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은거? 지나던 개가 웃을 일이군. 그는 필시 죽었든지 최소 전신 장애를 당해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네. 두 다리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돌아다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걸.”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 인간이 전신 장애를 당했다고 해도 누워 있을 사람이던가? 차라리 자살을 택할 인간이니 그는 필시 죽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할 것이네.”
강남오흉은 강호의 소문을 떠올리며 애써 눈앞의 괴인을 귀혈마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으나 또 다른 기억을 생각해 내고는 결국 눈앞에 선 자가 귀혈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귀혈마의 용모는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에 두 눈 주위는 검고, 함몰된 광대뼈로 인해 유달리 핼쑥해 보이는 모습, 거기에 양손은 뼈만 남아 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가 익힌 두 가지 무공 때문으로, 귀혈마공과 고루마공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남오흉은 오 일 전 산길을 걷던 중 장작을 구하러 온 노인이 기분 나쁘게 생겼다는 이유로 목을 돌려 버렸다.
실제 노인의 얼굴은 온화하여 절로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얼굴이었지만 그들은 온화한 얼굴만 보면 목을 돌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곤 했기에 노인의 생은 그날로 마감을 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틀 전에는 천지쌍흉(天地雙凶)을 저승으로 보내주었다. 물론 곱게 가라고 인사 따윈 건네지 않았다. 대신 좀 더 다정한 방법으로 천지쌍흉을 위로했다. 마치 출출하던 차였기에 인가에 내려가 다리살을 삶아 뜯어 먹은 것이다.
천지쌍흉이 강남오흉을 만난 것은 지극한 불행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강남오흉이 천지쌍흉을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그 이유가 아주 가관이었다.
<‘흉’ 자를 같이 쓰는 것이 기분 나쁘다.>
그러던 차에 떡하니 마주치게 되었으니 천지쌍흉에 대한 대접이 좋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강호의 풍문에는 흉악하기로 천지쌍흉도 그 누구 못지않다는 말이 돌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크게 모자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다시 귀혈마와 강남오흉을 비교해 보자면 강남오흉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귀혈마의 무서움은 가공할 무위에 이어 상대를 죽이는 수법이 형용키 어려울 정도로 공포스럽다는 점이었다.
그는 일단 상대를 제압한 후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시키면서 피를 빨아 마시는데, 기이한 것은 상대방은 피가 절반 이상이나 빨려도 전혀 혼절하는 일 없이 도리어 정신이 더욱 또렷해져 최후의 순간까지 낱낱이 공포의 작은 알갱이처럼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강남오흉은 공포에 질려 지금 침 삼키는 것도 잊어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강남오흉이 사람의 고기를 먹을 정도의 흉악성을 띠는 탓에 피를 빤다는 것에 크게 거부 반응은 없었지만, 정작 구경꾼의 입장이 아닌 자신들이 직접적인 대상이 된다는 것에는 결코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흉 중 대형인 군제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그는 평시 대흉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흠모에 마지않던 귀혈마님을 이처럼 뵙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겁니다. 저희 강남오흉은 미력하나마 귀혈마님의 작은 힘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나머지 네 사람은 얼굴 가득 진심을 담아내느라 애썼다.
“너희를 해치려 함이 아니니 안심하여라. 난 단지 귀령비서(鬼靈秘書)를 얻고자 할 따름이니라.”
귀혈마의 음성은 쇳조각으로 철판을 비스듬히 긁어내리는 듯하였기에 강남오흉은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그가 귀령비서를 찾는다는 말에 긴장은 극에 달했다.
근간에 강호의 이면 세계를 바쁘게 만든 희대의 보물이 바로 귀령비서였다.
신세계를 볼 수 있으며, 고금무적을 만들어줄 병기를 안겨다 준다는 것이 바로 귀령비서의 전설적인 내용이었다.
약 천오백 년 전 기묘진(奇妙眞)이라는 신비인이 남겼다는 절대 보물이었다.
“대인, 거짓없이 아뢰겠습니다. 저희가 귀령비서를 얻고자 백방으로 움직이고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저희는 귀령비서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디에 있는 줄은 아느냐?”
“파천검마의 수중에 떨어진 것으로 압니다.”
“뭐? 파천검마 따위에게?”
“맞습니다. 그는 귀령비서를 소유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저희는 힘을 다해 어르신을 도와 뜻을 이루시도록 손과 발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으하하하하하! 너희의 뜻이 참으로 가상하구나.”
