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어허, 이거 아직도 하나가 남은 거야? 많으니까 먹어도 먹어도 바닥이 보이질 않는구먼. 좋다. 넌 특별히 대해주마.”
악면의 마음에 싹이 돋기 시작한 희망이 좀 더 자랐다.
귀혈마는 점혈되어 우두커니 선 자세인 악면의 몸을 구부려 억지로 앉은 자세가 되게 만든 다음 그 옆에 다정스럽게 앉았다.
그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를 펼치니 첫 머리에 ‘귀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악면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런 제길, 이자가 이미 귀령비서를 손에 넣고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구나!’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처지에서 코웃음을 칠 순 없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 정겹게 이야기나 나눌까? 이건 귀령비서라는 거다. 보물은 주인을 알아보는 법이라는 말이 있잖느냐.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당연한 거지.”
“귀령비서를 얻으셨으니 대인께서는 이제 천하무적이 되실 것입니다.”
“하하하하, 역시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말과 함께 귀혈마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런데 이게 문제야.”
악면의 눈도 의문이 가득했다.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어떤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님, 그럼 이것은 가짜라는 말씀이십니까?”
악면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바닥을 기기로 마음먹었다. 할 바엔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았다.
“오호! 그래, 듣기 좋은걸.”
귀혈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미소가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웃는다 해도 그의 얼굴은 더욱 흉악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좋아. 마음에 든다. 어쩌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뭘 좀 먹으면서 할까?”
“주인님이 배고프시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뜻 깊은 날에 수고를 끼칠 순 없지. 첫날부터 부려먹었다고 하면 아마 세상 사람들이 날 뭐라고 부르겠어. 저 구두쇠 깍쟁이 같은 인간 좀 보라면서 손가락질하지 않겠냐구. 난 그런 시선이 정말 싫어.”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잘못을 빠르게 시인할 줄 아는 자야말로 지혜로운 자며,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자이지. 앞으로 너에 대한 기대가 크다.”
“혼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악면은 비굴하게 살아남은 것에 대해 치욕스럽다거나 분노가 치미는 따위는 눈곱만큼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의형제들이 모조리 죽어나갔지만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하면 충성스런 종이 될 것인지 머리를 돌리느라 바빴다.
“자, 그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자.”
악면이 무엇을 먹을까, 라는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그는 허벅지가 타 들어가는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아하하하하,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느냐. 쫄깃쫄깃해 보이는걸.”
악면은 자신의 허벅지 살이 귀혈마의 입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욕을 퍼부었다.
“이 미치광이야,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너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건만 고작 이렇게밖에 못한단 말이냐!”
여전히 혈도가 찍혀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악면으로서는 오로지 뚫린 입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이런이런,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날 배신하다니… 온몸과 혼을 바쳐 충성한다고 했던 말은 순 거짓말이 아니었더냐. 쯧쯧쯧. 그러니까 내가 사람을 믿지 않는 거다. 이것도 참지 못하는 못난 놈이 무슨… 흐흐흐.”
귀혈마의 말뜻은 이것이 시험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진심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악면의 운명이 종말을 고할 상황에 이른 것은 확실했다.
악면은 자신이 살아 있게 되면 이 자리에서 온몸을 뜯겨 산 고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황급히 혀를 깨물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귀혈마는 전혀 말리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악면의 혀가 반 토막이 났을 때, 슬그머니 손을 뻗어 잘려진 부분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흐음, 부드러운걸. 좀 더 없냐?”
이렇게 되자, 악면으로서는 피 범벅이 된 입을 벌려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형국이었다.
이젠 욕을 하려고 해도 혀가 절반이나 잘려 나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장에 죽지도 않으니 혀를 깨문 것은 주방에서 말랑말랑한 원숭이 혓바닥 요리를 내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면 탈이 나게 마련인 게야. 자, 지금부터라도 차분히 내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해라.”
