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緞×?걸치며 조롱했다.
그러나 방원영은 역시 조직의 보스답게 의연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선봉독, 이 무슨 행패냐?”
“무슨 행패는 무슨 행패겠냐? 이쯤 되면 갈 때까지 간 것이지.”
특별히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끝을 내겠다는 말이어서 방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조극파는 북경에서 가장 큰 주먹 세력이고 경찰이나 각계 공무원 쪽에 심복들이 활약하고 있어서 정부에서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세력이었다.
이미 탄탄한 힘을 갖춘 조극파는 괜한 피를 흘려 사회의 이목을 끌기를 원치 않았기에 원앙파를 비롯한 다른 세력들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버젓이 얼굴을 드러내 놓고 칼을 휘두르려 하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하하하하하하……!”
방원영은 호통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너무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어서 한순간이나마 아파트가 아니고 거대한 기암절벽에서 영웅호걸이 웃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고작 일곱으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내 존재가 고작 이것이었나. 조극파에게 실망인걸.”
“흐흐, 원래 영화나 소설에선 죽을 놈들이 크게 웃거나 허튼소리를 지껄이지. 말이 많다는 건 두렵다는 말과 동의어거든.”
말을 맺음과 동시에 선봉독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저만치 발코니 뒤쪽에서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목에 월패가 걸려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찾았군. 그렇다면 시간을 끌 필요가 없겠지.’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이 방원영 어르신의 솜씨를 보여주마.”
방원영은 어느새 태극권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십 년 전부터 태극권에 심취하여 지금은 발경을 이룰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라 있었다. 이 년 전에는 태극권의 고수보다는 영화배우로 더 알려진 이연걸에게 태극권의 정수를 듣기도 한 그였다.
북경창권의 주먹이 매섭다고 이름 높았지만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수법을 사용한다면 능히 십여 수 만에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북경창권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나면 그 부하들은 꽁무니를 빼기 바쁠 터였다.
기세를 취하던 방원영의 몸이 좌우야마분종에 이어 백학량시(白學亮翅)를 펼치자 구름과 바람같으면서도 사뭇 진지하고 위엄이 넘쳤다. 결코 허세가 아님을 보이듯 그의 주위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넘실거렸다.
비록 아무것도 입지 않아 가운데가 덜렁거리긴 했지만 이미 방원영은 무아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접근하는 모든 것은 그가 일으킬 파동에서 견뎌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북경창권의 눈썹이 곧추세워지고, 그 부하들의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며 그때까지 발코니에서 은밀한 부위를 가리고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채화화는 내가 언제 두려워 떨었냐는 듯 당당히 정자세로 선 채 미소까지 머금었다.
그녀는 두목의 여인이라면 당당해야 하고, 비록 비소가 보인다 해도 저들은 오늘 살아서 돌아가기 힘들 것이기에 죽기로 예정된 자들을 위한 마지막 구경거리 정도쯤은 제공해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방원영의 움직임이 좌우누슬요보(左右樓膝幼步)에서 수휘비파(手揮琵琶)에 이어 좌우도권굉(左右倒권肱)과 남작미(攬雀尾)로 이어지자 북경창권은 한 걸음 물러서며 부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하는 성실하게 품에서 물건을 꺼내 올려놓았고, 이윽고 북경창권 선봉독은 방원영을 가리키며 망설임없이 손가락을 구부렸다.
팡, 팡, 팡, 팡.
소음기가 장착된 베레타 최신형 권총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고, 방원영은 이마에 두 방, 가슴에 두 방을 맞고 태극권 중 쌍봉관이(雙峰貫耳)를 펼치다 죽음을 맞았다.
허리에 당당히 두 손을 올려놓고 거만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발코니의 여인 채화화는 지금 막 자신의 세 번째 남자가 세상을 떴다는 충격과 함께 곧바로 몸을 웅크리고는 부들부들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북경창권 선봉독은 터벅거리며 방원영의 주검을 밟고 걸어오더니 웅크리고 있던 채화화에게 서서히 얼굴을 가져다 댔다.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살아야 해. 살아남아야 해… 이 남자가 왜 내게 머리를 디미는 걸까? 키스를 하고 싶은 걸까? 키스를 해야 하나? 지조가 없다고 밖으로 내던져 버리면 어쩌지? 그럼 거부해? 거부했다고 총으로 쏘면?’