귀혈마가 느닷없이 큰 웃음을 터뜨렸기에 강남오흉은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움찔한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 끝에 서 있던 오흉 중 막내 염강이 머리에 다섯 손가락을 꽂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의 주인은 귀혈마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귀혈마는 귀신같이 움직였다. 강남오흉은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한 터였으며, 방금은 막내에게 어떻게 접근하였는지도 깨닫지 못한 탓에 본신의 실력의 고작 삼분의 일 정도도 발휘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런 까닭에 귀혈마는 네 사람 사이를 산보 다니듯 움직이며 곧바로 제압하였고, 결국 혈도가 점혈된 이들은 공포에 일그러진 눈을 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라리 이왕 죽게 될 바에야 최대한 발악이라도 해보았다면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너희들이 마음에 든다. 내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줄 테니 너무 염려치 말거라.”
말과 달리 귀혈마의 함몰된 광대뼈가 움찔거리는 모습에선 자비의 그림자는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강남오흉 중 막내 염강에게 다가갔다.
염강은 거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이었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서 있었다. 머리에 손가락이 박혔던 자리에선 연신 피가 뭉클거리며 솟아나 온 얼굴이 피로 세수한 듯했다.
귀혈마는 허겁지겁 염강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핥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말끔해졌고, 그 자리에 다시 새로 피가 흘러내렸다.
“영웅은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 법이야. 자, 힘을 내. 힘을 내란 말이야!”
귀혈마는 의형제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울부짖더니 몇 군데 혈도를 찍고, 이어 염강의 명문혈에 내력을 주입했다.
자기 차례의 공포를 기다리던 네 명의 흉악한 형들은 막내에게 행해지는 엽기적인 의술에 치를 떨었다. 마음대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행이 막내의 온몸과 영혼을 휘감고 있는 것이다.
정녕 귀혈마에 비하면 자신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아왔는가 싶을 정도였다.
귀혈마 덕분에 꺼져 가던 생명의 불꽃은 잠시 살아났다.
“그래, 이렇게 힘을 내는 거야. 부디 견뎌다오. 부디~”
귀혈마는 염강의 머리에 박아 넣었던 다섯 손가락 자리 중 네 곳을 손가락으로 막고 한 곳에 입을 대고 피를 빨아댔다.
쭉쭉. 쭉쭉.
눈을 감고 들으면 영락없이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소리라고 해도 믿을 성싶은 소리가 주변에 퍼졌다.
잠시 후 염강의 얼굴은 거의 본래의 반 정도로 줄어들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고, 피부는 순식간에 칠십 넘은 노인의 그것처럼 되어버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염강의 나머지 몸도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안타깝지만 염강은 이런 변화를 느끼고 있는 듯 눈빛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더 이상 빨아도 피가 나오지 않고 끝내 염강이 생명을 놓자, 그제야 귀혈마가 머리에 대고 있던 입을 뗐다.
“뭐야, 이렇게 흉악스럽게 변해 버리다니… 아주 몹쓸 놈인걸.”
염강이 마른 장작처럼 허물어지자 귀혈마는 머리를 밟아 흙 속에 파묻어 버렸다.
“꼴도 보기 싫어.”
이어 귀혈마의 걸음은 대흉 군제에게로 향했다.
군제의 지금 심정은 오로지 죽고 싶다는 한 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죽음을 갈망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이건 그러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는 은밀히 내부의 기를 역류시키려 했다.
본래 고수들은 혈도를 점혈당했을 때 기를 운용하여 막힌 혈도에 끊임없이 부딪치게 하여 해혈하곤 한다. 그런데 지금 군제는 내부에서 기를 역류시켜 주화입마가 이루어지도록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아주 간단히 붕괴되었다.
“뭘 그리 서두르시나. 여유있게 사세나.”
귀혈마가 말과 함께 어깨를 두어 차례 두드리자 군제는 더 이상 기를 운용할 수 없게 되었고, 절망에 사로잡혔다.
군제는 이를 악물고 분노의 눈빛을 쏟아냈다.
그에 대한 응답은 이빨이었다.
귀혈마는 뒤쪽에서 군제를 와락 끌어안는 자세로 어깨에 이를 박고 피를 빨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이 혈광으로 물들고 얼마나 거칠게 빨아대는지 그렇지 않아도 함몰되어 있던 볼이 더욱 쏙 들어가 보였다.
귀혈마는 숨을 크게 들이쉬는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군제의 피를 모두 빨아냈다.
순식간에 귀혈마의 배가 산처럼 솟아올랐고, 방금까지 숨 쉬고 공포에 질려 있던 군제는 마른 장작처럼 홀쭉해져 그대로 허물어졌다.
