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08화 (108/125)
  • # 108

    변화가 온 것이다. 벽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오오오!”

    그러나 아직 놀라긴 일렀다. 입을 다물기도 전에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불쑥 벽에서 손 하나가 빠져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귀혈마로서는 이놈이 누구냐, 싶었겠지만 그는 물론 조극파의 보스 온량이었다.

    변화를 기다리고 있던 귀혈마와 새 시대의 거대한 힘을 찾아온 온량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던 한순간,

    “넌 누구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묻고는 흠칫했다.

    그때 귀혈마는 온량의 손에 쥐어진 패를 보았다. 귀령비서에 그려졌던 월패가 틀림없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것은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 미소였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인상을 찡그린 것이었다.

    온량은 거대한 힘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달리 무슨 해골바가지 같은 인간이 오만상을 쓰는 것을 보게 되자,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문득 소싯적 읽었던 무협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렇지. 보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괴물들이 지키고 있지 않았던가. 그럼 먼저 이놈을 처지해야겠구나.’

    온량은 뒷춤에서 권총을 꺼내 귀혈마에게 겨누었다.

    “뭐냐?”

    귀혈마가 물었다.

    “이거? 정말 모르냐? 그럼 일단 맞아봐라.”

    탕!

    둘 사이의 간격은 채 이 미터가 되지 않았기에 빗나갈 일도 없이 귀혈마의 가슴에 총알이 박혔다.

    “윽!”

    귀혈마는 극심한 통증에 뒤로 물러났다. 온량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한가득 떠올랐다.

    “아프냐?”

    그는 차근히 이 상황을 즐기고자 권총을 겨냥한 채 히죽거렸다.

    그로선 귀혈마를 알지 못하였기에 그러한 여유가 안타깝게도 저승길을 재촉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런 호로상놈을 봤나!”

    귀혈마는 용수철처럼 튕겨 온량의 권총을 쳐내고 곧바로 장력을 내질렀다. 가히 권총의 위력에 수백 배에 달하는 힘이 온량의 머리에 작렬하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온량은 머리가 으깨어져 즉사했다.

    그는 공간월패를 통해 보게 되리라는 ‘거대한 힘’을 결국 보게 되었고, 그 힘에 의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귀혈마는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에 잠시 벽을 잡고 숨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암기였단 말인가.’

    엄청난 소음과 함께 가슴을 타 들어가게 하는 듯한 공격, 다행히 심장을 벗어났기에 망정이지 자칫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화가 나 온량의 머리를 몇 번 더 밟아주고는 공간월패를 주워 들었다.

    큰 소음으로 인해 추적자들의 발걸음이 빨라졌을 것이란 점을 감안해야 했다. 이때 벽은 어느새 다시 평소의 딱딱한 형태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기에 귀혈마는 벽의 음각에 월패를 맞추었다.

    그러자 다시금 벽이 광채로 일렁였다.

    귀혈마는 온량이 그러했던 것처럼 빛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는 끝에 가서 벽을 통해 빠져나왔다.

    그는 이 동굴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그는 문득 탄성을 터뜨렸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이 동굴은 분명 자신이 머물렀던 동굴이 틀림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는 점은 마땅히 있어야 할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머리가 멍청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월패를 이용해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지며 시공을 넘나들게 된 것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귀혈마는 타는 듯한 가슴 통증 속에서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섰을 때 그는 희한한 광경에 잠시 통증마저 잊을 지경이 되었다.

    주변을 감싸고 선 사람들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복장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뭐지?’

    동굴 밖에 빙 둘러선 것은 물론 조극파의 조직원들이었다.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 손에 권총과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모습에 귀혈마가 어리둥절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극파의 조직원들의 어리둥절함도 귀혈마에 비해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행동대장 선봉독의 눈이 화등잔만해져 부두목을 바라보았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부두목의 말이 맞았다.

    ‘두목에게 변고가 생기고 엉뚱한 놈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부두목 장춘굉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귀혈마를 바라보고 섰다.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칠 일 전부터 그는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두목이 동굴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골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나타난다. 그들은 방심하고 있는 사이 모두를 전멸시켜 버리는 꿈이었다.

