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09화 (109/125)
  • # 109

    “휴, 요즘 사람들은 겁이 너무 많아. 거짓말이나 사기를 치는 것은 별반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정작 영혼 어쩌고 하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린다니까.”

    영혼을 파는 조건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은 문학적인 관점에선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모두들 목을 움츠리고 말을 아끼니 아귀진독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사실 며칠 전에 그런 녀석이 하나 있어서 다녀왔었어.”

    태나지귀와 증위행귀가 동시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와우! 그래, 어떻게 됐어?”

    “거봐, 나쁘지 않잖아.”

    아귀진독은 한숨을 내쉼으로 결말의 불행을 예고했다.

    “물론 나도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내려갔었지. 사실 내 취미에는 맞지 않지만 바짝 조바심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관능적인 미녀의 모습을 했었어.”

    이 말에 태나지귀와 증위행귀가 웃으려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감정을 억제했다.

    “그래,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내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해 봐. 음, 그는 사십대 중반 정도의 사내였는데 대머리에 뚱뚱보더군. 눈은 흐릿하고 기운은 하나도 없어 보였지. 대머리가 원하는 것은 멋진 남자상이었네. 두 번을 결혼하고 두 번 이혼당하였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심한 모욕을 당해 영혼을 팔아서라도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고 부르짖었던 거야. 하지만 막상 영혼에 대한 거래를 이야기하니 기겁을 하더니 도망치기 시작하더군. 마음 같아선 잡아 죽도록 패버리고 싶었지만 삼라만상의 질서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어. 모두가 다 그런 식이지. 도대체 배짱들이 없단 말씀이야.”

    태나지귀와 증위행귀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심각히 생각에 잠겼다.

    바로 옆에 동료가 괴로워하고 있는 지금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떠올려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둘 다 좀체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어 입술만 옴지락거렸다. 어색한 공기가 가득 차 오르자 좀 더 시간이 지체된다면 공간이 파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증위행귀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한번 대주면 어때?”

    “뭘 대줘?”

    아귀진독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으나 태나지귀는 눈치를 챘는지 뜨악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관능적인 미녀로 나타났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왕 환심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말이야. 같이 침대에 올라가서…….”

    거기까지 듣자 그제야 이해한 아귀진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 놈의 자식,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딴 소리냐!”

    놀란 증위행귀가 흐릿해지면서 사라졌고, 그 뒤를 따라 아귀진독이 죽여 버리겠다며 주먹을 뻗은 채로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태나지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이 되어 코를 연신 찡그릴 따름이었다.

    ***

    7. 천하무적을 꿈꾸는 자

    해결의 벼랑, 후흑애에서 모든 의뢰는 총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의뢰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판단되는 것.

    둘째, 진지하긴 하나 말이 되지 않는 것.

    셋째, 진지하지도, 말도 되지 않는 것.

    이 중 셋째에 속한 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장난 가득한 내용이거나 전혀 내용이 없는 종이, 거의 일기나 다름없는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쓰레기나 다름없어 두 번 다시 쳐다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기에 따로 모아져 소각장으로 보내진다.

    둘째에 해당하는 서신들은 그나마 버려지진 않지만 그렇다고 의뢰가 수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두 달 정도 모아진 분량을 한꺼번에 보내게 되는데 본문에서는 그중에서 다시 분별하여 곱게 엿을 포장하여 답장을 보내는 것이다.

    이번에 보내진 것들 중에는 심온을 비롯한 후흑문인들을 즐겁게 해줄 만한 것들이 가득했는데, 그중 다른 무엇보다 시선을 끈 서신은 산서 진령 땅의 고첨이라는 청년이 보낸 것으로 내용은 이러했다.

    ―먼저 나를 소개하자면 돈에 구애됨이 없이 살아가는 올해 십구 세의 청년이라오. 그동안 나의 신조는 ‘인생을 즐겨라’였으나 얼마 전 한 사건을 겪은 뒤로는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오. 내 주위에는 다섯 명의 호위 무사가 늘 그림자처럼 수행하는바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뛰어난 것이라오. 나와 그들은 돈이라는 매개물로 연결되어 있다곤 해도 내 덕이 높고 지혜가 가득한 탓에 꼭 돈이 아니더라도 나를 존중하고 있다오.

    심온은 서신에서 눈을 떼고 잠시 코웃음을 쳤다.

    “이거 정신이 제대로 돈 놈일세.”

