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그러나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던 검성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장문인, 부탁 한가지 해도 되겠소?”
누구의 부탁이라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
“부탁이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이곳이 처음인 자신이 무엇을 도울 수 있을 지는 모르는 일이나 검성은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했으리라 생각했다.
“비소(秘所)에 가서 청홍검을 가져와 주시면 고맙겠소.”
“거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라고…….”
현진자는 아미장문이 경고하던 말을 떠올리고 이렇게 말했지만 이내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인지했다. 수뇌들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검성에게 금지된 곳이 어디겠느냐는 생각이 뒤늦게 든 것이다.
“하하하, 그야 나의 허락이 없을 때에 한해서지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왜 직접 가지 않고 자신에게 부탁하는지에 대해서는 물을 수 없었다. 검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아도 납득을 해야 했다. 또 한편으로는 가장 비밀스러운 곳을 들어가 보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점창을 신뢰하고,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인 것도 같아 어쩐지 뿌듯해졌다.
검성은 열쇠를 건네면서 어떻게 들어가는지와 청홍검이 위치한 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네, 그럼.”
어쩌면 이것이 일종의 시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단한 일이지만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을 처리하는지 볼 요량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조금 실망스러울 것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다.
몇 개의 석문을 지나 비소 앞에 선 현진자는 중앙 구멍에 열쇠를 넣은 후, 알려준 대로 열쇠를 중심으로 팔방을 빠르게 점혈하듯 손으로 찍었다.
다시 열쇠를 뽑자 굳건히 닫힌 석문이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려졌다. 석문은 금강석으로 이루어진데다 두께는 거의 사람 허리의 세 배 정도는 될 정도여서 깨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기이한 것은 문밖의 빛이 비소의 안쪽으로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건 마치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불투명의 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현진자는 성큼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검성의 설명에 의하자면 석문이 다시금 완전히 내려오게 되는 순간 비소 안이 밝아질 것이라고 했다.
석문이 느린 속도로 내려오는 동안 어쩐지 현진자는 이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후후… 나도 참.’
나가는 방법은 들어올 때와 동일했다. 그리고 이곳은 비소이다. 정도 무림의 가장 중요한 것들이 놓여 있을 이곳에 갇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도 손해날 일은 없었다.
잠시 웃음을 머금던 현진자는 일파의 장문인으로서의 위치를 떠올리고 망상을 떨쳐냈다.
이윽고 석문이 완전히 내려왔고 그와 동시에 야명주가 빛을 뿜어냈다. 내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현진자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고 말았다.
석실은 꽤 넓었는데 저쪽 맞은편에 약 이십여 명에 이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잔혹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었다. 아니, 애초에 비소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어, 어떻게… 당신들이…….”
그의 머리는 복잡하게 헝클어져 당장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타난 무리들은 흑도의 초절정고수들로 그들 중 몇몇은 얼굴을 본 적이 있었으니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로군. 하지만 지금 궁금해하고 있을 상황은 아닐 텐데.”
얼굴 전체가 검푸른 빛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안귀검(靑顔鬼劍)이라 불리는 청살문의 문주임이 틀림없었다. 청살마공은 십성에 이르게 되면 온 얼굴이 푸른색을 띠는데 점점 경지가 지날수록 짙어졌다가 극성에 이르게 되면 환골탈태한 사람마냥 어린아이의 피부로 돌아온다고 했다. 지금 그의 상태로 보아 거의 극성에 가까워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 좌우로 혈교의 교주와 악인문의 문주, 괴묘회의 회주 등 그 면면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현진자는 황급히 돌아서 열쇠를 꽂고 팔방을 점했다.
어줍잖게 시간을 끌어보겠노라고 버티는 것은 무의미했다. 저들 중 한 명도 감당하기 벅찬 것이 사실일진대 스무 명에 이르는 이들 앞에서 몇 초나 견뎌낼 수 있겠는가.
드르르르르.
석문은 촉박한 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린 속도로 올라갔다.
“고맙구나. 친절하게 길까지 안내해 주고.”
