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97화 (97/125)
  • # 97

    목인추의 직속 부하인 염규의 시선이 차가운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자운은 머쓱해져서 어깨를 위로 들썩였다.

    “그래, 가보면 알겠지. 자, 가자구.”

    “네.”

    염규가 신형을 날려 달려가는 뒤를 따르며 자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무슨 일일까? 혹시 살수절정관에 들어가라는 것일까? 이거 골치 아파지는데……. ’

    혹여 대부가 자신의 숨겨진 힘을 간파하고 시험해 보기 위해 살수절정관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운은 골치가 아파져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자, 아버님을 뵙습니다.”

    자운은 내전에 들어 청살회주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청살회주 함초극은 둥그런 탁자에 평온히 앉아 있었는데 자운을 보고는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자리에 앉아라.”

    그는 자운이 송구스러운 몸짓으로 자리에 앉자, 앞에 놓인 차(茶)를 직접 따라주었다.

    그의 외모는 선비의 그것마냥 부드러웠는데 그의 몸을 감도는 기운 또한 봄바람이 일렁이는 것처럼 평온하여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보노라면 결단코 그가 살수집단의 수장이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너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음성엔 자비로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자운은 그렇기에 더욱 송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 소자, 입이 열 개라 한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운이 솔직하게 그동안의 나태함을 시인하자, 함초극은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이 침묵은 앞으로 하게 될 말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갔다.

    자운이 허송세월한 삼 년여 동안 함초극은 자운을 따로 불러 훈계한 적이 없었다. 자운이 이 년 동안 잡다한 책을 읽고 있을 때, 장로들 중 일부는 호되게 질책하여 수련에 정진하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함초극은 지켜보라고만 말했던 것이다.

    이 년이 지나 자운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자, 함초극은 이제 비로소 마음을 잡은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러한 기대는 며칠 못 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부터 일 년 동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건들거리며 지냈던 것이다. 차라리 책이라도 읽었던 때가 더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함초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동안 나는 말없이 너를 지켜보았지만 이젠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구나.”

    자운은 속으로 올 것이 왔다라고 생각했다.

    ‘끝내 살수절정관에 들어야 하는가!’

    살수절정관은 일급살수가 거쳐야 할 필연적인 길이었다. 정교하게 구성된 십팔 관문은 살기로 가득 차 있고, 특히 십이 관문부터는 청살회의 이급살수들이 배치되어 피와 살이 튀는 격전을 벌여야 했다.

    자운이 염려하는 건 십이 관문부터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죽이거나 중태에 빠뜨려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목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이 이급살수라 해서 그들의 생명까지 어찌 이급으로 판단하여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함초극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 오 개월의 시간을 주마. 그동안 몸과 마음을 검과 같이 갈고 닦아 일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 개월이 차는 날, 네 인생의 첫 살행(殺行)을 떠나도록 해라.”

    자운으로서는 너무도 뜻밖의 말이었다.

    살인 명령이 떨어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살수절정관을 거친 다음 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살행을 통해 너는 진정한 무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피를 취한다는 것은 강호인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강호가 나 자신의 품으로 안겨오는 것을 뜻한다. 힘을 다해 준비하여라.”

    “소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운의 얼굴에 진심이 가득 묻어났고, 순간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함초극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가 삽시간에 스러졌다.

    대부와 면담을 마친 후 자운은 놓았던 검을 잡았다.

    많은 이들이 관심 어린 눈길로 지켜봤다.

    삼 년여 허송세월의 결과가 어떠할지 궁금했던 그들의 얼굴로 실실거리는 웃음이 번졌다.

    “무뎌져도 너무 무뎌졌군.”

    “자업자득이지 뭐.”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고 저렇게 무너지다니…….”

    삼 개월이 지날 무렵, 자운은 대부에게 외출을 요청했다.

    살행(殺行)을 떠나기 전 먼저 강호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고 싶다는 뜻을 고했다.

    청살회주는 자운이 지금껏 단 한차례도 외부로 나가본 적이 없음을 떠올렸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준 후 외출을 허락했다.

    이번 외출의 목적은 복수였다.

    청살회주가 살행을 명했을 때, 자운은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했지만, 정작 중요한 뒷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었다.

    그 생략되어진 말이 이번 외출의 목적이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의 진정한 뜻이랄 수 있었다.

