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으아아아악~”
그는 갑자기 검을 뽑아 들고는 괴성을 내지르면서 검격을 날려댔다.
땅이 갈라지고 공간이 흉물스럽게 베어졌다가 합쳐지는 등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막강한 위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 신법을 전개하여 아귀진독에게 달려가 수천의 초식을 쏟아냈다.
하지만 아귀진독은 그가 베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무적의 무공이긴 하나 차원이 다른 존재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무공이 아닌 것이다.
도리어 아귀진독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박수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 바로 그런 자세다! 미쳐야만 미칠 수 있는 법이거든. 좋다, 좋아.”
고첨의 무위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한 번 도약하면 백 장(삼백 미터) 높이로 치솟는 것이 가능했고, 검을 한 번 그을 때마다 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검을 허공을 향해 감으면 거대한 회오리가 솟아나면서 휩쓸 때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감당치 못할 어마어마한 무위를 드러내며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 섬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가 되었다.
무림인들이 이러한 광경을 목격했다면 누구라도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자 없었으리라.
그는 곧바로 지존이라 칭해지며 부와 명예, 그리고 수많은 미녀들이 줄을 이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저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뿐이었다.
그는 최강의 전사이며 천하무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무찌를 상대가 없는 천하무적이라는 점이었고, 찬사를 해줄 사람이 없는 최강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천하무적임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조각나 버린 섬에 우뚝 선 고첨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나간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린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이 살았었다. 헛된 욕망, 천하제일인이라는 꿈을 쫓아 여기에 이른 그는 비로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평범한 것들의 소중함.
수고하여 흘린 땀방울을 닦아주는 평범한 아내의 손길.
보잘것없는 찬이지만 배고파 허겁지겁 먹는 식사.
힘이 없기에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것.
군림하기보단 조화를 이루는 삶.
충분히 그리 살 수 있었다. 지금 절세의 무공을 터득하는 중에 생각해 보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숫자의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힘을 얻는 길도 끝이 없어 영원에 이르는 시간까지 한없이 수련만 하게 되리라.
그는 초절한 무공을 활용하여 사람을 죽이고, 굴복시키고, 존경받고, 사랑받고자 했지만 지금에 와선 그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고,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내가 무공을 익힌 이유는 이것을 하기 위함인가…….”
부인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검을 하늘 높이 던졌다. 거대한 검강이 검을 둘러싸면서 치솟더니 어느 지점에서 다시 아래로 수직 낙하했다. 검끝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고첨의 정수리였다.
이때 바위 뒤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있던 아귀진독은 말아 쥔 오른손을 깨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클클… 그래, 멋진데. 바로 그거야!”
또한 마계의 모든 마신들도 천화경을 통해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이윽고 검이 고첨의 정수리를 꿰뚫고 목이 지나 배꼽 부분까지 관통하자, 마계는 경쾌한 음률이 퍼지면서 축제에 휩싸였다.
“애썼다, 이 썩을 놈아.”
“멍청한 녀석,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실은 지금부터인데 말이야.”
“그걸 알았으면 자살했을 리 만무하지.”
“이제부터 본때를 보여주자구.”
그랬다. 숨이 끊어진 후 고첨의 혼은 홀연히 육신을 빠져나와 아귀진독이 쥐고 있던 작고 투명한 호리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혼을 판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아귀진독과 마계의 뭇 신들은 고소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첨은 지금부터 최악의 상황이 시작되었으며, 이제 앞으로는 스스로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녕 영혼을 판 자의 길은 이처럼 비참했다.
