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96화 (96/125)

# 96

그의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다. 과거 도망 다니던 아픈 기억 때문에 청살회주가 대부로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젠 자운을 남겨 두고 사랑하는 부인에게로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여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살회주가 자운을 양자로 삼은 것은 그가 아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주는 세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운은 훗날 자신이 양자가 된 까닭을 알게 되었는데 첫째는 그의 근골이 뛰어난 것이요, 둘째는 세 아들을 위한 청살회주의 배려 때문이었다.

청살회주는 아들들이 자라 가는 과정에서 편안함과 당연함에서 벗어나 방심치 않고 크게 성장해 주기를 바랐다.

즉, 자운은 세 아들의 ‘자극제’로 선택된 셈이었다.

무공에 관한 기초지식과 운기행공은 다섯 살부터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무공 수련은 칠 세가 되어서였다.

살수조직의 무공은 사파의 패도적인 무공이나, 정파의 굳건하고 화려한 무공의 흐름과 궤를 달리했다.

얼마나 쾌속하고 효과적으로 목숨을 끊어 놓는가가 목적이기에 무공은 크게 두 글자로 대변할 수 있었다.

속(速:빠름)과 은(隱:숨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각종 문파의 무공에 대한 연구가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모든 것은 살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운은 열 살이 되면서 자신이 살수(殺手)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공은 사람의 심성까지 바꾼다는 말이 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를 지켜준 건 아버지,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꽃과 풀들을 가꾸고 보살펴, 생명을 움트게 했다. 어쩌면 그런 아버지의 의식이 어릴 적부터 자운의 마음속에 스며든 것이리라.

어머니의 유언도 자운을 지켜주는 소중한 장치였다.

“운(雲)아,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항상 밝게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가 대신 들려주신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는 자운의 살과 뼈에 새겨졌다. 그런 까닭에 살수의 잔악한 무공이라도 그의 심성을 어쩌지 못했다.

자운은 청살회주의 뜻을 따라 훌륭한 자극제가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굳이 최선을 다해야 할 만큼 무공이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마른 땅에 물이 스미듯 그렇게 습득해 가면서 자운은 원래 무공이란 것이 굉장히 쉬운 것이거나 혹은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이 특별히 보잘것없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자운은 스스로 뛰어난 기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 결과 자운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어느새 둘째 형(당시 십팔 세)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열네 살이 되었을 때는 당시 이십 세던 큰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형들은 모두 그를 아껴주었다.

그러나 그런 따스한 시선에 변화가 생긴 것은 열네 살의 봄이 되어 청살회주의 선언이 있은 후였다.

<가장 뛰어난 성취로 살수절정관(殺手絶頂關)을 통과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것이다. 거기에는 자운도 물론 포함된다.>

그 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형들은 예전 같지 않았다. 회(會) 내에서는 차후 자운이 제일 먼저 살수절정관을 돌파하고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자운을 가만히 불렀다.

“요즘 무공 수련은 잘 되어가고 있느냐?”

자운이 답했다.

“그럭저럭요.”

아버지는 잠시 자운을 빤히 쳐다보고 말했다.

“내가 볼 때는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구나.”

자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너는 살수가 될 생각이냐?”

자운이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단지 대부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힘을 쓰고 있을 뿐인걸요.”

“그래, 그렇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꽃밭에 조금씩 물을 주셨다.

그로부터 열흘 뒤, 잠자리에서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너는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그건 어떤 조건이나 이유가 없다. 그저 너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좋은 것이다. 도리어 네가 나의 아들이라는 것이 나는 고맙다.”

자운은 듣고도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자운은 잘 알고 있었다.

“그처럼, 그처럼 말이다. 회주님도, 그도 사실은 아버지란다. 그에게도 아들이 있지 않느냐.”

거기까지 말하고,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자운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의식도 하지 않았는데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 둔 채로 자운은 아버지의 뒷말을 되새겼다.

‘회주님도 아버지란다. 그에게도 아들이 있지 않느냐.’