그 말에 현진자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마땅히 이들이 비소 안으로 들어왔다면 이곳을 여는 방법도 알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을 터인데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석문이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자, 현진자는 땅을 구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비소를 빠져나가 즉시 몸을 일으켜 달려갔다. 그가 힐끗 뒤를 바라보니 어느새 흑도의 괴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오늘 이곳이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크하하하하…….”
현진자는 유운신법(流雲身法)을 발휘하여 달려가면서 소리 높여 위험을 알렸다.
“적들입니다! 비소를 통해 적들이 침투하였습니다!”
현재 모두들 모여 있는 곳은 접객실이었다.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그들이 과연 이 외침을 제대로 인지할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할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정녕 오늘은 정도 무림의 몰락의 날이 되고 말 일이었다.
순간 머리 위쪽으로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지나가서는 왼쪽 벽면에 꽂혔다. 달려가는 중에 보니 흑륜이었다. 괴묘회주가 독문병기로 사용한다는 필살흑륜이 틀림없었다. 거의 절반 넘게 박힌 터라 만약 조금만 낮게 날아왔다면 지금쯤 머리가 수평으로 나누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크크, 운이 좋구나. 하지만 그것도 한 번뿐이다.”
현진자는 신법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접객실 쪽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그만 등뒤가 뜨끔하면서 온몸이 굳어져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이때는 파공성과 고함이 뒤섞여 퍼져 나간 뒤였기에 접객실에 있던 뭇 정도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쉬운 건 그들의 움직임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도 제압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비밀회합장소로 적의 수뇌가 침투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였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네놈들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이냐?”
“하늘이 너희를 죽이라고 우리를 보낸 것이 아니겠느냐?”
검성의 말에 답하는 흑사문의 문주 청안귀검의 목소리엔 조롱이 가득했다.
정도 수뇌들의 얼굴로 분노가 떠올랐다.
“점창의 장문인을 이쪽으로 보내라.”
“크크크,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추악한 놈들.”
“역사는 승리자의 몫! 추악함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지. 점창의 애송이를 살리고 싶거든 모두 무릎을 꿇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놈의 팔과 다리를 이 자리에서 자르겠다.”
현진자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려 나가고 몸통만 남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 공포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는 두려움을 떨쳐 내고 외쳤다.
“저는 개의치 마시고 적들을 물리치십시오. 결코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피를 토하듯 외치는 말에 잠시 장내가 숙연해졌다.
검성이 현진자의 눈을 응시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하겠네.”
그는 이어 청안귀검에게 말했다.
“어서 현진자의 팔과 다리를 잘라라.”
순간 현진자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말은 다부지게 했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말은 어느 정도 각오가 담긴 것이리라 생각했건만 자르라니, 실망과 함께 이제 끝이라는 절망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검성은 흔들림없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좋다. 너희들의 침투는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겨룬들 서로의 피해가 막중할 터이니 점창 장문인 현진자를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라.”
현진자는 죽을 때가 되자 자신의 귀가 벌써부터 이상해져서 환청을 듣는 것인가 싶었다.
“거, 검성 어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대의 희생은 우리 모두 기억할 것일세. 고마울 따름이네.”
“어찌 적들을 앞에 두고 그냥 물러선다는 것입니까? 아미 장문, 무슨 말씀이라도 해보십시오?”
방흑신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싸늘히 일갈했다.
“하나만 죽으면 됐지.”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흑사문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그것도 나쁘진 않군. 아무 희생 없이 점창 장문의 목숨을 거두다니. 좋다. 그렇게 하겠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현진자는 자신만이 중간에 끼어 개죽음을 당하는 상황으로 치닫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야, 이 나쁜 새끼들아 너희들이 그러고도 정도 무림을 이끄는 작자들이란 말이냐. 이 더러운 새끼들. 죽어라. 썅, 이 썩을 놈들아…….”
현진자의 욕설에 검성을 비롯한 정도 무림의 지도자들이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부들거렸다.
여전히 욕을 하는 중에 그들의 얼굴을 보며 현진자는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쪽에 서 있던 화산 장문인 노유평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더니 나중에는 박장대소로 이어졌다.
