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06화 (106/125)

# 106

대답은 웃음소리가 대신했다.

소리의 진원지를 발견한 선봉독의 눈이 살짝 치켜 올라갔고, 작은 몸짓 하나에도 행동대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맞으면서 배운 부하들은 웃던 인간들 중 하나를 들어 뱃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칼을 쑤셔 박아 넣었다.

슥, 슥, 슥.

칼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차갑게 룸 안에 울려 퍼졌다. 구석지에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던 여인들은 이젠 거의 부들부들 떨면서 울음소리를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어쩌면 오늘 고기나 야채를 썰어야 할 칼이 자신들의 뱃가죽을 썰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모든 합리적인 이성을 마비시켰고, 의식은 미사일에 맞은 빌딩처럼 붕괴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조직원 중 하나가 목숨을 잃었을 때 더 이상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웃음을 멈추게 할 의도로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성공이었다.

“방원영은 어디에 있느냐?”

선봉독의 물음은 아주 간명했다. 이것은 대답 또한 매우 빠르고 직설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면 여전히 그 옆에는 배경음처럼 죽은 시체에 칼이 틀어박히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원앙파의 간부인 홍묘환은 오늘 이 상황이 가볍게 살인에 이를 정도로 심각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줍잖게 반항하는 태도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악물고 버틴다면 한 시간 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뒤에는?

결국 입을 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팔 하나가 잘려져 있거나 정강이뼈가 부러지거나 이빨이 다 뽑혀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목은… 요천번에 있다.”

“꽤 똑똑한 머리를 가졌구나. 요천번이라면 이번에 새로 건축된 북쪽의 아파트 말이냐?”

“그렇다.”

“그중?”

“F동 1004호.”

“좋아, 좋아, 네 눈을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구나. 네 이름은 뭐냐?”

고분고분히 원하는 답을 들려준 덕에 북경창권 선봉독의 목소리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홍묘환.”

“홍묘환이라… 내 잊지 않으마. 나중에 염라대왕이 물으면 ‘아, 그때 그놈 말입니까? 홍묘환이라고 합디다’라고 대답해야 하니까 말이다.”

선봉독은 순간 공포에 물든 홍묘환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목이 꺾일 수 있는 한계선을 지나쳐 돌려 버렸다.

우드득.

목이 힘없이 처지는 것을 보고 여인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고, 룸 안의 포로들은 속절없이 목숨을 잃어갔다.

* * *

채화화는 북경의 고급 아파트 요천번의 한 침대 위에서 세 번이나 순식간에 홍콩을 넘나들었다.

그녀가 원앙파 두목 방원영의 여자가 된 것은 이십 일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나이가 57세이고 아랫배가 조금 나왔으며 머리카락은 몇 올밖에 없었지만 그의 정력은 어줍잖은 이십대보다 강했으며 지독히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사내였다.

또한 조직의 보스라는 점은 그녀를 마치 황후마마와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는데, 건장하고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머리를 숙일 때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 미칠 것만 같았다.

특히 잠자리에서 자신이 위에 올라 말을 타듯 몸을 구를 때는 원앙파라는 조직의 보스도 결국 자신의 밑에서 옅은 신음을 낸다는 것이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로 아파트 발코니에 서서 와인잔을 기울였다.

와인잔 너머로 북경 시내의 밤의 광채가 굴절되어 비춰졌다.

“선물할 게 있다.”

채화화는 방원영이 한 손을 뒤로 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고, 그런 자세를 취할 때면 언제나 훌륭한 보석 따위가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 되었다.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도 잊은 채 별빛이 찰랑이는 눈동자로 바로보고 있자니 방원영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오늘밤을 기다렸어.”

그의 손 위에는 아주 오래된 돌로 만든 초승달이 있었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모를 형상이 음각된 초승달은 정말 쌍둥이처럼 오늘 떠오른 초승달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채화화는 이전에 선물을 받았던 것처럼 기쁜 표정이 되진 않았다. 비록 돌로 된 초승달과 오늘밤의 초승달이 일치된 것이 기묘하고, 꽤 오래된 골동품으로 보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저 달을 닮은 돌덩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반짝이는 돌이었지 그저 뭔가를 닮은 시시한 돌덩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채화화는 속마음을 숨겨야 할 때가 언제쯤인지 아는 여자였다.

