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정신을 차리면서 심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놈은 어떻게 나왔을까?”
그 말에 회의실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잡담을 나누는 사람은 잡담을 나누고, 창밖을 보는 사람은 창밖을 보고, 좀 자야겠다 싶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졸음에 빠져들었다.
“하긴 그걸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군. 이왕 나와 버렸다면 말이야. 뭐, 어떻게 저떻게 지랄발광행운가득으로 나왔나 보다 하면 되지.”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심온에게 쏠렸다.
“대단합니다. 그거 아주 간단하고 좋습니다.”
“그렇죠. 어떻게 나왔겠죠.”
“그럼 지금으로선 귀혈마를 잡아야 한다는 건데, 누가 가는 것이 좋을까나?”
그러자 다시 모두는 제각기 자기 일에 빠져들었다.
심온은 길게 하품을 늘어놓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그럼 결론이 났군. 다들 수고했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 나머지는 노공이 알아서 하고.”
심온이 회의실을 나가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노공의 어깨가 흠칫했다.
노공은 몸을 돌리고는 장내를 쭉 둘러보았다. 모두가 노공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신 수염을 쓰다듬던 노공의 시선이 이연에게 임했다.
“이 장로, 요 몇 년 너무 심심하지 않았소?”
이연이 떫은 표정으로 찜찜하게 바라보며 뭐라고 변명을 하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은지 오래였다.
“우와와와아……!”
“최고의 선택입니다.”
“하하하, 그동안 얼마나 적적하셨겠어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축하 인사가 쏟아졌고, 이어 악수로 이어졌다.
“형벌당이 함께할 것이오.”
가장 크게 박수를 치고 환한 웃음을 띠고 있던 형벌당주 좌염의 안색이 순식간에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주변의 축하는 좌염에게로 다시금 쏟아졌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기 싫은 있기 마련이다. 귀혈마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시궁창의 온갖 이물질을 뒤집어쓴 쥐를 굳이 잡으러 가야 하는 마음과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
4. 공간월패
2006년 5월 12일 북경.
왕천은 창밖을 바라보길 좋아했다. 이층에 올라 창문만 열면 저만큼 천안문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왕천은 올해 일흔두 살의 나이로 골동품 수집가다. 이 일을 한 지도 어느새 사십 년을 넘어가고 있는 그는 북경 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골동품 전문가이기도 했다.
시내 외곽에 만보환물(萬寶幻物)이라는 이름으로 80평이 넘는 골동품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텔레비전에도 여러 번 출현했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처음 보는 골동품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오든 과거의 유물을 보고, 만지며,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진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왈왈, 왈왈.
정원 쪽에서 들려온 개 짖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자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차우차우는 훌륭한 혈통을 이은 명견이었다. 달빛이나 위성이 지나는 것을 보고 짖어대는 똥개가 아니었다. 이 야밤에 주인에게 경고할 만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다 문득 저만치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에 앉은 것이 보였다. 온통 검은 털로 뒤덮여 있는 탓에 등을 보이고 있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빙글 몸을 돌리자 달빛에 반사된 고양이의 푸른 눈동자가 깜박이며 빛났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었다. 고양이의 등장은 차우차우의 우렁찬 소리를 충분히 변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비록 도둑이나 강도 따위가 아니란 점이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고양이가 오랫동안 저렇게 앉아 있었다면 차우차우의 심기를 거슬렸을 법도 했다.
차우차우의 경고에도 고양이는 전혀 달아날 기색이 없자 왕천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고얀 놈일세.”
고양이가 앉은 곳은 차우차우로서는 오르기 힘든 지점이었고, 또 실은 차우차우를 묶어둔 상태라 만일 고양이가 떠날 마음이 없다면 밤새 차우차우가 짖어댈 것이라고 생각하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차우차우의 짖는 소리는 그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쏟아질 참을성없는 할망구의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긴 막대기나 좋을까, 돌멩이가 좋을까를 고민하며 막 1층 거실로 내려오던 왕천은 목젖 부위를 압박하는 싸늘한 예기에 털이 쭈뼛 서고, 삽시간에 오한이 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차우차우가 짖었던 것은 고양이 때문이 아니라 불청객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누, 누구요?”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불청객이 피식 하고 웃었다.