자운은 그 뒤부터 수련을 게을리 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때부터 수련의 성취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자운은 더욱 수련에 전념했고, 힘을 다했다. 자운에게 있어 무공은 세상 그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운의 무공은 그 순간부터 멈춰 버린 것처럼 외부에 보여졌다.

발전해도 아주 천천히 느리게 발전하는 것처럼 세상에 드러났다.

그때부터 멀어졌던 형들이 다시금 자운에게 다가왔다.

자운은 가끔 무공의 성취가 더뎌 괴롭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형들은 그런 자운을 위로해 주었다. 물론 거기엔 진심 삼 푼과 칠 푼의 안도가 자리한 것을 자운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큰 형이 살수절정관을 돌파했다.

청살회주는 공식적으로 큰형을 후계자를 선포했고, 진정 기뻐하셨다.

회주는 자운을 따로 불러 게으른 수련을 호되게 책망했지만, 자운은 대부의 성난 눈 뒤에 자리한 기쁨을 엿볼 수 있었기에 기쁘게 책망을 받았다. 성공적으로 양자의 사명을 완수한 셈이다.

자운의 꿈은 훌륭한 살수가 되거나, 살수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어떤 아쉬움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자운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정녕 나의 꿈은 무엇일까?’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건넸다.

“꽃은 말이다. 씨의 모습일 때는 다 엇비슷해 보여도 나중에는 모두 자기만의 색깔과 향을 지니게 된단다. 하물며 꽃이 그러할진대 사람은 어떻겠느냐. 운아, 고민하지 말거라. 너에겐 너만의 향기가 있지 않겠느냐. 지금 네가 익혀가는 향기는 사실 네게는 맞지 않는 것 같구나.”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자운은 그 말을 듣고 철퇴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향기!

그때부터 자운은 자신의 무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향기를 품은 무공을!

이 년여 동안 자운은 이백여 권의 책을 읽었다.

처음 자운이 검 대신 책을 들고 다니자,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책인가 싶어 기웃거리거나 물어오곤 했다.

그러나 곧 어떤 책인지를 알고는 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렇기도 한 것이 자운이 제일 처음 읽은 건 화초에 관한 책이었고, 그 뒤로도 예법이나, 천문, 기본적인 의서, 도덕경 등의 종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허허거리며,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가 보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자운의 행동을 두고 여러 말들이 오갔고, 그런 이야기들 중 백미는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에 실망하여 무공에 뜻을 버린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청살회주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자운의 무공은 정지되거나 퇴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운의 내면은 불타는 정열로 가득하였고, 정열은 그만의 즐거움인 무공의 창안으로 내부에서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자운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또한 무공을 익혀 나갔다.

자기만의 문파를 꿈꾸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갔다.

자운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전면을 응시했다. 그 앞에는 고목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오 일 전 강풍이 불었을 때 중간 부근이 부러져 나가 본래의 위용은 온데간데없는 지경이었다.

고목나무에서 영원히 눈을 떼지 않을 것 같던 자운의 시선이 한순간 부근 풀잎으로 옮겨졌다.

자운의 나이 18세. 그의 외모는 그려 넣은 듯한 이목구비가 각기 조화를 이루고, 반짝이는 눈동자 이면으로 심연을 간직한 것이 절세의 미공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책 속에서 길을 찾은 지 이 년여,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운은 하나둘 자신만의 무공의 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천지를 가를 듯한 천둥번개의 기세를 통해 뇌전의 힘이 응축된 낙뢰검법(落雷劍法)을 떠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 다음에는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의 여유로운 행보를 보면서 천운유보(天雲流步)를, 가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통해서는 각법인 낙화유수(落花流水)를 창안했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받아 상승내공을 연마하는 천지심법(天地心法)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그리고 지금, 나흘에 걸쳐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목나무와 풀잎들을 바라보며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새로운 무공의 희미한 기척을 붙드는 중이다.

닷새 전에 불어닥친 험한 폭풍우에 어른 두어 명이 손을 맞잡고 껴안아야 할 만큼 커다란 고목나무가 중간 지점이 부러져 나갔고, 뿌리는 절반이나 솟구쳤다.