    꿈이 한 번으로 그쳤다면 피식 웃고 말았겠지만 일곱 번 연속해서 똑같은 꿈을 꾼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혹여 모를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위기 상황을 미리 주지시켜 놓았던 것인데, 지금 상황이 꿈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것이니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쏴라!”

    귀혈마는 이미 권총의 위력을 한번 맛본 터라 신형을 솟구쳤다. 하지만 그를 겨냥하고 있는 건 권총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자, 그의 몸은 거대한 땀구멍이 열린 것처럼 시원스러운 구멍이 온몸에 생겨나면서 속절없이 추락했다.

    “저 새끼 뭐야! 마이클 조던도 아니고, 뭔 점프를 저렇게 높이 하냐!”

    조직원 중 하나가 놀라서 하는 말이었다.

    귀혈마의 죽음과 함께 그가 지니고 있던 월패 또한 총에 맞아 산산이 부서져 가루로 변했다.

    강호를 위진시켰던 귀령비서의 예언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새 시대를 볼 것이며, 가공할 무기를 보게 될 것이다.

    * * *

    총 소리를 듣고 달려온 장로 이연과 좌염 등은 동굴 안을 살펴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머리가 으깨진 시체가 입고 있는 옷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신발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희생자가 한 명 늘었군요.”

    좌염의 말에 이연은 묵묵부답인 채로 주변을 둘러보다 뭔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미래에서 온량이 가지고 온 권총이었다.

    “이건 뭘까?”

    이연은 권총의 총구를 자신 쪽으로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러다 씩, 웃고는 총구를 돌려 오른쪽 벽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엄청난 소음에 모두들 놀란 가운데 이연은 벽에 난 구멍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뭐야? 이거, 대단한 놈인걸. 대단한 암기야!”

    그렇게 권총 한 자루가 후흑문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 뒤 권총은 후흑문의 비고에 보관되어졌고, 귀혈마에 대한 소식은 영영 강호에서 끊어졌다. 후흑문에서는 이후 꾸준히 귀혈마에 대한 정보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이미 미래로 가서 죽은 귀혈마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6. 마계는 계약을 원한다

    마계의 신 아귀진독의 요즘 생활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지상의 인간들 중 허황된 생각을 가진 자들을 미혹하여 영혼을 팔겠다는 계약을 맺어 결국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인데, 근자에는 도통 이 일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귀진독로서는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눈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동료들은 언젠가는 재미난 일이 생길 것이라며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지만 실은 말하는 그들도 확신은 갖지 못했다. 그만큼 영혼을 팔겠노라며 계약을 맺는 이는 현 시대에 매우 드문 상황인 것이다.

    아귀진독은 마계를 통치하는 극존께 보직 변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그러했지만 실상 그런 이야기를 자신이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아귀진독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꽤 된 일이지만 요무신귀가 극존님께 보직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새로운 일을 원했을 때, 모두의 관심사는 요무신귀가 무사할까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면담을 마치고 얼굴 표정도 환하게 돌아오자, 어느 하나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극존님의 그동안 명성을 생각해 보건대 이건 단순히 예상을 뛰어넘는다, 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괴이하고 희한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방금 누워서 떡을 먹고 왔다는 듯한 표정으로 너스레까지 떠는 모습에 모든 마계의 신들이 할 말을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무신귀는 그다지 똑똑한 편이 아니었으며, 대단한 업적을 쌓아놓아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더욱 아니었기에 모두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정책이 바뀐 걸까?”

    “이거 나도 보직 변경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걸.”

    “마계에 배려라니… 말도 안 돼.”

    “꿈이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지. 우린 꿈을 꾸지 않으니까.”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속으로는 이처럼 굉장한 반응을 품고 있었다. 그때 요무신귀가 의문 어린 눈동자에 친절한 설명으로 답을 주었다.

    “기뻐해 줘. 난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어. 이 변화는 내게 대단한 거야. 시간 끌지 말고 이야기해 보라구? 좋아. 내가 맡은 일은 지상 세계에서 행해지는 아름답고 선한 일들을 살피고 기록하는 거야. 이제 일이 없어 심심해질 일은 없을 거야. 벌써부터 흥분되는걸.”

