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02화 (102/125)

# 102

“계십니까?”

막사종은 위웅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밤이 되길 기다려 몰래 숨어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떳떳이 나서는 것이 그나마 보여줄 수 있는 작은 배려라고 생각했다.

“뉘시오?”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방문을 열고 절뚝거리면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위웅이 틀림없었다. 호남형의 얼굴에 입술 아래의 붉은 반점.

‘뭐야, 다리까지 망가진 거냐.’

그렇지 않아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막사종으로서는 한탄을 하며 이마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위웅이라는 분을 찾아왔습니다.”

“본인이 바로 위웅이오만.”

“제대로 찾아왔군요.”

막사종은 지금 손을 쓸 것인지 아니면 더 기다릴 것인지 갈등했다. 또한 동생이 형을 죽이려 한다는 이 기막힌 사연을 들려주고 죽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때 위웅이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만 혹시 나를 죽이려고 오신 겁니까?”

“하하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단지 동생 분이 안부를 걱정하여 어찌 살고 계신지 알아보고 오라는 분부를 받았을 뿐이랍니다.”

막사종의 연기는 완벽했다. 뛰어난 살수일수록 살수의 기질을 완벽히 숨기고 생활 속에서 살행을 펼치는 것이기에 이 정도의 순발력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굳이 숨기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이미 살아갈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니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바쁘지 않다면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허허, 무슨 말씀이신지… 오해를 단단히 하고 계시는군요.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요.”

막사종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기에 위웅은 단지 삶에 달관한 사람처럼 보일 뿐인데 단지 한 번 대면한 것만으로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이한 자로다.’

하지만 이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생의 간악함을 그라고 느끼지 못했겠는가. 어쩌면 산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동생 몰래 숨어 지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죽어드리겠다는 약속은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서 걸으며 위웅은 태연히 말했다. 과연 세상에 자신의 목숨을 놓고 이렇게 초탈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막사종은 속으로 생각하길, 이런 사람이 무공을 익힌다면 그 경지가 하늘에 닿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생각에 잠긴 탓에 대답하는 것을 잊은 막사종은 앞에서 걷던 위웅이 갑자기 몸을 돌리자 일순 흠칫했다.

“정말이구나. 이 녀석, 날 죽이러 온 거야. 하하하하… 웃겨 죽겠네.”

방금 전까지 죽음도 초월한 모습을 보이던 것과는 전혀 상반된 경박스러움이 위웅을 뒤덮었다. 막사종은 기이하게 여겼지만 크게 경각심을 갖진 않았다. 단지 막상 죽으려고 하니 목숨이 아까워진 것이라 생각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고통없이 보내주겠소.”

“하하하하, 상당히 예의 바른 녀석이구나.”

말을 하면서 위웅은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뭐지?”

막사종이 놀란 것은 위웅이 전혀 절룩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움츠린 어깨가 활짝 펴지고 얼굴엔 여유가 가득하며, 몸에서는 정체불명의 기세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쌍한 놈… 넌 죽어줘야겠다. 내가 고작 동생이 보낸 자객 따위에게 죽을 줄 알았단 말이냐? 하하하하! 멍청한 녀석.”

막사종은 위웅의 불타오르는 눈을 보며 이미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암살을 하려고 해도 쉽지 않을 터인데 이렇듯 밝은 태양 아래 마주 선 채로는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하, 함정이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뒤로 주춤거리면서 물러설 때 또다시 변화가 찾아왔다.

위웅이 갑자기 기세를 확 거둬들이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다시 절룩거리면서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쿨럭, 쿨럭, 놀라셨다면 미안하외다. 자, 들어갑시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내 장난이 심하였소. 아까 죽어드리겠다는 말은 내 반드시 지킬 터이니 염려 마오. 어서 들어오시오.”

‘뭐, 뭐냐?’

막사종은 다시금 돌변한 모습에 땀을 삐질거렸다.

“어서 따라오시오.”

“위웅, 그대의 정체는 무엇이오?”

위웅은 목을 한껏 움츠리고 힘없이 말했다.

“내 정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방금 전 본 이런 모습 때문에 그러는 거요?”

그러면서 위웅은 다시금 기골이 장대하고 내력이 용솟음치며 정기로 빛나는 눈을 번쩍였다.

“이거 맞지요?”