귀혈마는 다시금 손을 뻗어 악면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일반적인 꼬집다, 의 수준을 훌쩍 넘는 것이었기에 옆구리 살이 옷자락과 함께 와락 뜯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떡을 손으로 잡아 뜯어내는 것처럼 경쾌하고 활기차 보였다.
“으으아아!”
기괴한 비명 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귀혈마는 말을 이어갔다.
“귀령비서를 손에 넣은 건 보름 전이었다. 참 이놈 저놈들이 많이도 몰렸더구나.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나가는 것처럼 귀찮은 일이었지.”
귀혈마의 말이 이어지다가 잠시 쉬기라도 하면 악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마다 살점이 속절없이 몸을 벗어나 귀혈마의 입속으로 먼길을 떠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지 뭐냐. 아무리 봐도 두루마리의 비밀을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야. 물론 나는 이제껏 살아온 날이 적지 않으니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았지.”
“으가아아.”
오물오물.
“쩝쩝… 물에도 담가보고, 횃불에 비춰보기도 하고, 만월에 반사시켜 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짜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게, 두루마리의 재질은 이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거든. 게다가 도검으로도 손상되지 않을 만큼 특수한 것이란 말씀이야.”
“으가아악!”
오물오물.
“이것은 극히 희귀한 천잠사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쇠로 된 것도 아니니 이게 가짜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느냔 말이다. 어떤 멍청이가 가짜를 이런 보물을 통해 유통시키겠냐는 거야.”
“으으으으.”
오물오물.
“고기가 상하니까 너무 인상 쓰지 말아라. 사실 너한테만 고백하지만 사람을 먹은 건 오늘이 처음이란다. 누구한테 이 비밀을 흘리기라도 하면 그땐 넌 반드시 죽는다, 알겠지?”
귀혈마는 마치 살려주기라도 할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의 손은 악면의 살점에 이르러 있었다.
“한 이십 일 전이었나… 그때 한 놈을 만났다. 난 잠깐 동안 심심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제대로 답을 한다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걸었지. 이렇게 물었다. 나보다 더 흉악한 인간이 있을 것 같으냐? 그 녀석이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강남오흉이라는 이름을 대는 거야. 그래서 난 다시 어떤 점이 특별하느냐 물었다. 녀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어, ‘그들은 사람을 삶아 먹습니다’라는 거야. 난 그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더군. 하지만 웃기지 않냐? 나같이 흉악한 자의 말을 믿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니 말이다. 으하하하하!”
“으으가가…….”
오물오물.
몸의 살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악면은 자신이 지금 지옥의 끝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오늘의 이 고통을 자초한 것은 자신들의 그동안의 삶에 대한 보응이 아니었던가.
인과응보의 거대한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악행의 갑절에 해당하는 고통을 받게 되었으니 절망의 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음, 다시 귀령비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지. 아무리 해도 답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나는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내공을 주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어이없게도 글자들이 나타나더구나. 으하하하하! 그동안 마음 고생했던 것들을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히지도 않더란 말씀이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글자들이 흐릿하여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더란 거야. 이래선 곤란한 일이었지.”
“으각…….”
오물오물. 쩝쩝.
“내력이 더 필요했던 게야. 그래서 난 피를 빨아 마시기 좋은 놈을 찾으러 다녔다. 그중에서도 강남오흉이라는 놈들을 만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 얼마나 흉악스런 놈들인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다른 놈들보다 그놈들의 피를 빤다면 나의 내력은 더욱 강하여질 것이고 흉악함도 더욱 커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으하하하하, 그리고 이제 때가 된 것이 아니더냐. 나의 충성된 종이여, 주인의 신묘함을 목도하라!”
귀혈마는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펼쳐 잡고 귀혈마공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그의 눈이 붉어지고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곤두섰다.
그의 몸 주변이 혈광에 물드는 순간 두루마리에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지랑이가 맺히는 듯하면서 하나둘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흑백이 명백히 드러나는 글자들이었다.
귀혈마의 눈동자에 희열이 넘쳐 났다.
“드디어 온 우주의 힘에, 신세계의 주인이 되는구나. 으하하하하!”
