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후흑문주 심온 5
1. 회의
살인은 살인을 한 자나 살해당한 자나 혹은 지켜보는 자나 훗날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긴다.
세상엔 수많은 성격의 사람이 살아가는 만큼 살인의 이유는 다 제각각이다.
한 하늘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은 원수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갑자기 열이 받아서 죽이기도 한다.
우연히 창틀에 놓인 화분을 손질하다가 떨어뜨려서 길 가던 사람이 죽기도 한다.
돈을 훔치러 들어간 도둑이 엉겁결에 놀라 주인을 찔러 죽이기도 하고, 재산을 노리고 가까운 사람을 독살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강함을 추구하여 끝없는 비무 속에 결국 한 줌의 흙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죽여야 하는 이유와 죽어야 하는 이유는 끝도 없이 많다.
그중 어떤 이들은 죽이고 싶은데 용기가 없거나 힘이 없어 안절부절못한다. 이들은 결국 누군가 대신 살인을 해주길 바란다. 즉시 목숨에 값이 매겨지고 청부살수들이 움직인다. 아무런 감정 없이, 그 이유의 타당성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제거한다.
살수들이 두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심히 일하고 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한 후 나갔다 보람차게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마냥 살인을 하나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후흑문인들은 살수들이 짜증스러웠다.
“하여튼 살수라는 놈들 언제 한번 손을 보려고 했는데 잘됐어. 이번에 쓸어버리자.”
회의석상에서 심온은 탁자를 쿵 하고 내려치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지금은 청살문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자운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서 어떤 방법으로 빼내올 것인지에 대해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릴 때 심온이 전면전을 펼치자는 의견을 낸 것이다.
“사숙도 오시라고 하고, 사숙 친구도 오시라고 하는 거야. 거 있잖아. 외경이비 중 한 분이신 고독천자(孤獨天子) 왕면(王眠)님 말이야. 우리도 총출동하는 거야. 뭐, 작전이고 뭐고 필요있겠어. 무릎 꿇리고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고 거창하게 설교를 늘어놓는 거지.”
심온은 당장이라도 쫓아갈 기세로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회의실의 분위기는 여간 싸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소리를 지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심온은 외면을 당하고 있었다.
“이 반응은 또 뭐야? 내가 틀린 소리 했어?”
그나마 관심이라도 보인 것은 담유설이었다. 기다란 탁자의 끝 쪽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그녀는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귀찮아.”
심온이 막 폭발하려고 하자 총관 오교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문주님의 말씀이야 백 번 옳은 말씀입니다만, 후흑문으로서는 그들과 전면전을 펼쳐 굴복시키지 않아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말해 봐.”
“첫째, 살수문들을 정리한다는 것은 후흑문의 첫 번째 철칙인 ‘강호를 제패하지 않는다’를 거스르게 되는 일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후흑문은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문파라는 특징을 계승해야만 합니다.”
오교의 설명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그들의 얼굴엔 못마땅한 기색이 옅게 묻어 있었는데, 표정을 해석해 보자면 ‘문주가 그런 것도 모르냐?’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둘째는 청부살수들이 등장하는 데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득도한 사람이 아니므로 여러 감정에 휩싸이는바 여러 경로를 통해 대신 살인해 줄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와 같은 시장이 형성된 까닭에 청부 조직이 생기는 것이니 지금 당장 청부 조직을 다 뿌리 뽑는다 해도 다시금 그러한 조직이 생겨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리어 은밀히 지하로 스며들게 하여 정작 필요할 때 그들을 막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암중의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으로 봅니다.”
오교의 설명은 딱히 반박할 만한 거리가 없었기에 심온은 속은 쓰렸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화통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내가 그걸 모르고 말했을까 봐.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시험 삼아 떠들어본 게지. 총관은 뭘 그리 장황하게 설명을 하나. 하하하하! 자, 그럼 어서들 좋은 의견을 내보도록 하지.”
얼굴이 두껍고 마음이 시커먼 후흑문의 문주답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을 보고 수뇌들은 은근히 감탄하며 심온을 한 번씩 흘겨봤다.
하지만 그들 중 담유설만큼은 흘겨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랄하네.”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그때 만약 형벌당주 좌염이 의견을 내지 않았다면 심온은 북풍한설에 휩싸여 얼음 조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흠흠, 제게 기막힌 생각이 있으니 모두 잠시만 귀를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회의 때 좌염이 어떤 의견을 낸 적이 거의 드물었기에 일단 모두의 시선은 좌염을 향했다.
“제가 이번에 청살문주를 찾아가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거야?”
담유설 때문에 심사가 뒤틀려 있던 심온이었기에 말투는 다정하지 못했다.
좌염은 어깨를 한차례 으쓱해 보였다.
“제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감탄을 금치 못하실 테니 일단 한번 들어보시죠.”
심온이 몸을 의자에 기대고 두 팔을 뒷목에 대며 들을 준비를 갖추자 좌염이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파괴력에 있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일단 청살문주를 만날 생각입니다. 물론 청살문주로서는 대면하려 하지 않을 것이나 큰 재물을 약속한다면 결국은 면담할 수 있을 겁니다. 청살문주로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겠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죽이려고 나를 만나자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살인 청부가 불가능한 명단을 보여줄 겁니다. 그들의 힘으로 닿기 힘들고, 또 분란이 일 수 있는 이름들이겠지요. 아마 문주님도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심온은 우쭐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청부가 가능하다는 말이겠지요?’ 분명 그렇다는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회심의 미소를 짓고 말하는 겁니다. ‘좋소. 나는 당신에게 청부하겠소. 청살문주를 죽여주시오.’ 하하하하, 청살문주의 표정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누군가 죽이겠노라 청부할 줄은 몰랐을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을 테지요. 그는 당연히 스스로 자결할 수 없을 테니 제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하하하, 기발하지 않습니까? 벌써 녀석의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좌염은 이보다 더 완벽한 방법이 어디 있겠냐는 듯 통쾌하게 웃었으나 곧바로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문제라도…….”
