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95화 (95/125)
  • # 95

    둘째로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후덕한 인심의 옥헌장에 대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남은 문제라면 장주의 행방이었다.

    “당신은 대체 뉘시오?”

    호위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상태로 물어왔다.

    처음에는 해를 끼치러 온 사람인 줄 알았으나 몇 마디를 나누고,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통해 다른 의도가 있다는 짐작을 한 것이다.

    “노부인은 암매장을 당해 죽은 것이 아니다. 신중산 깊은 곳에서 우연히 만나 내 따로 보호하고 있었다. 노부인이 잠깐 정신이 들 때 옥헌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들이 자신을 버렸노라 말했기에 이곳에 확인코자 오게 된 것이다.”

    말을 하면서 노공은 시체의 이곳 저곳을 살피기에 바빴다.

    그는 모종의 세력이 옥헌장의 재력을 노리고 장주로 위장하여 들어온 것이라 짐작했다.

    거의 확률은 없다고 봐야겠지만 혹여 몸 어딘가에 조직원의 공통된 문신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강호의 어떤 방파인지 알아내 볼 심산이었다.

    “아, 살아 계셨단 말입니까?”

    그는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서둘러 암매장했다는 놈들을 죽인 것이었구나. 그런 것이었어.”

    “노부인의 장례를 치렀다면 관 속에 누구 시신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몸의 뒤쪽까지 뒤집어 모조리 살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 노공은 맥이 풀렸다.

    만약 장주가 죽었다면 노부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아들이 버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적지않은 위로가 되겠으나 어쩌면 자신이 버려지는 일이 사실이더라도 차라리 자식이 죽지 않은 것을 바랄지도 몰랐다.

    이제 희망은 지금 행방이 묘연한 그림자 무사에게 걸 수밖에 없었다.

    “복면을 계속 쓰고 있을 참입니까?”

    “장주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지?”

    노공은 호위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복면을 하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호위는 상대가 노부인을 보호하고 있으며, 방문한 목적이 악의가 없고, 목소리로 봐서 노인장이 틀림없는 지라 공손함을 갖춰 말했다.

    “부인과 이남 일녀의 자식이 있습니다.”

    “부인과의 관계는 원만했던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거의 3년 전부터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3년 전이라…….”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장주의 나이는 이제 고작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터였다. 아직 혈기왕성할 나이 때건만 부부 관계가 없었다는 건 둘 사이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3년 전부터 가짜로 바뀐 것은 아닐 것이리라. 이미 치매는 5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니 가짜라면 2년을 참고 견디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부인은 어떤 여자인가?”

    호위는 즉시 어떤 의도로 묻는 것인지를 파악했다. 노공의 목소리 속에서 장원을 염려하는 마음을 읽은 것이다. 과연 치매에 걸린 노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홀로 키워가면서 장원을 이끌어갈 만한 정신을 갖춘 사람인지.

    “그녀는 매우 지혜로운 여자입니다. 베풀 줄 알면서도 규모있는 살림을 꾸려 나갈 줄 아는 분이십니다.”

    노공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침상에서 약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노공의 시선이 무심결에 시신을 보고 있다가 이내 눈을 찡그렸다.

    ‘허허, 이거 벌써 피곤한 건가?’

    그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의식없이 시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상처 흔적이 글자처럼 보이기 시작했기에 피곤기가 몰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개 힘없는 눈으로 어느 한곳을 바라보게 되면 사물이 중첩되면서 기괴한 모양으로 보이는데 지금이 꼭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을 힘주어 깜박여 또렷하게 바라보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처가 글자처럼 보이자 그는 정신을 집중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사현(事玄)!

    “사현이 뭔가?”

    상황에 걸맞지 않게 뜬금없는 질문에 호위가 대답대신 의문에 찬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다 워낙에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사현암밖에는 모릅니다만.”

    “거기가 어디지?”

    “경공을 펼쳐 달린다면 일 식경 안에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동북 방향으로 가시면 작은 산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 보명사라는 사찰 아래쪽에 있는 작은 암자지요.”