    심온은 얼마나 돌아버린 작자인지 확인코자 서신을 이어 읽어나갔다.

    ―하지만 지난번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기녀 매향이를 보기 위해 화월루에 들렀을 때, 그들은 내게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하고야 말았소. 본래 기녀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니 그만한 돈을 지불한 이상 몸을 몇 번 주물렀기로서니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소. 그러나 그날따라 어찌나 단호하게 버티는지 그 독한 계집은 내 손등을 물어버렸지 뭐요. 화가 난 나도 따귀를 갈긴 건 당연한 일이었소. 경험을 통해 나는 이럴 땐 아주 밟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즉시 거룩한 응징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오. 그런데 어이없게도 힘찬 박수로 응원해도 모자랄 내 호위 무사 중 하나가 날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소. 돈을 주는 건 나인데 내게 해악을 끼친 자를 돕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냔 말이오. 나 몰래 두 연놈이 정을 통한 것이 확실해 보였소. 그 정도야 딱히 증거를 댈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잖소. 남은 네 명의 호위 무사에게 반역한 호위를 제압하라고 명했지만 그놈들 또한 단체로 돌아버린 것인지 전혀 움직이려고 하질 않고 무거운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오. 그 뒤로 내게 벌어진 일은 지금도 떠올리지 싫은 악몽과도 같소. 나를 지켜야 할 호위 무사에게 두들겨 맞아 열흘간 앓아 누웠으니 내 분노와 수치가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겠소?

    여기까지 읽으며 심온은 ‘그럼 그렇지, 아주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연히 앞으로의 내용은 폭력을 행사한 호위 무사를 잡아달라는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다른 길로 향해 있었다.

    ―…그 뒤 다섯 호위 무사들은 종적을 감추었고 난 즉시 더 강한 자를 기용하여 놈들을 박살 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바뀌었소. 문득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존재란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오. 더불어 내가 만약 힘이 있었다면 한낱 기녀 따위가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겠으며, 호위라는 자들이 오만방자한 짓을 할 수 있었겠소?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함이란 것을 깨닫자 지금 내 마음은 심히 급박하다오. 부디 내가 천하무적이 되도록 이끌어주시오. 영약을 찾아오고 비급을 구해다 주시오. 결코 쉽게 터득되지 않는다 해도 난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소. 어릴 적엔 신동이라고 불렸던 나이니 비급의 이해에 대해선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여하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부탁하리다. 후흑문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내게 증명할 기회가 되리라 믿소.

    불손하기 짝이 없는 말로 마무리된 탓에 심온은 쌍심지를 켰다.

    세상이 넓은 만큼 미친놈들도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망할 놈을 봤나!”

    심온은 곧바로 붓을 들어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거기엔 멋진 해결책, 정녕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비결이 기록되었다. 그대로 따라 한다면 그보다 고소한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비웃어주는 것이 되므로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내용이었다.

    * * *

    중원표국을 통해 고첨에게 서신 한 장이 전달되었다.

    서신 운반을 맡은 표사는 서신의 내용이 일급을 요하는 문서이기에 오직 고첨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고 하였던 터라 서신을 눈앞에 둔 고첨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봉인을 뜯고 슬쩍 젖히니 예상했던 대로 반가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후흑문.>

    “클클, 눈이 빠져라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그는 일급 비밀의 상태로 전달되어졌기 때문에 서신의 내용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기쁨의 무게로 가득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루마리를 펼쳐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읽어나갔다.

    ―보내신 의뢰의 내용은 잘 보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많이 상하셨습니까? 세상에는 보잘것없는 인간들이 그 보잘것없음을 의(義)와 신(信)을 가장하여 위선을 떨기도 한답니다. 호위 무사들의 패역한 행위는 단언하건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당장 잡아다 대인 앞에 무릎 꿇리고 백배사죄하게 만들어야 옳겠으나 대인처럼 고결한 분 앞에 몹쓸 놈들의 안면을 들이댄다는 것은 굳이 더러움을 한 번 더 보게 하는 것이 될 것 같아 버려두기로 했습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동서남북, 상하좌우를 설쳐 대는 그들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니 대인께서는 속히 그 원한을 잊으시길 바랍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고첨의 안색은 환희로 가득했다.

    칭찬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기쁨의 높낮이가 현격히 차이가 나는 법이다. 거렁뱅이나 폐인, 못 배워먹은 하층민들에게 칭찬을 듣는다면 도리어 입맛이 쓸 것이나 대단하게 여기고 있던 후흑문에서 칭송을 퍼부어대니 기뻐서 펄쩍펄쩍 뛸 지경이었다.