***
10. 두 가문의 원한
하북에는 팽가와 더불어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가문이 있었으니 ‘하북진가’가 바로 그들이었다. 가전으로 내려오는 무공은 천하오대세가에 버금가고, 깊은 전통과 품격 높은 예법을 강조하는 가법에 의해 강호는 그들을 존중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하남의 독고세가는 하북진가를 마치 없는 자들처럼 여겼고, 간혹 그 존재를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맹렬히 비난하거나 코웃음을 치거나 심지어 저주를 퍼붓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독고세가를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북진가 또한 독고세가를 대함이 그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북진가와 하남독고가의 갈등은 하루 이틀에 걸쳐 쌓인 것이 아니었기에 강호의 명숙들 또한 그들을 화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명숙들의 사부가 태어나기도 전, 다시 그 사부의 사부가 나기도 전부터 하북진가와 하남독고가는 으르렁거리는 사이였기 때문이며, 이제껏 명망있는 무림인들이 나서서 두 가문을 화해시키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이제껏 그 누구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후대의 누군들 마음은 있어도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 원한 관계는 너무도 오래된 것이라 무엇 때문에 두 가문이 원수가 되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갈등의 원인에 대해 호사가들은 여러 가지 말들을 쏟아냈지만 그나마 가장 설득력있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아래와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팔백 년 전 진앙과 독고충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한 여자가 나타나면서였다.
그 여인은 당시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섯 미녀 중 한 명으로 화미미라고 하였는데, 진앙과 독고충이 모두 그녀를 사랑하여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고 연적으로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이때 화미미가 한쪽을 과감하게 내치고 다른 한쪽을 택하였다면 당장에는 서글픈 마음이 있었겠지만 훗날까지 커다란 원한의 골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리라.
이 일로 결국 진앙과 독고충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고, 그 결과 진앙은 한쪽 팔과 오른쪽 눈을 잃었으며, 독고충은 왼쪽 발과 오른 손목을 잃었다.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두 사람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미미를 차지할 수가 없었다. 화미미 그녀는 두 사람의 대결 결과를 듣고 자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위의 이야기는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약 팔백오십 년 전쯤 강호에는 천하제일을 다투는 고수로 진우환과 독고염이 있었는데 이들은 어느 날 누가 제일 강하냐를 놓고 대결을 벌이게 된다.
진우환은 가전의 비법인 ‘천하우주삼라무한진경(天下宇宙森羅無限眞境)’의 신공을 사용하였고, 독고염은 ‘환우지존백팔신기루환상공(?宇至尊百八神奇樓幻想功)’을 펼치게 되는바 바야흐로 이 둘의 격돌은 하늘과 땅이 놀라고 산과 들, 바다가 뒤집어지는 어마어마한 격전이었다.
장장 오십여 일을 한 끼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결투를 벌인 두 사람은 결국 동귀어진하고 말았는데, 이 일로 인해 하북진가에서는 천하우주삼라무한진경의 비결을 전수받지 못했으며, 독고세가는 환우지존백팔신기루환상공을 소실하게 되어 그 후로 철천지원수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외에도 여러 설이 있었지만 강호에서는 극히 일부만이 위의 내용을 받아들였을 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앙과 독고충, 그리고 화미미와의 삼각관계로 인해 원한 관계가 형성되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두 가문의 적통을 잇는 한 사람에게만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는바 죽음이 이를 때 유언과 함께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방식이었으며 부인에게도 자식에게도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였다.
그렇기에 가문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강호에서 신빙성있게 떠도는 삼각관계에 대한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믿었고, 이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진실을 이어받게 된 적통들은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 누구든 그 이야기를 듣고 거처에서 식음을 전폐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주변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는바, 정녕 삼각관계 속의 더 자세한 내막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이었으면 그러하겠는가 하는 추측을 낳았다.
여기서 일단 적통들에게만 이어져 내려온 두 가문이 대립하게 된 진실한 사연을 살펴보자.
팔백 년 전 진앙과 독고충은 우연히 객잔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침 가는 길이 같았던 두 사람은 적적함을 떨쳐 내고자 동행하기로 했다.
함께한 지 이틀째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묘운산 자락을 넘게 되었는데, 문제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산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을 보고 진앙이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만 것이다.
여인의 이름은 화미미였는데 포근한 인상에 복스럽게 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결코 미녀라고 부르기 힘들었지만 진앙은 그처럼 복스러운 얼굴의 여인을 평소 바라고 있었던지라 독고충에게 그녀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며 힘껏 응원해 줄 것을 당부했다.
독고충은 그녀가 자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기에 당연히 그러마고 화답하였다.
진앙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는데 평소 화통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조심스러움만 가득하였다.