“푸하하하하… 더 이상 못 참겠다.”
“우하하하하… 하도 참았더니 입술에서 피나는거 봐.”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배야……. 크크크크크.”
현진자는 적들을 눈앞에 두고 집단으로 실성을 했나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흑도의 무리들도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멍해지고 말았다.
그는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라 그 자리에 선 채로 도무지 이 대책없는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바닥을 구르다시피 웃던 검성이 그제야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미안하게 됐네. 장난이 과했다면 용서하게나. 어이, 이봐 어서 혈도 좀 풀어주라구.”
‘장난? 혈도를 풀어줘? 누구한테?’
“알았네, 알았어.”
믿을 수 없게도 대답을 한 것은 흑사문주였다.
혈도가 풀리고 나서 혼이 나가 있는 현진자가 바라본 건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광경들이었다.
정도 인사들과 흑도 무리들이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광경이었으니 혹시 자신이 이미 죽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미장문은 지난 해 삼 일 밤낮을 싸웠다고 했던 혈교의 교주 호면마군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하고 있었다.
“어때, 많이 놀랐나?”
무당파의 장문인 범현자였다. 그는 자신의 사부님과 비슷한 연배였고, 내년이면 장문인 직을 물려준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였다.
“저는 아직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회합에 처음 온 이들에 대한 신고식인 셈이지. 여기 있는 대다수가 한 번씩 겪었던 일이네.”
“신고식이라니요?”
“이 모임이야말로 강호가 평안한 이유라네.”
그때 흑사문주의 큰 소리가 들렸다.
“자, 오늘 수고한 점창 장문인께 박수를 보냅시다.”
그 말에 모두들 진심 어린 박수갈채를 보냈다.
“수고가 많았네.”
“아주 잘 해주었어.”
“신참이 들어와야 역시 재미가 있다니까.”
“하하하, 고생했네. 고생했어.”
현진자는 대충 감이 잡히는 것 같았지만 아직까지 현실감이 없어 눈만 깜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 그럼 모두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도록 합시다.”
접객실로 인도된 후, 비로소 현진자는 모든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 기간 강호가 평안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이처럼 정도와 흑도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화합하면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암암리에 손을 써서 희생없이 원만히 일이 처리되도록 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정도수뇌회의가 열리는 날은 마찬가지로 흑도수뇌회의도 열리는 날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수하들 중 격렬한 성정으로 전쟁을 원하는 이들을 무마시키지 위해서 큰 행사를 마련하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초절정 고수들간의 대결이었다.
즉, 오 년 전 검성과 청살문주가 칠주야를 싸운 것은 유명한 일이었는데 실상은 진짜로 싸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철저히 계획하여 이루어낸 것이란 점이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검광을 내뿜어 멀리서 보노라면 숨이 막힐 듯한 모습이지만 사실은 겉으로 보이기에만 치중하는 대결인 셈이었다.
정도와 흑도는 매해마다 이런 내용의 대결을 주선하여, 그 수하들로부터 지도자가 직접 나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의 살욕을 충족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든 계획이 바로 이 모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니 현진자는 허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다.
“올해는 점창 장문인이 나서보는 것이 어떨까? 그쪽은 괴묘회주 차례던가?”
검성의 말에 괴묘회주가 실실 웃었다.
“그럼 계획 한번 짜볼까?”
***
강호가 평안한 이유 2
학운장의 장주 도천엽은 문득 강호가 평안한지 궁금했다.
“잠깐 나갔다 오리다.”
부인은 행선지가 궁금하여 물었다.
“어디를 가시는지요?”
“강호가 평안한지 알아볼까 하오.”
“다녀오십시오.”
그의 걸음은 곧바로 강호로 향했다.
한 시진 후 돌아온 그에게 부인이 물었다.
“어떻던가요?”
“강호 그 친구 잘 지내더군. 아주 평안해 보였어.”
“언제 함께 저녁식사라도 하셔야지요?”
“암, 그래야지.”
도천엽은 친구 진강호가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와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다. 강호는 오늘도 평안했다.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