지.”

“하지만 시켰는데 맛이 없으면 어쩌지? 겉으로 볼 때는 맛있어 보이는 것도 실제 맛이 별로인 것들이 많잖아.”

“그것도 그렇군. 그럼 저기 좀 남은 것 같은데 좀 먹어보자구.”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진찬월이 남겨놓은 음식이었기에 점소이는 사색이 되어 앞쪽으로 나서서 두 팔을 벌리고 가로막았다.

“어찌 먹다 남은 음식을 드시려는 겁니까? 맛은 확실히 보장할 테니 좋은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만 주십시오.”

점소이 백표가 염려하는 것은 진찬월이 언짢아하여 검을 뽑아 들고, 그로 인해 피가 철철 나는 시체를 자신이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뭘 그리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게야. 저 사람은 이제 갈 테고 어차피 버려질 음식인데 우리가 먹으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어.”

“네놈도 눈깔이 있으면 좀 봐라. 막 떠나려고 채비하는 중인 것이 보이지 않냔 말이야.”

다시 백표가 자신이 지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불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만류할 때, 진찬월은 찬찬히 이 괴상한 인간들을 살펴보았다.

두 사내는 대략 이십대 후반 정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는 이십대 후반이오’라고 강변하고 있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역용술(이렇게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였지만)로 꾸몄기에 망정이지 냉철한 시선으로 판단하건대 고작 이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다.

나름대로는 신경을 썼다고 쓴 것인지 콧수염도 붙이고, 눈 밑과 귓가 쪽으로 피부의 탱탱함을 감추었지만 그 정도로는 점소이의 눈이나 겨우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

본시 변장을 한다는 것은 뒤가 구리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인데 이들은 동네방네 유세를 떨듯 소란스러우니 진찬월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서서히 언짢은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흥, 정말로 괴상한 작자들이로군. 나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냐?’

“이 음식은 내가 주문하여 돈을 지불할 것이니 버린다고 해도 내 소유라 할 수 있소. 그러니 두 분은 억지 부리지 마시고 물러나도록 하시오.”

그는 점잖게, 하지만 명확하게 자기 의사를 밝혔다.

백표는 염려했던 청의검사가 다행히도 검 대신 논리적인 말로 타이르자 일이 커지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분 말씀이 맞습니…….”

백표의 음성은 중도에서 잘려 나갔다.

“어허, 이거 참 사람이 보기보다는 엄청 쫀쫀하네. 이보시오. 사람이 생긴 건 멀쩡한데 왜 그렇게 쩨쩨하오. 그대가 만약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다시 자리에 앉아서 마저 먹는다면 우리는 곱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겠지만, 이것을 버리면서까지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면 난 그대를 중원에서 제일 쩨쩨한 사람으로 믿어버리겠소.”

오른쪽 사내는 침을 튀기고 삿대질을 해가면서 말을 하였고, 왼쪽에 있던 사내는 옆에서 연신 입을 벌렁거리고 침을 삼키면서 동료의 말이 끝나고 자신이 말할 차례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드디어 그의 차례가 오자, 한 번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껏 삼십 년을 살아오면서 총 다섯 명의 쫀쫀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의 쫀쫀함과 쩨쩨함은 정녕 경악으로 눈이 튀어나와 바닥을 다섯 번 구른 다음에 허망하게 으깨어져 버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오. 하지만 난 오늘에서야 그들이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소. 그대는 아무리 봐도 쩨쩨함에 있어서는 지존이 분명할 터. 나랑 같이 먼저의 다섯 사람을 보러 갑시다. 그들은 필시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할 것이 틀림없소.”

두 사람이 쏟아내는 말의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었기에 백표와 진찬월은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미 아래층에서 식사를 끝마친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 그리고 뒤채에 있던 주인장 내외까지 몰려와 이 사태를 주시하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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