그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신색으로 돌아와 몸을 움츠렸다.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유분수지. 이 무슨 해괴한 짓이오!”

“너무 개의치 말고 차나 한잔합시다. 어서 따라와요.”

“싫소.”

“너무 빼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지요. 확 패버리기 전에 들어와요.”

막사종은 이번 살행은 여기에서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급살수가 탐이 난다 해도 이런 미치광이를 죽이는 일만은 삼가고 싶었다. 아니 미치광이에서 맞아 죽을 것 같았다.

그가 막 엉덩이를 빼려 할 때,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오로지 위웅 혼자일 것으로 생각했던 방에서 한 사내가 튀어나오더니 가히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가슴을 훑어버린 것이다.

막사종은 뜨끔한 통증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위웅이 사내를 향해 삿대질을 하자, 사내도 지지 않고 맞섰다.

“담 어른이야말로 언제까지 장난할 생각이셨습니까? 제가 나오지 않았다면 오늘 하루종일 오락가락했을 것이 아닙니까?”

위웅은 그 말에 배시시 웃었다. 웃음을 띤 얼굴이 서서히 변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는 칠대기왕 중 한 명인 변왕 담천변이었다. 딸인 담유설의 부탁으로 청살문에 잠입하기로 약조하였고, 청살문의 살수를 유인하여 그로 변장하려는 것이었다.

잠입을 위해선 얼굴만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후흑문에서는 환사를 통해 술법으로 살수의 모든 것을 알아내게 하고, 청살문의 내부 구조나 상황 등을 캐내어 변왕에게 전해주려고 환사를 대기시켜 놓은 것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부르러 나간 변왕이 단숨에 제압하여 방으로 데리고 오면 환사가 그때부터 술법을 펼치는 것이었는데 방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뜰에서 오락가락하며 장난질만 치고 있으니 열불이 난 환사가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것이었다.

막사종으로서는 이미 황당한 상황에 주눅이 든 상태인데다 환사의 신법이 워낙 신묘하기 이를 데 없어 환사의 손이 그의 가슴을 훑어 내릴 때에서야 자신이 제압당하는 것을 깨달았을 따름이었다. 또한 막사종이 건네받은 운화장과 위웅, 위청 형제의 이야기는 모두 꾸며낸 것들임은 당연했다.

“자, 그럼 한번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보세.”

잠입은 간단히 이루어졌다.

이미 막사종의 모든 것을 숙지하였기에 변왕은 막사종보다 더 막사종에 가깝게 행동했다.

청살문의 본거지에 안전히 스며들어 삼 일 동안 여러 곳의 동태를 살폈다.

가장 먼저는 자운과 그의 아버지를 관찰하였고, 문주의 처소와 청살문의 조직과 체계를 면밀히 탐구했다.

그리고는 내실로 들어온 전담시녀를 혼절시킨 후 완벽하게 그녀가 되었다.

청살문에서는 이급살수부터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전담 시녀를 붙여주었다. 일급살수나 특급살수가 되면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우를 받게 된다. 사실 이급살수 정도만 되어도 그다지 불편이 없었는데, 그에반해 이급 아래 살수들의 처우는 열악한 편에 속했다.

변왕이 시녀로 변한 것은 주방을 드나들기 위함이었으며, 그곳에서 청살문주의 식사를 책임지는 전담 숙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나기 전 청살문주의 전담숙수에게 접근한 변왕은 그를 제압하였다. 음식 솜씨는 뛰어날지 몰라도 무공은 형편없었기에 전담숙수로 역용하는 일은 내리막길을 걷는 것보다 쉬웠다.

그때까지 청살문의 어느 누구도 변왕이 헤집고 다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청살문주 함초극은 식사를 절반도 하지 못하고는 상을 뒤집어엎었다.

이 점심 식사는 정녕 감정을 조절함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그라도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을 만큼 역겨운 맛으로 가득하였던 것이다.

“오 숙수를 잡아와라! 놈을 잡아와. 어서~”

이십 년이 넘게 전담숙수로 일한 오각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건 실수라고 할 수 없었다. 모욕이며, 반항이었다. 한번 엿이나 먹어봐라는 것으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놈을 갈가리 찢어 까마귀밥이 되게 해주겠다!”