재화당주 엄장이 혀를 끌끌 찼다.
“좌당주는 강호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오? 어째 그대가 살아가는 강호는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많이 다른 듯하오만.”
“그건 무슨 말이오?”
“청부 조직의 수장이 그런 말장난에 충격을 받고 뜻을 받아준다면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나 있었겠소. 그대가 순수하다고 해서 청살문주까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순수한 영혼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자는 거요.”
좌염은 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시선들이 한마디라도 한다면 곧바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만추당주가 이어 의견을 내놓았다.
“자운과 그의 아버지를 현상 수배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이어지는 그의 설명인즉, 이번에 장소추가 죽은 것을 자운의 소행으로 몰아 청살문에서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다지 신통한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미 관직에서 물러난 장소추 정도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줄을 이었지만 하나같이 다른 반론에 부딪혀 흐지부지되었고, 회의는 뚜렷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채 표류했다.
이젠 다들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해져 자운이고 뭣이고 간에 빨리 회의나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즈음,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막힌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지. 최고의 암살자라면 당연히 우리 아버지잖아. 아버지한테 부탁해 보자구.”
담유설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정녕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변왕 담천변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겠으며, 그에게 숨을 수 있는 자가 세상 누가 있겠는가.
“그거 좋군. 바로 그거야.”
“하하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청살문주 이 자식 제대로 걸린 거네.”
“자, 그럼 이거 해결된 거네.”
모두들 반색을 하는 중에 심온이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방종당주가 아버지께 부탁을 드리도록 해. 자, 회의 끝. 해산!”
언제나 그렇듯 책임이 맡겨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썰물이 빠져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
2. 침투
청살문의 이급살수인 막사종에게 이번 살수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의 나이 삼십사 세,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청살문에 입문한 그는 이십칠 세에 이급살수에 오르고 이제 막 일급살수로 도약할 시점에 서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총 마흔아홉 번의 살행에 나서 세 번만 실패하였을 뿐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동료 살수들 중 가장 앞선 여충은 이미 삼 년 전에 일급살수가 되었다. 여충은 막사종과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고, 가장 먼저 일급살수가 되었다고 해서 괜히 어깨에 힘을 주는 인간은 아니었다.
이번 살수행 직전에 여충은 막사종에게 귀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말해 주지 않을 수가 없군. 이번 살행에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네. 그렇게 되면 자네는 곧바로 일급살수로 임명될 걸세.”
막사종이 크게 기뻐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그가 살수문에 투신한 것은 처음에는 하나의 직업의 개념이었다. 살행에 성공할 시, 문에서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 적립된다. 살수로서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돈이 들지 않기에 그가 모은 돈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살수들은 돈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으며 주목표는 어찌하면 더 뛰어난 살수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터라 무공에 매진하는 시간이 거의 전부였다.
막사종도 그와 같아서 오로지 지금 그가 추구하는 바는 일급살수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청살문의 지도부에 속할 특급살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 살수행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위웅이라고 했던가.”
화음산 초입에서 막사종은 산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죽여야 할 대상에 대해 다시금 기억을 상기했다.
화음산 봉골 중턱의 가옥.
이름 위웅.
성별 남자.
나이 45세.
운화장의 장남.
무공 여부 중급 이하.
호남형 얼굴에 오른쪽 입술 아래 붉은 반점.
“돈이 참 좋긴 좋아.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 말이야.”
위웅을 죽여달라 청부한 자는 그의 동생 위청이었다.
현재 운화장은 장주인 위세경이 노환이 깊어져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태였다. 위세경이 떠나면 장남인 위웅이 가업을 잇게 되어 있는데 둘째인 위청으로선 그런 계승이 탐탁지 않은 것이다.
산을 오르며 점점 위웅의 거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막사종의 얼굴엔 불쾌하고 찝찌름한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제껏 마흔여섯 번의 살행에 성공한 그였지만 가족끼리의 상쟁으로 혈육을 죽여달라고 청부하는 일을 맡을 때면 언짢은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제길.”
특히 이번 위웅이라는 작자는 죽이고 싶지 않은 자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막대한 가산을 물려받아 장주가 될 그였지만 그는 재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으로 산에 초라한 가옥 한 채를 짓고 자연을 벗삼아 살아갈 따름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우 된 위청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형을 죽여 없애려는 것이다.
위웅이 왜 홀로 산에 거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막사종으로서는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오 년 전 아내가 중병으로 앓아오다가 끝내 세상을 뜨자 그때부터 그에게 생의 소망은 사라졌다. 부부에겐 아이가 없었다. 이미 병석에 누운 지 십삼 년이 되는 부인은 아이를 낳을 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사란 참 알 수 없어. 욕심 많은 녀석은 승승장구하고, 아내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자에겐 저승사자가 보내지니…….’
막사종은 내심 투덜거렸지만 청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겐 청부를 수락하고 포기하는 선택권이 전무했다. 오로지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끝내 위웅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다.
“후훗.”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우 된 위청이 형을 죽이려는 것이나 자신이 일급살수가 되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위청에게 그만두라고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사명을 포기하고 일급살수라는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역시 나도 별 볼일 없는 놈이란 건가.’
봉골에 접어든 지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한 채의 아담한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오로지 가옥이라곤 달랑 하나였기 때문에 혼동할 염려는 없었다.
막사종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일단 주변을 크게 돌아 면밀히 관찰했다.
가능성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호위무사나 기관진식의 여부를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는 역시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웅은 동생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도 모르는 그저 불쌍한 사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