귀혈마는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악면의 머리를 마구 두들겼다.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악면의 머리는 수박이 깨져 나가듯 으깨지고 바스러져 버렸다.
결국에는 형체조차 없이 악면의 머리와 상체가 사라져 버리자, 웃기를 마친 귀혈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뭐야, 내 옆에 있던 녀석은 어디로 간 거야?”
그러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아무렴 어때. 귀령비서가 내게 있는걸.”
* * *
강남오흉이 귀혈마를 만나 참혹한 죽음에 닿아 있을 무렵, 후흑문에서는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니, 진짜 귀령비서라는 것이 있긴 있는 거야?”
회의실 상좌에 앉은 심온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얼마 전 소오태산 부근에서 영기가 흘러나온 일이 있었고, 그 뒤로 귀령비서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강호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더해 귀혈마가 나타났다는 소식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장로 이연이 물음에 답했다.
“사실 귀령비사의 존재 유무는 현재로선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귀혈마인 게지요.”
그의 말뜻은 자못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정작 장로 이연은 아까부터 줄곧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회의에 걸맞지 않는 산만함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향해 나무라지도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 장로 이연이야말로 가장 차분한 자세라고 할 정도로 회의실에 모인 작자들은 각양각색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로 노공은 창 쪽에 서서 바깥 구경을 하고 있었고, 재화당주 엄장은 옆 자리의 형벌당주 좌염과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방종당주 담유설은 방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쪽 팔을 베고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기도, 탁자 아래에 뭘 떨어뜨렸는지 찾고 있는 사람 등,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뜻밖의 인물이라면 후흑문주 심온이었다. 그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가장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자리에 앉아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귀혈마 그놈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봐.”
한참 좌염과 함께 속닥거리고 있던 재화당주 엄장이 떠들던 입술을 잠시 쉬게 하고 그 앞에 놓인 커다란 책을 뒤적였다. 후흑문의 모든 일 처리에 대한 사후 보고서인 후흑사적(厚黑事跡)으로 의뢰의 결과와 강호의 대소사를 거의 빠짐없이 년도에 따라 기록해 놓은 책이었다.
“아, 여기 찾았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후흑사적에 남아 있는 귀혈마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귀혈마의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나이는 약 오십칠 세로 귀혈마공과 고루마공이라는 사악한 무공을 익혔으며, 귀혈마공의 특징은 산 자의 피로 힘을 보충하는 터라 많은 이들이 그의 손에 의해 황천길을 떠나야 했다. 이에 문주님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귀혈마를 추적, 멸하고자 하셨으니 귀혈마의 목숨은 한낱 봄볕 아래 얼음마냥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하하, 우리 문주님 참 대단도 하시지.
거기까지 읽어가던 재화당주 엄장은 읽으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고, 주위에서도 연신 피식거리는 통에 잠시 읽기가 중단되었다가 한참 만에야 이어졌다.
―귀혈마는 문주님의 추격을 받자,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으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므로 오로지 두 다리를 의지해 달아나는 길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문주님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한껏 여유를 부리며 목을 죄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뜻밖에 귀혈마란 녀석이 건곤무환진에 몸을 던진 것이다. 설마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기에 그저 ‘허허’거릴 수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천오백 년 전의 신기막측한 인물인 기묘진은 건곤무환진을 남겨놓고 세상을 등지게 되었는바, 그곳은 들어가기는 난해하였지만 나오는 것은 난해를 넘어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귀혈마는 혹시 모를 절체절명의 순간이 이르게 되면 건곤무환진에 몸을 던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망설임없이 몸을 던졌고, 문주님은 닭 쫓던 개마냥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하셨다고 한다. 스스로 무기한 감옥행을 택한 것인데다 그곳에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문주님은 그 앞에서 이렇게 뇌까렸다고 말씀하셨다.
‘평생 죽을 때까지 네 피나 빨아 먹고 살아라, 이 등신아! 우하하하하!’
엄장의 읽기가 우하하하, 로 끝이 나자 회의실 안은 폭소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