그녀는 산 아랫마을에 사는 처녀로 약초를 채집하는 것으로 집안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진앙은 그녀를 위해 약초를 함께 캐기로 했는데 중간에 산딸기인 줄 알고 착각하여 먹은 이름 모를 과실로 인해 복통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는 곁에 여인을 두고 차마 응가를 볼 수 없었지만 실로 상황은 급박하여 뱃속은 거대한 파도가 솟구치는 듯하고 정신은 혼절 직전이고 항문을 향한 응가들의 압박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당장이라도 바지를 끌어 내려야 할 판이었다.
그는 황급히 독고충에게 말하여 옆 숲 속에서 일을 볼 테니 그녀를 저만큼 유인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급히 풀숲으로 들어갔다.
이때 독고충은 장난기가 발동하였는데 그녀를 멀리 데려가는 척하고는 느닷없이 진앙의 눈앞에 그녀와 함께 나타나 버린 것이다.
엉덩이를 까발리고 대장에 묵혀 있던 험악한 음식 찌꺼기들이 퇴비가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던 진앙으로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진실로 마음에 드는 여인 앞에서 조롱당했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서는 몸을 일으키는 순간, 옆에 놓아둔 검으로 독고충의 배를 쑤셔 박았다.
이때 진앙의 상태는 미처 옷을 추스르고 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앞의 물건이 덜렁거리고 뒤로 삐져 나오려던 덩어리들도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앙의 검은 정확히 세 번에 걸쳐 독고충을 난도질했다.
한 사람은 추접한 일격을 가한 것이고, 또 한 사람은 더러운 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 황당한 상황에 독고충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허겁지겁 그곳을 벗어나 달아났고, 화미미는 그동안 다정하게 대하던 진앙이 똥을 갈기다 말고 갑자기 검을 빼 들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지르면서 멀어져 갔다.
그녀는 이제껏 미친 사람을 여럿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황당하게 미친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진앙은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독고충의 뒷모습과 사랑하는 여인의 기겁한 표정 후의 달아남, 그리고 자신의 추악한 몰골을 돌아보고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소망을 잃고 그 즉시 절벽을 달려 아래로 투신했다.
이후 하북진가에서는 진앙의 행방을 찾던 중 그의 시체를 발견하고―물론 엉덩이를 깐 채로 죽어 있었다―떨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절벽으로 가서 그곳에 남겨진 검으로 새긴 듯한 유언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미미, 나는 그대를 사랑하였소.>
이 글귀를 토대로 산 아랫마을 뒤진 결과 화미미라는 여인을 찾을 수 있었고, 그들은 그녀에게서 모든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한편 독고세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독고충이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연명하여 본가로 돌아간 뒤 이 모든 사연을 이야기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자 그 분노가 극에 달했다.
두 가문의 어른들은 도저히 이 죽음을 납득할 수가 없어 당장 결판을 내려 했다.
하북진가의 주장은 이러했다.
―똥 쌀 때 갑자기 나타나면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에 맞서는 독고세가의 목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다.
―아니, 똥 싼 걸 좀 봤기로 사람을 죽여? 이런 썅!
서로의 주장은 팽팽하여 어느 누구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고, 두 가문의 전쟁은 그때부터 처절히 시작되었다.
이 모든 진실은 어둠 속 깊은 곳에 감추어놓은 채 두 가문은 오늘 이때까지 냉전 상태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
11. 두 개의 함정
팔백 년 전의 묵을 대로 묵어 구린내가 풀풀 나는 사건으로 인해 도저히 서로를 바라볼 수조차 없는 거대한 벽이 형성된 두 가문 사이에 벽을 부수기 위해 망치질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초연과 독고헌이었다.
그들은 만나 서로에 대한 호감을 품고 결국 연정에 이르게 될 때까지 상호 간의 가문의 원한을 꿈에도 모른 상태였다. 그리고 지독한 원수 가문이란 것을 서로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사랑은 더 이상 허물어뜨릴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어서 가문의 원한은 ‘고작’, ‘따위’ 정도로 치부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문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몰래 연애를 즐길 수는 있어도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했고, 아이도 낳아 집안 식구들에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