    그러나 요무신귀의 말을 들은 모두는 다른 의미에서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 표정들은 생생히 살아 있어 표정만으로 이미 언어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멍청이를 봐. 기뻐하고 있어.”

    “정말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구나.”

    “저 녀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바보였다니.”

    “충격 때문에 미쳐 버렸는지도…….”

    “이렇게 하나가 떠나는구나.”

    “굉장한 교훈인걸. 이런 시도는 적어도 앞으로 오만 년까지는 유효할 것 같군.”

    요무신귀는 어깨를 으쓱하며 ‘왜?’라고 물었고, 모두들 아무 대답도 없이 침만 삼키고 있는 것을 보고는 흥얼거리면서 처소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무신귀는 영원히 소멸되었다. 물론 그전의 처참한 고통의 시간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인간 세계의 수천만 가지의 악을 통해 파멸로 이끌어가야 할 마계의 신에게 아름답고 선한 일들을 보고 기록해야 한다는 것은 지독한 자기파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곁에서 지켜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요무신귀가 소멸되기까지도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정녕 괴이한 자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이만 년이 지난 이야기를 떠올리는 아귀진독은 더 이상 보직 변경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선한 일을 찾아다니는 것보단 아무 일이 없어 무료한 편이 수만 배 나은 것이다.

    그는 태나지귀를 마음속에 떠올렸고, 그 즉시 몸이 흐릿해지면서 어느새 태나지귀가 머무는 곳에 이르렀다. 태나지귀는 게으름을 유도해 영혼을 갈취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웬일이야?”

    “뭐, 늘 그렇지. 하루하루 시간 때우기도 힘들어서 여기저기 다니고 있어.”

    그랬다. 태나지귀보다 더 친한 녀석들에겐 너무 자주 갔다. 이젠 순례를 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

    태나지귀가 꽤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눈치였기에 아귀진독도 이내 진중해졌다.

    “아무래도 겁이 많아졌다고밖에는…….”

    진중함에 비해 그의 답변은 망설임이 없었다. 겁이 많아졌다는 말은 확실히 정답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해결책이 뚜렷이 떠오르질 않는 것이 바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어려운 일에는 항상 방해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구체적인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보는 것은 어때?”

    “흠, 그럴듯한데.”

    그때 옆 자리가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하면서 증위행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하는 일은 ‘거짓말로 인한 파멸’이었는데, 마계의 신들 중 가장 바쁜 다섯 중 하나였기에 태나지귀와 아귀진독는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흐흐흐,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하루쯤은 거짓말이 부풀어 오르도록 기다리기도 해야 하니까.”

    인간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거짓말을 하는데 증위행귀에게 있어 그것은 초대장과 같은 것이었다.

    거짓말이 뱉어내어지는 순간 그 사람 곁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루에만도 너무나 많은 거짓말이 쏟아져 나오는고로 그들 모두에게 갈 수 없는 노릇이었고, 과한 거짓말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찾아다니는 증위행귀였다.

    할 일이 없기로 명성이 드높은 아귀진독이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날 비웃으러 왔다면 아주 제때 잘 온 거야. 난 지금 절망적이거든.”

    “비웃긴 누굴 비웃겠어. 힘내.”

    어깨를 두드리는 증위행귀의 손길에 아귀진독는 힘겹게 웃어주었다.

    증위행귀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걱정 마.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지 않던가.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순식간에 쥐로 전락하고 만 아귀진독의 얼굴은 참담히 일그러졌다.

    “이봐, 농담이야. 설마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건 아니지?”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태나지귀가 끼어들었다.

    “증위행귀, 이 친구야. 지금 아귀진독는 꽤나 심각한 상태란 말이야.”

    아귀진독는 한층 풀이 죽었다.

    증위행귀는 미안했던지 활달한 어조로 위로했다.

    “이봐, 힘내. 이대로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영혼을 팔겠다는 거래를 할 사람이 왜 없겠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데 말이야. 내가 맡고 있는 일도 어떤 날은 폭주하다시피 하고 또 어떤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한가할 때도 있어. 갑자기 잘 풀릴 수도 있으니까 너무 근심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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