“용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다.”
왕천은 사내의 여유로움을 통해 그가 프로일 것이라 직감했다. 목소리만으로는 대략 삼십대 초반정도로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시간을 끌어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반항하는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고통을 주어야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인이라고 봐줄 리도 만무했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시오.”
“말이 좀 통하는군. 월패는 어디에 있나?”
“워, 월패는…….”
왕천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급소를 맞은 것처럼 당황을 금치 못했다.
월패는 초승달 모양으로 된 목걸이인데 천 년 전의 유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황궁에서 쓰이던 것이 아니고, 또한 명장의 손길로 다듬어진 것이라고 보기 힘들어 과연 대단한 가치가 있는가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열흘 전에 북경의 오대폭력조직 중 하나인 원앙파가 많은 돈을 지불하고 가져갔다는 점이었다. 멋있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과분하리만치 많은 돈을 받은 왕천은 원앙파라는 고객의 명성에 걸맞게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지금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자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겠으나 원앙파 또한 언제든지 목을 딸 수 있는 자들이 아니던가.
왕천은 말을 할 수도,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연신 식은땀만 흘려댈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대를 망설이게 하는가?”
“나, 나는… 두렵소.”
“음…….”
불청객은 침음성을 흘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천은 속으로 상대가 합리적인 인물이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말했다.
“월패를 가져간 자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오. 난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소이다. 게다가 그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월패를 구입하였으니 난 고객의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소.”
“오, 이런 겁이 나서 오줌이 질질거릴 지경인걸.”
한껏 조롱이 담긴 말에 왕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암시 정도로는 떨쳐 낼 수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밝히 드러내어 눈을 못 뜨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성싶었다.
원앙파라는 이름은 어줍잖은 애송이들에겐 정오의 태양처럼 눈부신 것일 테니까 말이다.
“좋소. 말하리다. 월패를 구입한 건 원앙파였소.”
왕천은 고개를 돌려 칼의 주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에 경악에 찬 눈동자,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정복자다운 쾌감을 선사해 주니 언제 봐도 흐뭇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얼굴이 일그러진 건 왕천이었다.
“원앙파? 흐흐, 이거 실망인걸. 잔뜩 겁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겨우 하룻강아지를 데려오면 어쩌란 말인지. 으으으, 무서워. 무서워.”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외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왕천이 힘겹게 경고했지만 돌아온 것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었다.
파악!
칼 밑동으로 가격당한 왕천은 흐느적대며 그대로 허물어졌다.
복면의 불청객의 두 눈이 웃음을 머금었다.
“원앙파라면 멀지 않아 좋군.”
* * *
밤을 맞은 북경 북쪽의 번화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휘황찬란했다.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한 주인들의 염원을 담아 네온사인은 서로 경쟁하듯 번쩍였고, 한껏 멋을 부리고 거리를 활보하는 남녀들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술집을 둘러보는 이들, 이미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들까지 각양각색의 무리들이 길거리를 수놓았다.
화연청 앞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오늘 기도를 서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의 이름은 유매덕인데 스물두 살의 나이로 원앙파에 들어온 신출내기였다. 대개 기도를 서는 일은 적어도 6개월이 지나야 하는데도 이제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지금 기도를 선다는 것에 그는 상당히 고무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꿈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중간 보스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분 매초 어설프게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오늘은 조용하군요?”
“날마다 시끄러울 순 없는 일이지 않겠냐.”
“하하, 하긴요.”
오늘은 손님도 좀 뜸한 날이었다. 항상 월요일은 그랬다. 토요일, 일요일을 벅쩍지근하게 지내고 나면 월요일은 숨을 고르느라 손님의 발길이 현저히 줄어든다. 그러다 화요일 수요일을 넘어서면서 언제 그랬냐 싶게 손님들로 가득 차는 것이다.