    “자넨 이곳을 지키고 있도록 하게. 집안 식구들에게 알리는 건 날이 밝은 후에 해도 늦는 것은 아니니 지금은 소란이 없도록 해주게나.”

    호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고, 그사이 노공의 신형은 이미 밖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신법의 빠름이 실로 엄청난 지라 호위는 절로 입을 벌려 경탄을 금치 못했다.

    노공은 사현을 향해 달려가고 있긴 했으나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세상 어떤 범인이 굳이 글자를 남겨 추적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인가. 제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해도 괜한 수고를 자청할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현재 노공이 달려가는 까닭은 현실적인 논리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석연치 않은 무언가가 자꾸 마음에 걸렸고, 사현에 이르게 되면 어쩐지 길이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노공에게 어둠은 그다지 방해 요인이 될 수 없었다.

    일 다경을 약간 넘겨 산을 오르던 그의 발걸음이 어느덧 작은 암자에 이르렀다.

    어디에도 암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는 즉시 이곳이 사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흑색 무복을 걸친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의외로군. 게다가 복면인이라…….”

    흉수가 틀림없었다.

    “취미가 고약하구나. 살인을 저지르고 고의로 흔적을 남기다니.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냐, 아니면 그렇게 할 짓이 없는 것이냐?”

    “듣자 하니 늙은이인 듯한데 말이 많구나.”

    노공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사내는 대화를 할 의양이 없어 보였다.

    곧바로 검을 빼어 들고 짓쳐 드는 데 일체의 허식을 배제한 쾌검이었다.

    노공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당황하지 않고 장력을 날려 검의 방향을 흔들어 방해했다. 간결하면서도 빠르게 짓쳐 드는 검은 거친 장력을 만나면서는 쾌검이 둔검으로 변했다.

    그것은 마치 빠르게 쏘아진 화살이 물속으로 파고들 때 일순간 진행하던 힘이 약해지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것과 비슷했다.

    사내의 검은 발출하여 중간까지 나아갈 때는 빛과 같이 빨랐으나 노공의 몸 가까이에 이를 때에는 어느새 둔탁해져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억지로 검을 느리게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내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신법을 현란하게 펼쳐 노공의 몸 주위를 돌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장력의 세력이 형성되기 전에 검격을 이루려는 목적이었으나 그것도 이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노공의 등이나 좌우를 공격하기 위해서 크게 반원을 그려야 했지만 중심이 된 노공은 몸을 살짝 트는 것만으로 정면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공의 수준이 비슷하다면 모를까, 큰 차이를 보이는 까닭에 사내의 공격은 무의미한 상태로 이어져 갈 뿐이었다.

    노공은 사내의 검법을 통해 그가 틀림없이 장주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무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쾌검은 살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살수들을 막아야만 하는 호위들에게도 가장 이상적인 검술인 것이다.

    거의 백여 초가 지나는 가운데 노공은 한순간 빈틈을 노려 사내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는 그를 죽이려 함이 아니라 살초를 전개하여 막는 사이 변초를 통해 그를 안전하게 생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는 노공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헉!”

    충분히 피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한 수에 어이없게도 사내는 피하지 않고 거의 몸을 가져다 대듯 밀고 들어온 것이다. 경력이 실린 그의 응조가 그대로 사내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크아아악!”

    황급히 손을 빼냈지만 이미 치명적인 상태였다.

    이건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에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기울였었건만 상대는 도리어 다가와 버린 것이다.

    “왜 이런 일을!”

    그를 바닥에 눕히고 급히 지혈에 이어 응급처치를 했지만 목숨을 보전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인피면구……. 보셨습니까?”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노공은 이내 속으로 삼켰다. 그는 죽으려했고, 지금 그는 세상 누가 온다고 해도 회생시킬 수 없는 상태였다.

    “보았네. 그는 장주가 아니었어. 그대는 그림자 무사인가?”

    “그렇습니다……. 장주를 죽인 건 접니다.”

    “무슨 소리, 그는 장주가 아니…….”

