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그런 셈이지.”
“거참!”
두 사람은 청살회의 수석장로 목인참의 심복인 공도와 임화균이었다. 목인참은 지금껏 자운을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특출난 재능을 지닌 자운이 스스로를 낮춘 것은 필시 어떤 흑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청살회는 5년 전부터 대공자인 함헌과 사공자인 자운의 지지계열이 보이지 않게 나뉘기 시작했다. 그중 수석장로 목인참과 삼장로 풍담은 함헌의 대표적인 추종자들로서 자운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뒷날 함헌이 공식적인 후계자로 발표되었어도 목인참 등은 자운을 큰 화근이라 생각하여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은잠과 추적에 능한 공도와 임화균에게 미행하라 한 것도 어쩌면 이 첫 강호행이 음모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공도와 임화균은 처음 각오와는 달리 지금은 상당히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자운의 걸음은 답답하리만치 느리고, 또 여유로워 이건 추적이라고 하기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낙양의 만학서원을 떠난 지 이틀째, 공도와 임화균은 결코 발각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자운의 뒤를 밟아나갈 때 두 사람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자운이 막 고갯길을 넘으려다가 말에서 내린 것이다. 그 옆으로 거지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 거지에게 말을 거는가 싶더니 말고삐를 건네주고 있었다.
―걸어갈 셈인가?
―흠.
공도와 임화균은 자운이 원래부터 소탈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므로 인해 더욱 자신들의 이번 임무가 쓸데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지가 말에 오르고 그 곁을 자운이 걸으며 막 고갯마루를 넘자, 공도와 임화균은 잠시 거지와 자운을 시야에서 놓쳤다.
―가세.
고개를 지나 어느 정도 이동했을 것인가를 계산하며, 둘은 소리없이 나아갔다. 사공자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라도 그들의 탐지를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이 두 사람의 마음에 가득했다. 그건 단지 섣부른 자만만은 결코 아니었다. 수석장로의 직속단 중 염규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들의 추적 능력을 능가할 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개 너머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당황하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해야만 했다.
―이건 뭐지?
―흩어져서 찾아보세.
그렇다. 자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말을 얻은 거지 노인만이 안장 위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릴 따름이었다.
당장 거지를 불러놓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자운이 아무렇지도 않게 옆길에서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왜 이곳을 서성이고 있는지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찾았나? 이쪽은 흔적도 없네.
―없어, 어디에도.
주위 삼백여 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자운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추적의 달인인 그들이었지만 아쉽게도 어떤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공도와 임화균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졌다. 그러나 이대로 발만 굴리고 있을 순 없었다.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두 사람은 저만치 앞서가는 거지노인을 단숨에 앞질러 그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그대에게 말을 준 공자는 어디로 갔는가?”
거지노인은 갑자기 눈앞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 다짜고짜 묻는 말에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잡아채고 말았다. 그 때문에 말이 앞발을 들어 허공을 마구 저어대며 비틀대다가 내리면서 그대로 두 사람의 머리를 공격했다.
순간 백색 광채가 반달 모양으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와 함께 날아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말의 앞 다리였다.
두 사람 중 조금 앞쪽에 있던 공도가 발검을 하여 내리찍는 두 앞발을 잘라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공도의 검은 애초에 뽑히지 않았다는 듯 검집에 들어간 상태였고, 바로 뒤이어 말이 절반 가량 잘려 나간 앞다리로 땅바닥을 찍더니 고통스러운지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그사이 거지노인은 어느 샌가 임화균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힌 상태였다.
“사, 살려주십시오. 전 보시다시피 거집니다요. 드릴 돈이 없습니다요. 살려주십시오.”
때 구정물이 얼굴에 범벅이고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봉두난발인 머리는 도대체 몇 년을 감지 않았는지 기름 때로 서로 엉겨붙었고, 그 속엔 얼마나 많은 이가 살고 있을 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여서 두 사람은 잠시라도 거지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 거지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네 목숨 따위엔 관심없다. 네게 말을 건넨 자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말하라.”
거지노인은 말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과 아직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소리 탓에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놈을 전 모릅니다. 전 단지 말을 좀 태워주면 안 되겠냐고 했습죠. 한데 그놈이 자기는 걷는 게 더 빠르다면서 고삐를 제게 건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 속으로 세상에 그런 뻔한 거짓말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지만 말은 할 수 없었답니다. 정녕 그놈이 두 분 어르신의 말을 훔쳐다가 제게 떠넘긴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지요. 알았다면 제가 어찌 말에 욕심을 냈겠습니까?”