이런 날은 정상적인 손님보다는 일명 형님들의 쉬어가기가 있게 마련이다. 화청루에도 지금 극악인이라고 불리는 형님이 룸 하나를 잡고 술을 마시고 계신다.
지금쯤이면 질펀하게 여자들과 어울려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도 일었지만 유매덕은 곧 생각을 지우고 앞을 주시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럴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에 충실해야만 한다.
휘청거리는 사람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만치 약 열댓 명의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이 넓게 흩어져서 다가오는 것이 보인 것이다. 그들은 몸 주위로 적의를 숨기지도 않고 이편을 향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저, 저기 보이십니까?”
유매덕은 고참인 오극기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이미 오극기의 눈에도 경계의 빛이 가득 떠오른 상태였다.
“넌 어서 들어가서 형님께 보고드리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유매덕이 막 몸을 돌려 지하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퍽!
뒤통수가 강타당하는 느낌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유매덕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빠른 시간에 자신을 기절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기에 과연 그러한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꺼져 가는 의식의 마지막 끈을 붙잡으며 유매덕은 오극기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배, 배신인 거냐?’
씁쓸함이 온몸을 잠식하면서 어둠이 그를 덮쳤다.
오극기는 허물어진 유매덕의 몸을 끌어다 문 뒤쪽에 눕혀놓았다. 이때쯤 검은 가죽 재킷의 사나이들은 정문에 이르러 있었고 그들은 거침없이 지하로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지나간 뒤 오극기는 지하 계단 시작 부분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금일 휴업.
복도에는 세 명의 조직원이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대기하고 있었지만 꿈에도 누군가가 침입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였기에 보기 좋게 기습을 당해 나뒹굴기 바빴다.
침입자들 중 선봉에 선 이는 무기를 뽑아 든 것이 아닌 그저 주먹을 휘두르는 것에 불과했음에도 그의 주먹을 맞은 이들은 한 방에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건 마치 주먹 끝에 창끝을 매달아놓은 것만 같은 위력이었다.
그의 별명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지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북경창권 선봉독!
그는 조극파의 행동대장으로 이제껏 일 대 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알려졌다. 무기를 든 상태라면 여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는 어둠의 세계에선 거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선봉독의 뒤로는 그의 부하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인 7번룸으로 돌진했다.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와 절로 어깨가 들썩일 정도였다. 조극파의 선봉독과 그의 부하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달려갔다. 하지만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쪽의 풍경은 질펀한 육체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노래나 춤 따위의 한계를 넘어선 광경이었다.
문을 열어젖힌 선봉독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을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선봉독은 어쩔 수 없이 터지는 웃음을 내질렀다.
“흐흐흐, 아주 신이 났구나.”
부하들도 뒤따라 웃었다.
입구 쪽에 시커멓게 몰려 있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소파에서 두 다리를 든 채 흥분에 들떠 있던 원화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1초 동안 경직되었다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성량을 발휘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아아악~”
그것은 조용히 정리될 수 있을 상황을 과격하게 몰아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여인들에게서 몸을 일으킨 원앙파의 주먹들이 벌거벗은 채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정력을 여자들에게 쏟아 부었던 그들이었기에 그 주먹은 평소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웠다.
십여 세 남짓 되는, 고작 학교 뒷골목에서 잔돈이나 뜯어내는 양아치 녀석들도 피해낼 수 있을 만한 주먹질이었다.
술에 취하고, 벌거벗은 채 이제 겨우 여자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을 상대하는 데 북경창권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퍼퍼퍽.
퍼퍼퍼퍼퍽.
연이어 일방적인 격타음이 룸 안에 울려 퍼지고 상황은 곧 정리되었다.
어떤 거친 흔적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다섯 놈의 육체를 바라보며 북경창권 선봉독은 당연히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목젖을 보이며 외쳤다.
“야, 씨발. 방원영은 어디로 간 거야? 왜 방원영이 여기에 없는 거냐구! 누가 설명해 줄 사람 없어?”
방원영, 그는 원앙파의 두목을 말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