“멋지군요. 당신은 언제나 최고예요.”

가볍게 다가가 입을 맞춘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하늘에 세련되게 걸린 초승달에 월패를 맞추어보았다.

“오늘 선물은 당신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아요.”

방원영은 그녀의 반응에 약 70%는 만족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밤은 세 번이나 뜨거운 활화산의 분출이 있었고, 지금은 멋지게 마무리를 할 때였다.

“이제껏 나는 항상 새롭고 눈부신 것을 선물했었지. 하지만 오늘 오래된 유물을 선물한 것은 너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기도 해. 영원히 내 곁에 머물러 줄 수 있겠니?”

그 말과 함께 방원영은 월패 위쪽으로 꿰어진 금줄을 잡아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채화화의 눈엔 순간 촉촉한 이슬이 울컥 솟구쳤다. 시시하게만 여겼던 월패도 새롭게 보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원앙파의 두목은 결코 이렇게 부드러운 사내가 아니었다.

방원영이 한참 활약할 때인 이십대에는 걸어다니는 난장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삼십대에는 눈부신 회칼, 사십대에는 카리스마라 불렸다.

그런 그가 이렇게 부드러워졌다는 것에서 채화화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산악인에 버금가는 정복감을 느꼈다. 히로뽕 주사를 연달아 셋방 맞아도 이 기분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었다.

파팟.

마주친 눈빛에서 스파크가 일며 두 사람의 입술은 곧바로 달라붙었다. 서로의 입과 혀를 먹어 치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꿈틀대던 둘은 오늘의 네 번째 활화산 폭발을 향해 나아갔다.

마음이 충만한 상태에서의 관계인데다 전면이 확 터진 발코니라는 개방적인 공간인 탓에 둘은 놀라우리만치 열정적이 되었다.

그녀가 발코니의 난간을 붙들고 허리를 숙이자, 방원영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붙들고 강력한 왕복 운동을 전개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방원영은 박자에 맞춰 사랑한다고 외쳤고, 그녀는 온몸이 화르르 불타는 느낌 속에서 이 사랑이 영원하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녀는 이제껏 방원영을 포함하여 세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었으나 방원영 이전의 두 남자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첫 번째 남자인 홍추는 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엘리트였는데 그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 후에 헤어져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려 할 때 사고를 당했다.

술에 취한 한 중년 사내가 발을 헛디뎌 전철 레일로 떨어지게 되자, 의협심에 충만한 그가 사내를 올려놓았고, 바로 그 순간 전철은 다가서는 중이었다.

홍추는 코너를 돌아오는 전철을 보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고 거의 임박해 올 때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해 비어있는 옆 레일로 점프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을 벌려 다물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기절하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그들은 자신이 보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두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저, 저 사람 왜 전철로 뛰어든 거지?”

그렇다. 짓쳐 오던 전철은 사실 홍추가 서 있던 레일 쪽이 아니라 그 옆 레일이었는데 코너를 돌아오는 상황만을 보고 홍추가 자기 레일로 착각하였고, 위급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러니까 정작 전철이 지나쳐 갈 상황에서 그쪽으로 죽으려고 뛰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건 명백히 자살이었다.

구함을 받은 술주정뱅이조차 이 어이없는 죽음에 멍해지고 말았을 정도였다.

첫 남자의 어이없는 죽음에 이어 채화화에게 두 번째 남자인 남헌이라는 사람이 찾아온 것은 실연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남헌은 젊은 나이에 대기업 실장이 된 유능한 인물로 그를 만난 것은 서로의 회사가 관련을 맺은 자매사였기 때문에 일 문제로 한두 번 만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서였다.

빼어난 미남에 늘 검도로 몸을 다졌던 그는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멋진 남자였다.

그는 어느날 상하이의 58층 기업 본사 빌딩 꼭대기에서 멋진 프로포즈를 준비하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포로포즈의 내용은 그가 빌딩의 옥상 난간에서 떨어지는 연출을 하면서 그녀에게 두 번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양복 안쪽에 패러글라이딩용 낙하산을 입은 그는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고 결혼해 줄 것을 청한 다음에 억지로 비틀거리는 척하면서 빌딩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기절할 듯 놀랄 것이고 엉엉 울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길 것이다.

