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자칫 조금이라도 힘이 더해진다면 검기가 몸을 파고들게 되고, 또한 힘이 부족하다면 혈을 제압할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자운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검을 통제하여 그들의 생명엔 아무 지장이 없도록 한 것이다.
자운은 걸음을 옮겨 장소추의 가마 앞에 이르렀다.
“장소추, 목을 늘어뜨려라.”
하지만 검을 쳐든 자운은 장소추를 본 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장소추!
그의 얼굴에서는 죽음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해골에 다를 바 없어 그가 중병에 시달렸음을 알려왔고, 힘없이 떨궈진 고개는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목단정의 석양과 함께 맞이한 것이다.
이루 형용하기 힘든 허탈함에 빠져 자운은 멍하니 장소추를 바라보다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늦었다. 늦었어……. 아, 하늘이, 하늘이 나보다 빨랐구나.”
장소추, 그의 죽음은 높은 관직에 오른 순간 얻은 병환 때문이었다. 자운은 알 길이 없었으나 장소추는 사실 병환으로 인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고통을 당했다.
그는 요양이란 이름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였으나 사실 그건 요양이 아닌 고통의 계속된 연장일 따름이었다. 오장육부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통증과 심장이 뻐근해지면서 숨을 쉴 수 없는 시간이 매일 매일 이어졌다. 그래도 죽음은 저만치 물러선 채 팔짱을 끼고 바라볼 뿐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러길 십이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그는 목단정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비록 그의 죽음의 날이 아름답게 보였으나 이 죽음이 있기까지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자운의 눈에서 비통에 찬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운은 검을 들어 거칠게 바닥에 꽂으며 부르짖었다.
“왜, 왜 그대의 죽음은 이렇게 평화로운가. 그대에게 이런 사치스런 죽음을 맞이할 자격이 있단 말이냐.”
이날은, 원수가 죽고, 복수도 죽은 날이었다.
* * *
지난날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후 자운은 해결의 벼랑에 서신을 떨어뜨렸다. 그의 눈동자로 부디 후흑문이 이 의뢰를 받아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가득 떠올랐다.
‘부디 살수의 길을 떠날 수 있기를…….’
한줄기 바람이 그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
외전
강호가 평안한 이유 1
현진자는 나이 오십이 세에 청성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그동안 장문인으로 수고한 이는 청운자의 사부 공허자로 나이가 팔십 세가 넘어가자 제자에게 청성을 맡기고 뒤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현 강호는 정도의 세력과 흑도의 세력이 누가 앞섰노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던 터라 청운자는 각오를 새롭게 하여 청성의 이름만 들어도 흑도가 벌벌 떨 정도의 힘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에 노력을 기울였다.
제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살펴주는 한편 스스로도 청성의 장문인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쉼없이 수련에 힘을 쏟았다.
그런 모습에 암자에 머물다 가끔 내려오곤 하는 사부 공허자는,
“온 세상 모든 것은 유(有)에서 생겨나고, 유(有)는 무(無)에서 생겨났으니 지나치게 가지려 하지말고, 서둘러 이루려 하지 말거라.”
라고 교훈하였으나 현진자의 대답은 당시에만 ‘예’라고 답할 뿐 정작 사부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가 스스로 수련에 매진하는 것에는 일 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 정파수뇌회에서 문파를 빛내기 위함이었다.
정파수뇌회란 말 그대로 정도 무림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한곳에 모여 흑도를 견제하기 위한 방편들을 의논하고 더불어 서로간의 친목을 다지는 모임을 말했다.
그는 이제껏 사부가 정파수뇌회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러운 시선이 되어 바라보곤 했었는데 이제 소원성취 하듯 직접 참석할 수 있게 되어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새색시의 가슴처럼 두근거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정파수뇌회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매우 비밀스러워 참석한 사람 외에는 도무지 어떤 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논의되는 지 밝혀진 바가 없었다.
구월 초하루.
현진자는 힘찬 걸음으로 청성을 나섰다.
드디어 정파수뇌회에 참석하는 첫걸음을 떼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날아온 전서의 내용에는 ‘아미파 장문인과 함께 동행하십시오’라고 적혀 있었기에 그는 아미산으로 일단 걸음을 옮겼다.