    “소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낙양의 장송추를 죽이는데 힘을 다하겠습니다.’

    장소추! 그는 자운의 원수였다.

    그는 더 높은 관직에 있던 아버지를 모함하여 결국 관병에 쫓기는 신세가 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 결과 험한 도피 생활에 어머니와 형이 목숨을 잃었다.

    자운에게 있어 장소추를 죽이는 일은 살인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언젠가는 당연히 완수해야 할 사명 같은 것이었다.

    오 개월 뒤의 살행을 지시받았으나, 자운에게 있어 장소추는 결단코 살인 대상 중 두 번째가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자운이 장소추를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은 정확히 십오 세 때였다.

    그날은 먼저 떠난 형의 생일날이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형의 이름을 구슬프게 부르며 눈물을 짓다 지쳐 잠들었을 때 자운은 아버지가 그려놓은 형의 어린 모습을 보며 아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원수를 갚겠노라 다짐했다. 세상 끝에 있다 해도, 바다 제일 밑바닥에 있다 해도, 하늘 저 높은 곳에 있다 해도 쫓아갈 생각이었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살아 있는 건 오로지 이 자운의 칼에 도륙 당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일단 정보가 필요했기에 자운은 그를 잘 따르는 일급살수 무령을 통해 장소추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언젠가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때가 온 것이다.

    내일의 강호 출도를 앞둔 저녁,

    자운은 식사를 마치고 화원을 거닐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를 죽이러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처리하고 오라고 응원하실 아버지가 아님을 자운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원수를 갚는다고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득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자운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손길로 자란 꽃들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의인이 애매히 죽임을 당하는 것은 막아야겠으나, 악인이 번성하고 장수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의 제단에 장소추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꽃이 들었음인가, 바람이 들었음인가!

    한줄기 미풍에 꽃들이 살랑였다.

    보름이 지난 정오 나절에 자운은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낙양은 오랜 옛 수도답게 화려한 볼거리들로 가득하였고, 지나는 사람들마다 활기가 넘쳤다.

    이제껏 조그마한 마을 밖에는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자운이었다. 보통 촌에서 살던 사람이 도시로 나오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 지 모르게 되고, 입을 헤, 하고 벌린 채 걸음을 옮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운은 휘황찬란한 주변의 광경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강호에 나온 목적이 지닌 중압감이 능히 화려함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운은 몇 군데의 명승지와 낙양의 이곳저곳을 한가롭게 두루 살폈다. 그런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강호를 유람하는 여유로운 청년의 모습이어서 도무지 심각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해가 질 무렵, 자운이 이른 곳은 낙양에서 책이 많기로 손꼽히는 만학서원(滿學書院)이었다.

    서원에 들자, 점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보유하고 있는 만학서원입니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운은 책장에 꽂혀 있는 무수한 책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동안 책을 많이 읽지 못해 이것저것 읽어볼까 합니다. 제가 이 부근에 객방을 하나 잡아놓고 잠과 식사는 그곳에서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은 이곳에서 책을 좀 읽었으면 합니다만.”

    점원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하아, 대단하십니다. 서원에서 일하는 제겐 책에 굶주리신 분들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또 아름답게 보인답니다. 손님의 뜻대로 하셔도 됩니다. 아,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만…….”

    자운은 표정으로 물었고, 점원이 말을 이었다.

    “그게… 저희 서원에서는 이곳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더라도 살 때와 똑같은 값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겠는지요?”

    “하하, 전 또… 그런 것이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군요. 그럼 내일부터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상호간에 거래가 성사되자, 자운은 닷새에 걸쳐 만학서고를 드나들며 책을 읽었다.

    첫날 자리에 없었던 만학서원의 주인은 그 이튿날부터 서원을 지키고서 드나드는 자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한쪽 귀퉁이 탁자에 수북히 책을 올려놓고 독서삼매경에 빠진 자운에게 차를 손수 가져다주기도 하고, 몇 마디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엿새째가 되자 원하던 부류의 책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자 자운은 서원 주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원하는 책이 이제 보이지 않으니 떠날까 합니다. 혹시 다른 서원 중에 추천할 만한 곳이 있으신지요?”