하지만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그 주변의 가녀린 풀들은 여전히 미풍에 살랑거리는 것이 강풍이 언제 불어오긴 했냐는 식으로 여유로웠다.

자운은 무심결에 언덕을 지나다 이 광경을 접하고는 순간 기기묘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여린 풀들이 부드러움으로 강풍을 이겨낸 힘의 요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만일 풀과 같은 무공을 깨닫는다면 수백 배나 사나운 장력이라도 능히 순풍이 지나듯 할 수 있을 것이다. 뼈와 근육이 뭉개지고 기혈은 들끓게 되리라는 상대의 예측을 깨고 살랑이는 미소를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흘째가 된 오늘 자운은 비로소 희미한 끈을 붙들었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표류하던 이가 저 멀리 육지의 흐릿한 모습을 발견한 것과 같아서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윤곽이 뚜렷해지고 형태가 잡혀가게 되는 시작점에 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자운은 지극히 평온한 가운데 풀잎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

수천 가닥 얽히고설킨 실을 좌우, 위아래로 살피며, 헤아릴 수 없는 오류를 극복하며 풀어내느라 번개와 같은 속도로 이치(理致)와 섭리(攝理)가 오가는 중인 것이다.

수많은 무학의 원리가 곡선(曲線)으로 휘고, 혹은 사선(斜線)으로 연결되며, 장법의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 충돌하고 삭제되고, 다시금 불쑥 새로운 것이 솟았다가 수그러들기를 반복했다.

자운의 심연이 깃든 눈동자가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았다.

분명 몸은 현실 세계에 있으나, 정신은 이미 무아의 지경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강풍을 견뎌낸 가녀린 풀의 여유와 숨겨진 힘을 샅샅이 탐색해 가던 자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누구?’

누군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원하던 길이 훤하게 열릴 찰나였기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다가오는 인기척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까지나 청살회 내에서 자운의 현 위치는 무공에 대해 관심을 잃은 자였다. 청살회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계속 그렇게 보여져야 했다. 물론 벗어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자운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자운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얼굴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한 바뀐 것이나 다름없었다. 번쩍 빛나던 눈동자는 평범하게 흐려졌고, 수려한 외모는 어딘가 부족한 듯 변했고, 고요함과 태산의 엄중함이 깃들어 있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깃털처럼 가볍고 경박스러운 몸짓이 드러났다.

변화의 전후는 너무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어 자운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반대의 성격을 지닌 쌍둥이 동생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자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삐죽거리며 고목나무의 부러져 나간 곳을 발로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이놈의 나무야, 백년을 넘게 살았으면 나잇값을 해야 할 것 아냐?”

그때 언덕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운의 곁에 이르렀다.

“으악~”

자운은 두리번거리다 곁에 시커먼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소리쳤다.

“사(四) 공자님, 여기에 계셨군요.”

흑의사내는 염규였다. 그는 이십대 중반에 일급살수의 반열에 올랐고, 삼십사 세인 지금은 수석장로의 직속 부하 중 하나였다.

“왜 소리도 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놀래키는 거야!”

자운이 꽥,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염규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회주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아버님께서?”

자운은, 친아버지를 부를 때는 아버지라 불렀고, 대부인 청살회주에겐 아버님이라 칭했다.

그것은 자운 나름의 규칙이었다. 대부인 청살회주에게 극진한 존칭을 쓰는 것이 친아버지보다 그가 더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극진히 존칭함으로서 그만큼 거리가 있는 존재임을 암시함이며, 친아버지는 또 그만큼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시지?”

염규는 굳은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시 묻는다 해도 저 표정이 변하지 않을 것은 확실한 것이었다.

자운은 염규가 수석장로 목인추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청살회 사람들 중 일부는 지극히 자운을 경계했는데 그들 중 핵심은 수석장로인 목인추와 삼장로 풍담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일찍이 자운의 천재적인 재질을 알아본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자운이 어느 날부터 무공이 퇴보해 가는 것을―비록 자운은 천연덕스럽게 연기했으나―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았고, 무언가 감추고 있는 속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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