장소가 서신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혹시 노출될 염려를 막기 위함이었고, 굳이 아미파 장문인과 동행하게 된 것은 구파일방 중 청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현진자는 아미파의 장문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내일 모레면 향년 칠십 세를 바라보는 그녀는 뛰어난 무공에 비해 말을 아낄 줄 알고 겸손한 이였다. 그러나 그의 별호가 방흑천검(放黑千劍)이란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흑도의 무리에게는 단 한 올의 인정도 보이지 않는 잔혹함을 보이는 이로도 유명했다.
방흑천검과의 조우는 순조로웠고, 여정은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져 갔다.
예정일인 이십 일까지 도착하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였다.
“첫 회합인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아미 장문은 무림의 선배이면서도 이제껏 현진자에게 결코 말을 함부로 하는 일이 없었다.
비록 그녀가 이제껏 말을 한 것이 고작 열 마디가 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때마다 겸손함을 가득 실은 공대였기에 현진자는 자연스럽게 더욱 낮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말을 편히 하시라고 해도 그녀는 이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고 했던 것이다.
“여러 노선배님들을 뵐 생각을 하니 긴장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여 저의 부족함으로 다른 분들께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지금도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누구나 처음엔 그렇답니다. 하지만 모두들 정도 무림과 강호의 평안을 위해 사심을 두지 않으니 굳이 자리를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현진자는 청성에 있을 때 혼자 품었던 생각들이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아미 장문을 통해 깨달았다.
일체의 사심을 지니지 않는 정도의 기둥들의 모습 속에서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는 듯했다.
길을 함께 한 지 거의 열흘이 넘어가면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는 훨씬 더 편하게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현진자는 일 년 전쯤 있었던 혈교의 교주와 아미 장문과의 격전에 대해 물을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한낮에 불어오는 가을 바람의 상쾌함을 틈 타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혹시 정색을 하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우에 불과했다.
“벌써 그 일이 일 년이 훌쩍 지났군요. 엊그제 일 같은데 말입니다. 혈교의 교주 호면마군(虎面魔君)은 역시 소문대로 대단했었지요. 그의 얼굴은 별호처럼 호랑이 상이었는데 거기에 그의 독문무공인 호조수까지 가세할 때는 날개를 단 호랑이 같았답니다. 그를 당시 제거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이 되는군요.”
현진자는 한번도 혈교의 교주인 호면마군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호면마군과 아미 장문은 삼 일 밤낮을 쉼없이 싸우다 결국 동시에 부상을 당해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미 장문인의 무공 또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당시 격전을 치루셨던 천야산의 신망봉이 거의 붕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저 이 후배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흑암을 따르는 이들은 기회가 될 때 목을 떼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군요.”
순간 현진자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말았다. 지금 당장 눈앞에 호면마군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의 기억에 몰입하여 무의식 중에 드러난 것이라 다시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본래의 신색으로 돌아왔지만 현진자에게는 긴장되는 한 순간이었다.
‘정녕 놀랍구나. 이토록 겸손하신 분이 흑도의 무리를 대함에 있어서는 한올의 인정도 품질 않으니… 내가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줄은 몰랐구나.’
계속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은 현진자가 묻고 아미 장문이 답하는 식이었는데 그녀는 흑도의 무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일말의 용서도 있을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어느덧 날은 흘러 현진자는 고매하던 정파수뇌회의 모임 장소에 이르렀다.
이곳은 사천성과 감숙성의 남쪽 경계선상에 놓인 천숙산이었다.
‘아, 이런 곳에 비밀장소가 있었을 줄이야.’
그가 놀란 것은 사실 천숙산은 그다지 주목받을 만한 산이 아닌 때문이었다. 원래 사천에서 감숙으로 넘어갈 때도 사람들은 대부분 평창산 쪽을 이용했으며 천숙산은 지리적으로 매우 애매모호한 곳이라 그다지 사람들의 발길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미장문이 인도한 곳은 산중 깊숙한 곳에 자리한 동혈이었다.
“이곳입니다.”
현진자는 감격스러움을 애써 감추는 한편으로 의아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동혈이라는 곳은 회의를 하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춰진 무언가가 있겠지.’
그의 예상은 역시 맞아떨어졌다.