    “또 한 장의… 인피면구가…. 씌어져 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인피면구를…….”

    고통스러운 듯 무풍은 말을 잇지 못했다.

    노공은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그럴 수가… 도대체 장주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또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

    띄엄띄엄 고통 속에서 한마디씩 이어가는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5년 전 노부인이 치매기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장주는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그림자 무사의 시선을 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본래 마음이 여린 데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음을 가졌는데 노부인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점점 더 깊이 병적으로 시선을 의식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두 장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인피면구를 마련했는데 한 장은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고, 다른 한 장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인피면구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에 노모를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차마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가 없어 사람을 시켜 버리게 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추악함은 두 장의 인피면구에 숨기고 점점 포악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가족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려 하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 말을 끝으로 무풍은 편안한 안색으로 죽음을 맞았다.

    노공은 어쩌면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도 무풍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심으로 장주의 사람됨을 안타까워한 훌륭한 호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장주의 가족들을 지켜준 사람이기도 했다.

    장원으로 돌아온 뒤 시체를 살펴보니 무풍의 말대로 역시 한 장의 인피면구가 덧입혀 있었다. 어찌나 오랫동안 착용하였는지 거의 피부와 일체가 되다시피 한 지경이었다.

    노공은 호위에게 모든 정황을 설명해 주고, 간밤에 침입자들에 의해 장주와 무풍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쪽으로 이야기했다.

    호위 또한 세상을 살아온 날이 결코 적지 않았기에 어떤 종류의 것들은 차라리 듣지 않아야 좋은 것을 알고 있었다.

    “노부인은 직접 모시고 오겠네. 잠시 동안은 노부인의 생사에 대해 말하지 말게나. 이미 장례를 치른 상태이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여러 의구심을 품을 것이기 때문일세.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지 입을 맞추어야 하니 뒤에 따로 이야기하세.”

    그러나 정작 이 말을 노공이 하고 있을 때는 이미 노부인은 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어떤 조화인지 알 수 없으나 노부인은 아들인 장주가 죽은 그날 밤, 후흑문의 거처에서 조용히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뒷날 노공은 이 죽음이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아들을 배려하려는 어머니의 심정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탄식했다.

    ***

    14. 낙양 정소추의 죽음

    해결의 벼랑 후흑애.

    그곳에 한 젊은이가 섰다.

    이제 열 여덟,아홉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나이였으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기도는 숱한 인생의 나날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든 그는 잠시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너머로 아련하게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 * *

    그의 이름은 자운!

    운이란 이름을 지은 건 그의 어머니였다.

    구름처럼 자유롭기를 바랐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먹구름처럼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하고, 그 가운데 뇌성벽력을 터뜨릴 줄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자운은 전혀 기억할 수 없지만 어머니는 그가 두 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고, 그래서 그는 그립고 또 그리워도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냐고 물으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었노라 말씀하셨는데, 항상 이야기의 끝 무렵에는 깊은 탄식과 함께 얼굴 가득 그리움이 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운은 그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한 어머니의 모습을, 아버지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로 가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요즘은 꿈에서도 보기가 힘들다며 웃음을 짓곤 했지만, 그 웃음 속에 얼마나 큰 슬픔이 묻어 있는지 차라리 웃지 않는 것이 나아 보일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살수집단인 청살회 소속이다.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살수집단의 소속이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냉정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건 비단 그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청살회의 본거지에 머물고 있긴 했지만 아버지는 내부 화원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아버지가 청살회에 정착하게 된 건 자운이 태어나기 일 년 전이었다.

    원래 아버지는 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었는데 모함을 받아 쫓기게 되었을 때 청살회주의 배려로 몸을 숨기게 된 것이었다.

    쫓기던 중 당시 세 살이었던 형이 죽었고, 청살회에서 둘째인 자운을 낳으셨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열흘 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분명 그때 어머니에게로 가려고 작정하셨던 게다.

    자운은 가끔 구름 위 하늘을 바라본다.

    그 너머에서 지켜보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한다.

    자운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청살회주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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