광분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함초극 앞에 오각이 잡혀왔을 때 더 이상 함초극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오각의 얼굴은 대체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양쪽 눈이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고, 머리카락도 한쪽은 아예 잡아 뽑혀 희멀겋게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원래는 옷이 다 벗겨진 채였는지 커다란 천으로 벌거벗은 몸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데려오면서 수하들이 흉하지 않도록 덮은 것이리라. 오각은 이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주방 창고에 이렇듯 흉한 몰골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수하들의 보고에 함초극은 당장 눈에서 불이 나올 정도로 분노했다. 청살문 역사상 이런 하극상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문주의 전담숙수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은 명백히 문주를 이렇게 박살내고 말겠다는 것과 같았다.

“도대체 누구의 짓이냐?”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먼저 여기를 봐주십시오.”

수하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오 숙수를 감쌌던 천을 벗겨내자, 가슴께로부터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장문의 글이 적혀 있었다. 덕분에 오 숙수의 물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쳐다보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심지어 그곳에도 글자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릴 수도 없었다.

억지로 노를 참으며 함초극은 읽어 내려갔다.

―함초극은 보아라.

며칠간 잘 지내다 간다. 사람을 죽이느라 바쁜 네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어려운 걸음을 하게 되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일단 너는 중독되었다. 지금 바로 운기해 보면 거골혈과 기문혈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독은 부화뇌신단이라 한다.

부화뇌신단에서 함초극은 어쩔 수 없이 옅은 신음 소리를 냈다. 거골혈과 기문혈의 통증을 읽으며 설마 했는데 곧바로 부화뇌신단이 나오니 그 충격이 적지 않았다.

삼대절독 중 하나인 부화뇌신단은 만들기 어려운 만큼 아무나 해독할 수 있는 독이 아니었다. 특히 특정 기한이 차면 독이 발작하기에 시한 장치로의 협박에 유용했다. 상대가 부화뇌신단을 사용했다는 것은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음을 의미했다.

―한 달이 되기 전 해독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쯤 너는 내가 누구이며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죽는 날까지 의문을 품고 알아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대신 무엇 때문에 부화뇌신단까지 쓰게 된 것인지는 알려주도록 하마. 석 달 전, 낙양의 장소추를 살해한 자운이라는 아이와 그의 아비를 보내라. 장소추의 죽음에 대해 그들에게 내 직접 따져 물을 것이다. 터럭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고 건네도록 하여라. 그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어 하는 이가 그렇게 인도되길 원하고 있다. 내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 부자를 살펴보았으나 직접 도살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몸뚱이에 적힌 이 글을 읽고 있을 때라면 이미 나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로부터 이십 일 후 정오, 낙양의 목단정 궁도애로 데리고 오라. 허튼짓을 한다면 그땐 청살문 자체의 존립이 어려워질 것임을 명심하라.

함초극의 얼굴엔 이미 검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놈은 청살문 내부에 잠입하여 수일간을 보냈으며 지금은 유유히 빠져나간 뒤였다.

머릿속으로 도대체 누구일까를 짐작해 보았지만 머리만 혼란스러워질뿐이라 고개를 내저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명령만 주십시오. 당장 잡아들이겠습니다!”

염규의 음성은 충성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건 함초극의 화를 돋우었을 뿐이다.

“닥쳐라! 도대체 어떻게 놈을 잡아들이겠다는 것이냐. 내부에 잠입해 버젓이 돌아다닌 놈을 알아차리지도 못하였거늘 어디 가서 놈을 찾아? 적이 부화뇌신단을 쓴 이상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다!”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문주의 외침에 염규는 목을 움츠리고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는 두려움으로 바르르 떠는 것 같았다.

함초극은 수하가 두려워하는 모습에 만족하였다. 하지만 정작 염규의 눈이 장난기로 가득하여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지는 못했다. 그는 변왕 담천변이었던 것이다.

‘벼엉신~ 나 여기에 있어.’

***

3. 귀령비서 출현

귀혈마 앞에 선 강남오흉은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이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껏 많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핍박했던 이들이 느꼈을 공포를 고스란히 체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귀혈마라는 이름 앞에서는 이런 현상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일 다경 전만 해도 그들은 귀혈마와 마주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한 상태였다.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귀혈마는 이미 삼십 년 전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성정은 어딘가 숨어 가만히 있지 못하는지라 은거를 했다거나 폐관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귀혈마에 대해 말할 때는 주로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다.

“귀혈마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갑자기 살인에 싫증이라도 나서 은거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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