군제는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고 말았으니 커다란 축복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세상 그 누구도 축복이라고 생각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귀혈마의 흉악스러움을 기다리고 있는 세 사나이에게는 축복처럼 보였다.
귀혈마는 가득 부푼 배를 두드리면서 둘째 요상춘에게 다가갔다. 요상춘은 이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들자 순간 발작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평생 종이 되어…….”
그는 이틀 전 사람 다리 하나를 통째로 뜯어 먹었던 것은 모두 잊어버린 듯 지금 당장 닥친 공포에 목숨을 구걸하느라 바빴다.
“꺼억!”
귀혈마는 트림으로 답했다.
역한 피 냄새가 코에 닿자 공포에 질린 세 명의 흉인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귀혈마는 요상춘의 가슴 부위의 옷을 찢어내고는 젖을 물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젓을 물듯 부드럽게 빨았지만 요상춘은 절벽 끝자락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귀혈마가 사나운 이빨을 들이밀고 젖을 뜯어내면서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요상춘도 대흉 군제와 같이 비쩍 말라 허물어졌다.
이제 귀혈마의 배는 세 쌍둥이를 임신한 여인만큼이나 부푼 상태가 되었다.
도무지 이 이상 피를 빨아 마셨다간 뱃가죽이 터져 죽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셋째인 악면은 귀혈마가 여기서 배가 부르다고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도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먹고 보는 것이다. 감당하기 어렵다면 저절로 목구멍을 타고 토하게 될 것이니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큰소리까지 쳤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귀혈마가 그런 악면의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 것인지, 우웩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뱃속에서 찰랑거리던 핏물이 식도를 타고 역행하여 목구멍을 뚫고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귀혈마는 순간적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너무 급작스러웠던 터라 입 가장자리로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귀혈마는 코를 손으로 쥐어 막고는 숨을 들이쉬는 흉내를 내면서 입으로 처밀고 오른 핏물을 그대로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삼켰다.
그 모양이 어찌나 실감나는지 죽음 대기 상태인 악면과 추암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군침이 돌아서가 아니라 귀혈마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 절로 마른침을 삼킨 것이다.
“흐흐흐.”
귀혈마는 스스로 웃긴지 순진한 웃음소리를 냈다. 입 주위로 피 범벅이 되고 배가 산처럼 불어 있는 상태에서의 웃음이라 말로 형용키 어려운 귀기스러움이 풍겨났다.
“잠시 간식이나 먹으면서 쉬어야겠다.”
‘간식?’
추암이 의문 부호를 가득 떠올렸을 때는 이미 그의 눈알 하나가 원래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으아아아악~”
길게 꼬리를 물고 안구의 핏줄과 신경체가 이어 나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귀혈마는 입에 쏙 집어넣었다.
오드득.
비명을 지르던 중에 추암은 눈알이 으깨지는 소리를 멀쩡한 귀로 듣게 되자, 마지막 정신 상태를 보존하고 있던 벽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러던가 말던가 귀혈마는 남은 쪽 안구도 뽑아내고는 한입 깨물었다가 다시 꺼내 추암의 입 속에 집어넣어 주었다. 눈에 박혀 있어야 할 자신의 눈알이 입으로 들어오자 추암은 온몸을 덜덜덜 떨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 스스로 자신의 눈알을 자신이 씹게 될 줄 생각이나 했던가.
“맛있어. 꼭꼭 씹으면 진한 맛이 나거든. 그게 일품이지.”
이제 추암의 상태는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기에 귀혈마는 서둘러 추암의 빠진 눈에 입술을 박고 피를 빨아 마셨다.
추암의 몸이 허물어지면서 귀혈마의 배는 곧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는 그 자리에서 힘겹게 가부좌를 틀었다.
가만히 운기행공에 힘을 기울이던 그가 한순간 고개를 하늘로 들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혈무(血霧)가 그의 입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머리 위로 원반 형태로 떠올랐다.
혈무가 붉게 변할수록 불룩 튀어나왔던 배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혈무는 다시 그의 코로 빨려 들어갔다.
번쩍!
그가 눈을 떴을 때, 붉은 광채가 눈동자에 한동안 맺히다 사라졌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마지막 남은 악면은 두려움 중에도 희망의 그림자를 보았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평소 귀혈마에 대한 소문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의 솔직한 소감은 귀혈마가 어느 정도는 자비롭다, 였다.
서서히 피를 빨아 마시면서 오래도록 죽음의 공포를 선사한다는 말과 달리 너무 간단히 정리해 주었으니 오늘 이날은 뭔가 예외성이 적용되고 있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게다가 방금 전 운기행공을 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이미 공력을 운용하기에 충분한 피를 복용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