연신 눈을 깜박이며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굴리던 채화화는 결국 키스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술을 가만히 내밀어 새로운 남자를 영접했다.
짝!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인정사정없는 뺨따귀였다.
“이거 뭐 하는 년이야? 어디서 주둥이를 내밀어. 이걸 그냥…….”
북경창권은 널브러진 채화화의 목에 걸린 월패를 잡아채 안쪽 포켓에 집어넣고는 권총을 겨누었다.
“사, 살려주세요. 무엇이든 할게요. 몸을 팔라면 몸을 팔게요. 제발요, 제발…….”
불쌍한 사슴 한 마리처럼 덜덜거리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팡!”
선봉독은 진짜 총을 쏘는 대신 입으로 소리를 내고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휴우.”
채화화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고는 오늘 해가 뜨기 전까지 어디를 어떻게 가서 숨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는 시골에 틀어박혀 순진한 총각 하나 물어 조용히 살고 싶었다. 엘리트고 카리스마고 다 필요없었다. 그저 순진하고 명이 긴 놈이라면 된다.
그때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선봉독의 음성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정작 채화화에겐 벼락이 내리치는 것만큼이나 거대하게 들렸다.
“여자는 원앙파의 보스를 죽이고 스스로 투신자살했다더라. 안타까운 일이지.”
바닥엔 총이 놓이고, 곧바로 달려든 조직원 세 명에 의해 그녀는 영차, 하는 소리와 함께 난간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녀는 문득 두 번째 남자 남헌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죽음이 과연 신문 1면에 실리게 될지 아니면 사회면 구석에 조그맣게 실리게 될지를 떠올렸다. 그러다 이 상황에서 그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흐흐, 아무렴 어때?’
퍽!
수박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다음날 신문 어디에도 그녀의 소식은 없었다.
***
5. 시공을 초월한 만남
선봉독으로부터 월패를 건네받은 조극파의 보스 온량은 입가의 미소를 막지 못하고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선봉독은 보스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대체 월패가 무엇이기에 저러는지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이 되었다. 하지만 감히 물을 수는 없었고, 보스 또한 거기에 대한 말은 없이 수고를 치하할 따름이었다.
“고생이 많았다.”
“물러가겠습니다.”
혼자 남게 된 온량은 월패를 쥐고 오른쪽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원목에 월넛 색상을 입힌 고급스러운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그는 중간쯤에 있던 두툼한 책을 뽑더니 손을 쑥 집어넣었다 뺐다.
그리고 다시 그가 책을 꽂아 넣었을 때 책장은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적의 이야기에 나왔던 마법 동굴마냥 스르르 중간이 갈라지며 새로운 공간을 보여주었다.
그가 성큼 안으로 들어가자 책장이 저절로 닫혔고,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도다. 시공을 지배할 정복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는 옥함을 열어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사시미를 든 백여 명의 적 앞에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던 그였으나 지금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공을 넘나드는 자, 가공할 힘을 얻으리라.
이러한 문구와 함께 북경 서남쪽에 자리한 소오태산의 한 동굴의 위치와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월패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가 보이지 않는 선을 무너뜨리고 원앙파 두목을 제거하였던 것에는 앞으로의 자신감 때문이었다.
서신을 발견한 그는 거의 이 년여에 걸쳐 공간월패를 찾아다녔고, 이제 그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미 소오태산의 동굴에 대해서는 탐색을 마친 뒤였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초승달 모양이 들어갈 자리가 안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이 밤엔 설레임을 만끽하고 싶었다.
내일이다.
내일은 온 인류에 전례가 없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 * *
귀혈마는 허벅지에 꽂힌 암기를 뽑아내며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작자들에게 쫓겨 내공이 거의 고갈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일 대 일의 대결이라면 어떻게 해보기라도 할 텐데 일곱 정도가 죽자고 달려드니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중 늙은이 하나는 과연 일 대 일로 붙는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키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무공의 소유자였다.
현재는 간신히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몸을 빼내긴 했지만 또 언제 귀신처럼 달려들지 모르는지라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의 최선은 일단 귀령비서에 적힌 내용대로 소오태산 동굴에 들어가는 것이 시급했다.