    주인은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음, 낙양의 다른 서원들은 거의 우리와 비슷비슷하니 정주(鄭州)로 가서 초광서원(初光書院)을 들러보게. 그곳은 자네가 원하는 책들만 모아둔 곳이니 말일세.”

    “정주의 초광서원이라… 혹시 그곳에서 더 이상 볼 게 없다면 그 다음에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미리부터 읽을 책이 없을 것을 걱정하는 자운을 보며 주인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책에 집착하는 청년은 이제껏 만나본 적이 없었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이 마치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기쁜 주인장이었다.

    “그 다음에는 장안(長安)도 좋을 걸세. 그곳엔 난화서원(蘭花書院)이 유명하지.”

    “상세한 말씀 감사합니다. 며칠 동안 폐만 끼치고 가는군요.”

    “폐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이번에는 내 비록 돈을 받았지만 다음에 오면 그냥 무상으로 무슨 책이든 볼 수 있도록 할 테니 아무 때나 찾아오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인은 자운의 광적인 독서 열정에 매료된 터였다. 자운은 인사를 건네고 만학서원을 나와 천천히 말을 몰아 정주로 향했다.

    주인장은 문 앞에서 자운이 멀어지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의 젊은 날이 떠올랐다. 돈이 없어 버려진 책들을 주워 읽었던 그는 훗날 반드시 큰 서원을 차리겠노라고 다짐했었다. 사십여 세가 되어 결국 뜻을 이룬 그는 현재 낙양의 삼십여 곳에 이르는 고아원에 많은 책들을 기증한 터였다.

    그는 자운의 모습이 끝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몸을 돌렸다.

    한데 몸을 돌리자마자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곁에 아무도 없었건만 어느새 한 사내가 무심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억압이 없었으나 큰 억압을 담고 있었고, 공포가 없었으나 거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차라리 화를 낸다면 두려움을 떨쳐 내련만 음유하게 온몸을 스멀거리며 휘감는 서늘함에 숨쉬는 것조차 잠시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묻는 말에 솔직히 답해야 할 것이다.”(전음)

    입은 열지도 않았건만 소리가 귓가에 전해졌다. 주인장은 그래도 강호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어 이것이 바로 전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또한 전음이 보통이 강호인들이 아무렇게나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리를 질러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도리어 엄한 생명들까지 해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마, 말씀하십시오.”

    “방금 전 말을 타고 떠난 공자가 읽었던 책들이 어떤 것인지 거짓없이 고하라.”(전음)

    “왜 그러시는지요?”

    “질문은 내가 한다. 넌 대답만 하라.”(전음)

    그 말과 함께 살기가 몸을 한차례 휘감았기에 주인장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된 채로 답했다.

    “그, 그는 화초에 대한 책들만 찾아서 이, 읽었답니다. 그, 그러니까 식물도감이나 화초전 같은 책들입지요.”

    주인의 말에 사내의 얼굴엔 잠시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가 번개같이 사라졌다.

    “진실이렸다?”(전음)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는 어디로 간다고 하더냐?”(전음)

    “그는. 그러니까 그가. 화초에 대한 책들을 또 묻기에 정주에 있는 초광서원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정주?”(전음)

    “네, 그곳은 화초에 관한 책들로 가득한 곳입지요. 그,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장안을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되었다. 기억하라. 넌 나를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다.”(전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아무렴요, 아무렴요.”

    주인은 연신 허리를 숙여 절하기 바빴다. 그러다 한순간 뭔가 허전한 느낌에 허리를 폈을 때는 이미 사내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길을 지나던 이들이 주인이 문 쪽을 향해 연신 절을 하자 누가 있는가 싶어 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상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주인은 자운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네. 두려운 나머지 사실대로 고하고 말았네. 미안하네. 그러니 부디 무사해 주길 바라네.’

    “어찌 되었나?”

    “정주의 초광서원으로 향하고 있네.”

    “서원? 또?”

    “놀라긴 일러. 사(四) 공자가 읽은 책이 뭔지 아나?”

    “아니 설마 몰래 무공비급을?”

    “푸후후, 그러면 차라리 진지해지기라도 하지. 글쎄 식물이나 화초 따위의 책들을 보고 있었다는 거야.”

    “화초? 어이가 없군. 기껏 강호에 나와서까지 화초 타령이라니. 아무래도 수석장로님의 염려가 지나치신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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