거지노인은 재빨리 자운을 마음씨 좋은 젊은이에서 ‘그놈’으로 칭하면서 공도와 임화균의 환심을 사려했다.
공도와 임화균은 거지가 오로지 말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더 얻어낼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임화균이 물었다.
“가족이 있느냐?”
거지노인이 최대한 비굴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헤헤, 없습니다요.”
“잘됐구나.”
그 말과 함께 임화균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거지노인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순간은 번개처럼 빨랐기에 거지노인은 머리가 어깨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아직 그 상황을 다 인지하지 못하고 허공에 뜬 상태로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그러나 머리가 땅에 닿기 직전 흉악스럽게 일그러져서는 목 막히는 짧은 소리를 지르면서 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임화균이 처음 약속과 달리 거지노인을 죽인 것은 혹시라도 자운이 거지를 만나 인상착의를 물어볼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혹시 사(四) 공자가 우리를 눈치챈 건 아닐까?”
공도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임화균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어. 이건 우리가 방심한 거야.”
“어찌하면 좋겠나?”
“어쩌면 사 공자는 말을 주고 난 뒤에 지름길을 찾아 간 것인지도 모르겠군.”
“좋아, 그럼 일단 정주의 초광서원으로 가도록 하지.”
두 사람의 신형이 한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자운이 미행이 붙었음을 알게 된 것은 회(會)를 나온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석장로 목인참은 자운이 청살회의 차기 회주가 되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었노라, 그리하여 은밀히 사조직을 결성하여 후일 크게 청살회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그 누구보다 목인참이 자운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과 같았다. 어쩌면 청살회 내에서 암암리에 자운을 추종하는 인사들보다도 더욱더 자운의 능력을 크게 보고 있는 지도 몰랐다.
자운은 평소 같으면 미행을 하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두었을 테지만 이번 길이 유람이 아닌 복수였기에 따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보여야만 한다면 그건 오직 ‘하늘’과 ‘땅’에게만이었다.
낙양은 원수가 머무는 곳이었다. 그래서 자운은 제일 먼저 낙양에 여러 날을 머물렀다. 드러냄으로 도리어 드러내지 않는다, 는 이치로 미행의 의식 속에서 낙양을 떨쳐 내기 위함이었다.
낙양의 만학서원에서 책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이고, 다음 여정으로 정주와 장안이 거론되게 하고는 다시 낙양으로 돌아오게 되면 미행은 반드시 정주로 갈 것이고, 거기서 흔적을 찾지 못한다면 장안이나 다른 곳을 찾게 될 것이다. 낙양을 떠올릴 때쯤엔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일 것이다.
낙양으로 돌아온 자운은 포목점에 들려 검은 천을 구입하고는 장소추의 거처인 도담장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객방을 잡았다.
검은 천의 용도는 복면을 위함이었다.
자운은 객방 안에서 복면을 착용한 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자운이 아닌 한 명의 낯선 살수가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확실함에도 이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너는 누구냐?’
‘난 살수다.’
‘청살회 소속인가?’
‘천만에. 살인 명령을 내린 건 나다. 그리고 아버지며, 어머니며, 형이다. 어둠 속에 일들을 다 보아왔던 저 달이다.’
‘성공하길 빈다.’
‘고맙군.’
자운은 이 밤에 원수 장소추의 저택에 침입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던 자운은 얼굴을 두른 복면을 벗었다.
‘이 방법은 안 돼.’
장소추를 죽이러 가는 길이지만 저택을 침입하는 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해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건 또 다른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남기는 일일 뿐.
자운은 장소추를 죽이면서 자신이 또 다른 장소추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이미 낮 동안 저택 주위를 돌면서 그곳에 제법 실력을 갖춘 고수들이 호위하고 있음을 확인한 터였다. 만약 노출된다면 고수들은 개미 떼처럼 몰려올 것이고, 그들을 죽이지 않고 탈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운은 복면을 벗어 잘 갈무리한 후 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으로 마음과 몸을 다스렸다.
다음날부터 자운은 장원 주위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강맹한 고수들이 거의 오십여 명 정도 머물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운의 입가로 비웃음이 어렸다.