귀령비서에는 분명히 ‘새 시대를 보게 될 것이며, 가공할 힘과 가공할 위력이 담긴 무기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이 새벽을 지나 적어도 오전 중으로는 동굴에 도착해야 한다. 더 지체된다면 추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꿈이고 나발이고 모두 허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 개놈의 자식들을 만나면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제길, 역시 죽지 않았군요.”
형벌당주 좌염의 불만 가득한 말에 장로 이연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혈마가 그리 쉽게 죽는다면 우리가 이렇게 나설 필요가 있었겠냐?”
좌염은 끙, 하는 소리를 내고는 수하들에게 명했다.
“흔적을 찾는다.”
분명 귀혈마의 행동에는 어떤 방향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귀령비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곳에서 그가 기연을 얻을 수도 있었고, 소문대로 엄청난 무기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괴물을 수하로 두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모든 추측의 결론은 귀혈마를 되도록 빨리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기에 후흑문인들의 눈은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부릅뜬 상태가 되었다.
* * *
늘 조용한 등산객들에게 길을 안내하던 소오태산은 오랜만에 흉흉한 사나이들을 맞이했다.
산을 오르는 데 있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양복과 넥타이, 그리고 불편한 구두. 거기에 더해 각종 권총과 기관총까지 겸비한 이들이 이른 아침 소오태산을 정복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조극파의 보스인 온량이었다.
부하들은 그에 걸맞게 인상을 굳힌 채 걷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보스의 속마음이 사실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희열을 감추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일행 중 중간 정도에서 걸어가던 부두목 장춘굉은 서서히 걸음을 늦추면서 행동대장인 선봉독 곁에 붙었다.
“차질없이 준비했느냐?”
“물론입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선봉독의 얼굴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더욱 신중해져야겠지. 만약 일이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부두목 장춘굉의 말에 선봉독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월패를 품고 거대한 꿈을 꾸고 있는 자는 한쪽에서 괴이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라!”
부두목 장춘굉의 지시에 부하들이 부채꼴로 경계를 펼쳤다.
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 *
귀혈마는 동굴에 앉은 채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굴의 안쪽은 가로막혀 있었기에 만약 추적자들이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동굴의 끝 벽면에는 귀령비서에 기재된 초승달 모양의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문제는 음각에 끼어 넣을 패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귀령비서의 설명에는 동굴에서 한 시진 정도 기다리고 있노라면 갑작스런 변화와 함께 패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일단 기다려 보는 수밖엔 달리 길이 없었다.
* * *
온량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월패를 꺼내 들었다.
벽면에 새겨진 초승달 문양에 끼어 맞추려던 그는 한숨과 함께 손을 거두었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마냥 덜덜 떨려 잘 맞춰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연약함이란 말이냐. 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이다. 거대한 힘과 맞닿을 나이건만 이처럼 소심해서야 되겠는가.’
그는 주먹을 불끈 쥐어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후 공간월패를 벽에 맞추었다.
순간 월패 주위로 백색 광채가 뿜어지더니 빛무리가 마치 물결의 파문처럼 동굴 벽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윽고 벽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고, 끼어 넣었던 월패는 두둥실 떠올랐다. 온량은 혹시 월패가 땅에 떨어질까 염려스러워 얼른 월패를 손에 쥐었다.
온량은 벅차오르는 감동에 사로잡혔고, 조심스럽게 벽을 만져 보았다. 아무 걸림도 없이 손이 벽 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벽 안쪽으로 사라진 손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손을 꺼냈다가 또 밀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벽에 뚫린 공간은 확장되었다가 다시 오므라들었다.
‘거대한 발걸음을 딛겠다.’
온량은 걸음을 옮겼고, 이내 벽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빛으로 만들어진 길이 있었다. 길 바깥쪽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당연히 빛을 따라 걷는 수밖에 없었다.
오 분가량 걸었을까.
길이 끝나고 일렁이는 벽이 나타났다.
“아, 드디어!”
* * *
귀혈마는 일각의 간격으로 동굴 입구 쪽으로 달려가 바깥 동태를 살피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벽면을 뚫어져라 바라볼 따름이었다.
초조함이 더해질 무렵, 그의 동공이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