    그에게 심온이 이와 같이 칭찬의 글을 잔뜩 써보낸 것은 이미 고첨의 글을 보고 ‘포악하면서 멍청한 녀석’이란 점을 바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함정이란 더욱 안전해 보이고, 더욱 평탄해 보이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서신의 내용이 이어졌다.

    ―…다음으로 대인께서 원하시는 천하무적의 무공 비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고하고자 하는 건 본 문으로서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무공이 존재하나 과연 대인께서 만족하실 만한 것을 찾으려니 선뜻 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열흘의 밤과 낮 동안 수많은 정보들을 분석하고, 기이한 고서들을 참고하였으나 최고의 비급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제껏 드러나지 않은 무공 중 그나마 목록에 오른 것은 세 가지 정도였습니다.

    여기에서 고첨은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타는지 혀로 입술을 핥고 마른침을 삼켰다.

    ―달마칠검(達磨七劍)과 태극천혜진경(太極千慧眞經), 분홍마편칠십이장(分烘魔鞭七十二章)이 바로 그것인데 달마칠검은 소림사의 달마조사가 말년에 자신의 모든 무학의 정수를 담은 것으로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림의 통념을 깨고 일검에 산악을 자르고 바닷물을 가르는 위력을 지닌 무공입니다. 태극천혜진경 또한 그에 못지않습니다. 무당파의 개파조사인 장삼봉은 꿈결 같은 많은 무학을 창시하였으나 정녕 태극천혜진경에 비하면 모두 어린아이의 손짓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태극천혜진경은 무당파에서조차 존재 여부를 모르고 있다고 하니 진정 비밀 중의 비밀이요, 최강 중의 최강의 무공의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세 번째 분홍마편칠십이장은 유일하게 달마칠검과 태극천혜진경에 맞설 수 있는 무공입니다. 이것은 채찍을 무기로 사용하며 삼라만상의 변화를 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손을 한 번 떨치는 순간 하늘과 땅은 온통 채찍의 그림자에 뒤덮이고 그 앞에는 그 누구도 온전히 서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분홍마편이라 불리는 절세의 병기가 없이는 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대인께서는 이 셋 중에 하나를 택하여 얻으실 수 있으며, 그중 세 번째인 분홍마편칠십이장을 택하실 경우, 신병을 찾을 때까지 대략 일 년 정도를 기다려 주셔야 하는 수고로움을 몸소 겪으셔야만 합니다.

    고첨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달랑거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이 옳을까 고민했다.

    ‘단순히 무공의 명칭만으로 보자면 달마칠검이 제일 자세가 나오는구나. 예스러우면서도 검을 사용한다는 것에서 오는 멋이 느껴진다랄까. 하지만 소림사 쪽이면 중들이잖아. 앞으로 강호의 영웅이 된다면 선녀를 방불케 하는 미녀들이 줄을 설 텐데 좀 문제가 될 것도 같은걸. 그럼 태극천혜진경으로 할까? 아니야, 어쩐지 두 번째라는 것이 걸려. 달마칠검엔 안 될 것 같단 말씀이야.’

    분홍마편칠십이장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 년 동안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딱히 한 가지를 정할 수 없고, 또 서신의 내용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에 고첨은 일단 생각을 접고 다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우리는 대인의 인격과 명망을 생각하여 이 세 가지 무공을 권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의뢰금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그중 하나를 전해드릴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후회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인께서 원하시는 것은 비교를 거부하는 최강이지, 그 무엇과 견줄 수 있는 강함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대인께 고금 이래 그 누구도 도달치 못했던 엄청난 무의 길을 제시할까 합니다. 불굴의 의지와 천년고목의 뿌리보다 견고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대인이시라면 능히 이루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고첨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자신이 불굴의 의지와 견고한 정신력의 소유자란 점은 뭐 그냥 대충 이해하겠는데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앞서 소개된 세 가지 무공을 능가한다는 것인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대인께선 장차 이러한 이름으로 불려지실 겁니다. <상상초월객> 그렇습니다. 이 경지는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을 하면 그에 걸맞는 것을 언젠가는 만들어내고 맙니다. 하지만 이 경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 무공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이 안 되는 무공을 말입니다.

    ‘오호, 상상초월객! 멋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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