길게 이어진 동혈을 한참이나 걷던 아미 장문이 벽의 한 부분을 마치 혈도를 제압하듯 격타하자, 이윽고 기관 장치가 작동되는 소리가 나면서 바닥에 한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열린 것이다.
그곳에는 야명주의 불빛과 함께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가 걸쳐져 있었기에 현진자는 망설임없이 그 길로 내려갔다.
다시 통로가 이어지고 거대한 철문 앞에 서자, 마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철문이 스르르 열렸다. 현진자는 이 모든 통로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 같다는 생각에 속으로 연신 감탄을 연발했다.
‘놀랍고, 또 놀랍구나. 이는 필시 신허선생(神虛先生)의 작품이 틀림없겠구나.’
신허선생은 기관진학의 대가로 그의 앞에서는 어떤 기진도 그를 막을 수 없고, 그가 펼친 기진은 그 어느 누구도 지날 수 없다고 알려진 현묘한 기인이었다.
현진자로서는 도가의 장문인으로서 세속의 화려함과 명리에 초탈해야 한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지금의 마음 상태는 그리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놀라움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철문이 열리고 거대한 석실에 자리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먼발치에서 겨우 본 적이 있는 검성(劍聖) 뇌백혼 어르신과 도신(刀神) 연자청 권신(拳神) 철무령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들이야말로 정도 무림의 태산이라 할 수 있는 일성이신(一聖二神)인 것이다. 거기에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허허허, 어서들 오십시오.”
믿을 수 없게도 검성 뇌백혼이 제일 먼저 반겨주었다. 그리고 이어 모두가 한마디씩 환영 인사를 건네자, 아미 장문 방흑천검과 현진자도 분분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모두들 이렇게 일찍 오실 줄 알았다면 조금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여기는 이번에 새롭게 청성을 이끌게 된 청성파의 장문인 현진자이십니다.”
아미장문의 소개에 모두는 더욱 반겨주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정도무림이 흑도 무림을 제거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무슨 연유인지 잠시 사람들의 얼굴로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현진자는 경황이 없던 중이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석실은 매우 커서 여러 공간 활용이 가능하도록 구조되어 있었다.
처음 인사를 나누었던 곳은 여러 탁자와 앉을 의자들이 있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고, 왼쪽 벽면에 난 문을 지나면 거의 오십여 명은 족히 회의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다시 뒤쪽으로는 주방이 좀 떨어진 곳으로는 용변 시설이 갖춰져 있고, 옆 석실들로는 숙소와 연공실이 칸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처음 온 현진자를 위해 이 모든 안내를 맡은이는 역시 아미 장문인으로 그녀는 꼼꼼히 시설물들의 쓰임새와 주의사항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끝으로 그녀는 이전과는 달리 매우 신중한 어조로 한 장소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은 절대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현진자는 문 위로 비소(秘所)라고 음각된 이름을 마음에 새겨놓았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곳 자체가 비밀스러운 곳인데 이 안에서 다시금 비밀스런 장소라는 것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어쩌면 특급으로 분류되는 무공 비급이 있거나 영약이 보관된 곳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사 그렇더라도 내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겠는가. 단번에 삼 갑자의 내공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마음에 담아두어선 안될 것이다.’
정식적으로 회의가 진행되는 것은 내일 아침부터였기에 정도의 고수들은 각기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현진자는 그다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없고,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이들이라 감히 대화에 끼지 못하고 한쪽에 앉아 차를 들이키고 있었다.
이렇게 있느니 차라리 연공실에 가 있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드르르르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현진자는 긴장하여 얼굴이 굳어졌다. 이 소리는 석문이 열리는 것 같았는데 처음 들어오는 입구 쪽에서가 아니라 안쪽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히 주변을 둘러본 현진자는 이내 쓰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소리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신출내기 여기 있소, 라고 말한 꼴이 되고 말았구나.’
그는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얼마간 앉아 있으려니 찻잔도 비워지고, 혼자 앉아 있는 것도 어색해져서 그는 연공실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특별히 주목해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기척을 내지 않고 움직이려 애썼다.
그가 막 회의실 쪽을 지나치려 할 때 앞쪽에서 검성 뇌백혼이 다가오자 옆으로 비껴서면서 살짝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