하지만 1분도 채 되지 않아 활짝 펴지는 낙하산처럼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게 된다. 낙하산의 위쪽으로는 ‘나와 결혼해 주오. 영원히 그대를 사랑하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몇 번의 연습 끝에 정해진 시간에 그녀가 옥상으로 올라왔고, 남헌은 연습했던 대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할 행동을 취했다.

그녀의 놀람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곧바로 엉엉 울면서 그를 붙들고 안쪽으로 끌어내리려 했고, 남헌은 이 멋진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더욱 강렬히 저항하며 빌딩 바깥쪽으로 잔뜩 무게 중심을 실었다.

“날 믿어.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채화화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첫 번째 남자를 허무한 사고로 잃은 그녀의 심리 상태로서는 이런 상황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이벤트 따위는 없어도 된다는 말은 이제껏 몇 번이나 했어요. 벌써 다 잊어버린 건가요?”

“괜찮다니까. 평생 한 번 있을 프로포즈를 평범하게 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실랑이가 오가던 중 행복의 신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고 그 자리를 저주와 조롱의 신이 차지했다.

칭.

무언가가 끊어져 나가는 소리가 났지만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남헌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고 뒤로 몸을 빼내려던 참이었고, 채화화는 순간적으로 붙잡고 있던 가슴팍을 놓치고 말았다.

“어, 어…….”

이윽고 남헌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남헌 씨! 흐흐흑. 남헌 씨…….”

그러나 남헌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그는 양복 윗저고리를 재빨리 벗고 손까지 친절하게 흔들어 보인 다음 낙하산 줄을 잡아당겼다.

“헉!”

그 순간 저주의 신이 남헌의 곁에서 살인적인 미소를 지었다.

남헌에겐 잡아당길 만한 것이 없었고, 예비 낙하산마저 펼쳐지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30층 높이에 이르렀다가 숨을 한 번 내쉬었을 땐 15층에 이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리고 이내 그의 면상과 가슴과 허벅지는 땅에게 엄청난 속도로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었다.

퍽!

다음날 그는 신문 1면을 장식했다.

<ㅇㅇ대기업 실장 건물 옥상에서 투신.

셔츠 위로 낙하산을 착용하였으나 제때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경찰 관계자는 처음 이 사건을 격무에 시달리고 있던 회사원이 삶의 허망함을 떨쳐 내고자 무모한 게임을 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 것으로 보았으나 낙하산을 조사한 결과 멋진 프로포즈를 위해 뛰어내렸으나 낙하산의 고장으로 사망에 이른 것 같다고 말하였다. 또 다른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기발한 프로포즈가 유행하여 그로인해 갖가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런 해괴한 프로포즈는 사라져야 할 이 시대의 문화가 아니겠냐는 말을 남겼습니다. 한편 사망자의 애인인 여인은 현재 두문불출한 가운데…….>

이로써 채화화는 두 남자를 떠나보내고 이승에 살아남았지만 그녀의 몸과 정신에는 죽음 이상의 상처가 남겨지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두 번 다시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게 된다.

그러길 오 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녀에게 홀연히 다가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원앙파의 두목 방원영이었다. 처음에 거부하였던 그녀가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두 남자가 엘리트들이었던 것에 비해 방원영은 나이도 많고 어둠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결코 방원영만큼은 속절없이 죽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헉헉헉… 헉헉헉.”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이 밤, 그녀는 강한 남자인 방원영과 오랫동안 사랑하며 살고 싶었다.

점점 격렬해지는 몸부림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오로지 거친 신음만이 오갔고 그 어떤 말도 필요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상 그 무엇도 지금 이 순간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쾅!

거의 벽이 무너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일단의 시커먼 무리가 방 안으로 난입했다.

“방원영, 어디에 숨은 거냐?”

한참 열에 들떠 있던 채화화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을 정도로 건방지고 사나운 말투였다. 바깥 입구와 계단으로는 부하들이 경계를 서고 있을 것인데 어찌 이리 불순한 사내들의 음성이 들릴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방원영은 얼른 몸을 빼 발코니 창 앞에서 나타난 불청객들을 바라보았다.

이때 그는 거의 절정에 이르러 있었고 로켓이 발사되기 직전인 상황에서 급히 몸을 뽑아낸 상태여서 정신의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허허, 이거 참 대단한 환영 인사로군.”

북경창권 선봉독은 한쪽 입가를 귓가에 걸치며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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