‘그렇겠지. 그가 해를 입힌 사람이 어디 아버지뿐이겠는가.’
무림 고수들을 곁에 둔다는 것은 그만큼 누군가의 칼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자운이 파악한 바로 지금의 장소추는 관직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직도 화려한 장원에 거한다는 것은 파면이나 불명예스러운 파직이 아닌 그저 개인적인 사정으로 물러났음을 의미했다. 그건 곧 그가 여전히 죗값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어느덧 사흘, 자운이 기다리는 건 장소추의 외출이었다.
마땅히 고수들을 대동하고 나올 것이므로 그들과 격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나 저택에 머물고 있는 숫자와는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사흘이 되도록 자운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살폈고, 드디어 나흘째가 되는 날 기회가 찾아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호화로운 가마 한 대가 대문을 빠져나왔고, 그 주위로 여섯 명의 검수가 사방을 철통같이 경비하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자운은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은밀히 뒤를 밟았다.
‘곧 보내주마.’
장소추를 태운 가마가 다다른 곳은 목단정(牧丹亭)이었다.
이곳은 일명 꽃의 왕이라 불리는 목단화가 잘 가꾸어진 곳으로 낙양을 찾는 사람들이 꼭 한 번씩은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지라 유람객들은 하나, 둘 목단정을 떠나는 중이었고, 장소추의 가마는 목단정의 뒤쪽을 돌아 암벽이 있는 곳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가마는 목단정의 서쪽 벼랑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이곳에 오르기까지는 조금은 험한 경사를 지나야 해서인지 유람객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도 목단화는 정연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더욱이 저물어 가는 석양빛을 받아 지금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주변을 두른 상태였다.
장소추의 가마는 벼랑 가까이에 내려졌고, 가마꾼이 가마의 앞문을 들어올려 가마 안에서 석양의 풍광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모습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바라보며 자운은 분노를 머금었다.
‘그대는 어떤 권한으로 이렇듯 한가롭게 풍광을 즐기는가. 그대가 행한 악이 이런 여유와 안락을 낳았단 말인가.’
아름다운 절경에 취한 장소추와 지난 세월 눈물 속에 지낸 아버지의 슬픔이 교차하면서 자운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운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망설임없이 신형을 날렸다.
호위무사들이 자운의 신형을 발견한 것은 자운이 그들의 면전에 거의 이르러서였다. 그들은 놀라는 가운데서도 가마를 등지는 것을 잊지 않았고, 신속히 검을 빼들었다.
자운은 앞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맹렬히 검을 쏘아갔다. 그 기세는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빠르고 강렬해 앞을 막아서는 것들은 모조리 갈라 버릴 것만 같았다.
낙뢰검법(落雷劍法)이었다.
호위무사들은 맹렬한 기세에 맞서지 못하고 힘겹게 자운의 검을 튕겨내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신형이 무너져 내리진 않았다.
자운은 이들의 실력이 청살회의 이급살수정도라고 판단했다.
죽이려 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으나 자운은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마냥 시간을 끌며 비무 타령이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합을 겨룬 후 호위무사들은 기습의 놀라움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자운의 검이 호위무사들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은은히 천둥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사십여 초가 지났고, 바로 그때 자운의 검이 홀연히 변화했다.
호위무사들의 검이 살기를 머금고 다가오는 중에 자운의 검은 호위들의 검의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이어 기묘한 각도로 회전하며 낙뢰검법의 단(斷)자결이 운용되었다.
미끄러지듯이 대각으로 솟아오른 자운의 검이 호위들의 검을 일제히 부러뜨렸다. 부러진 자리는 거의 검의 손잡이 바로 윗부분인지라 호위들은 순간 손잡이만 달랑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확인해야 했다.
자운은 숨쉴 틈을 주지 않고 그들을 향해 검을 뻗었다. 현란한 검예에 놀란 이들은 장력을 날리려 했으나 자운의 검이 더 빨랐다.
자운의 검은 쾌속하게 움직이며 그들의 몸에 연달아 닿을 때쯤 회수되고 찌르고를 반복했다. 미세한 검기가 나풀대면서 모두의 혈도를 점한 것으로 끝을 맺었다.
혼혈이 찍힌 호위들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이것은 검의 기(氣)만으로 점혈하는 매우 고명한 수법으로 검과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결코 이루기 힘든 경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