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점소이의 안목으로는 노공과 좌염의 무공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기에 아무래도 무인보다는 유림 쪽의 인사로 본 것이었다.
“옥헌장에 무슨 문제라고 있느냐?”
점소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그곳의 노부인께서 간악한 무리들에게 납치되어서는 안타깝게도 매장을 당하셨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옥헌장의 장주이신 옥청정 나리께서 사악한 무리를 대로에서 참살하는 일이 있었습지요. 그 일 후론 옥헌장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고, 모두들 애도하는 마음을 품고 있답니다.”
노공과 좌염의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본 점소이는 다시 한 번 복유장을 추천했다.
“아마 그곳에 가면 열흘 가량 묵어 가시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노공과 좌염이 놀란 것은 멀쩡히 노부인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당했다는 이야기와 간악한 무리들까지 처형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거참 괴이한 일이로고…….’
그는 보이지 않게 갸우뚱한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허, 옥헌장이 상심에 젖어 있겠군. 그래서야 객을 맞을 겨를이 없겠지.”
“장주께서는 후덕하신지라 정주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요.”
“그래, 그렇겠군.”
점소이는 더 이상 질문이 없자 눈치를 살핀 후 물러갔다.
형벌당주 좌염은 점소이가 저만치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술을 한잔 들이키며 말했다.
“장로님, 아무래도 좀 폭넓게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거의 반 죽여놓으려던 애초의 계획은 방향은 이로써 조금 수정되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혹시 노파가 거짓으로 옥헌장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객잔을 나온 노공과 좌염은 그뒤로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옥헌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갔다.
세간에 퍼진 옥헌장의 인심이며, 옥헌장의 장주가 어떤 사람인지, 노부인의 모습은 어떠한지 등등 다양한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했다.
급작스럽게 옥헌장에 대해 묻는 일련의 과정들은 자칫 옥헌장 사람의 눈에 띌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둘은 객잔에서 나온 뒤로는 각기 반대방향으로 진행하였고, 아주 드문드문 묻고, 시간을 넉넉히 들여 의심을 살 만한 여지를 만들지 않도록 힘썼다.
결과적으로 옥헌장에 대한 내용들은 크게 점소이가 말한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다. 대신 추가적인 내용으로는 노부인의 인상착의가 일치한다는 점과 노부인이 거의 5년 전부터는 바깥출입이 없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노인네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건 확실하군요.”
“그런 셈이지. 바깥출입이 없었다는 5년 전이 치매가 시작된 때일 테고 말이야.”
멀리 옥헌장이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앉아 두 사람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현 장주가 노파의 아들인 것은 확실한데 그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름에 물난리가 나거나 겨울에 곡식이 없을 때는 늘 앞장서서 도움을 줄 만큼 모범이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옥헌장이 정주에서는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라고 했었지?”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음…….”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
잠시 옥헌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오늘밤에 녀석들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자구.”
좌염은 이 말이 단순히 무공을 알아보자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은(銀)과 금(金)으로 두른 집안들은 지켜야 할 것이 많고, 또 잃고 싶지 않기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호위무사들을 두게 된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무사들의 수준도 높아지고 낮아지니 현재 옥헌장의 성세로 보아서는 결코 하찮은 무인들이 거할 리 만무했다.
물론 노공과 좌염은 누구라도 거칠 것이 없었으나 지금 상황은 일 대 일의 격전이 아닌 은밀함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효과적인 침투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자, 가게.”
“그럼.”
좌염은 짧게 답한 후 복면을 뒤집어쓰고 옥헌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가 할 일은 적당히 요란을 떨어 호위무사들을 격동시켜 되도록 많은 인원을 외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훌쩍 담을 넘은 좌염은 다시 안쪽으로 통하는 몇 개의 담을 넘은 후, 기둥을 타고 중앙 전각 위로 올라섰다.
마치 도둑고양이마냥 미끄러지듯 지붕을 지나던 그의 걸음이 일순간 멈춰 섰다.
푸석!
기와장이 깨지는 소리는 작았지만 사위가 정적이 깃든 한밤중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즉시 바닥에 엎드린 좌염의 주위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누구냐?, 웬놈이냐? 따위의 말들은 아무도 외치지 않았다.
대신 말을 한 것은 그들의 몸이었다. 오로지 이들의 사명은 원래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상황을 정리하면 된다는 듯 좌염을 향해 짓쳐 들었다.
좌염은 엎드린 몸을 앞쪽으로 튕기듯 솟구치면서 장력을 뻗었다. 물론 그는 고작 삼 할 정도의 힘만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앞쪽의 두 명을 물러나게 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어두운 밤 공기가 좌염이 내뻗은 장력과 두 호위의 장력에 순간적으로 공간이 물컹거리며 왜곡되었다가 회복된 사이, 두 호위는 지붕에서 이탈해 지면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져 내렸다.
언뜻 보기에 두 호위가 크게 손해를 본 것으로 보였으나 사실은 그다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만일 이번 장세의 교환이 평지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뒤로 대여섯 걸음 정도를 물러섰을 것이나, 그들이 선 곳에서 뒤로 세 걸음은 지붕이 없는 허공이었던 탓에 두 호위는 그것을 인지하고 좌염의 장력을 해소하기 위해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런 탓에 두 사람은 지붕에서 바닥으로 발이 닿는 순간, 다시금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지붕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이것은 매우 고명한 수법으로 받은 바 장력의 힘을 새롭게 지면을 박차는 힘으로 환원한 것인데 결코 간단히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름의 한 수를 보인 것이었으나 정작 상대가 고작 삼 할 정도의 힘밖에 기울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들이 올라섰을 때는 이미 좌염은 뒤쪽에 세 명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좌염은 삽시간에 십여 수를 교환한 후, 진룡퇴법(進龍腿法) 중 신룡풍미(神龍風尾)의 수법을 연달아 세 번 펼쳐 세 사람을 물리친 후 그대로 신형을 날려 전각의 입구 쪽으로 뛰어내렸다.
그곳은 옥헌장의 장주가 머무는 처소였기에 호위들은 지체치 않고 그 뒤를 따라 내렸다.
좌염은 신형이 땅에 닫기 전 심장을 압박하는 검의 기세가 쏟아지자 허공에 뜬 채로 몸을 꺾어 검격을 피해냈다.
달빛에 빛나는 세 개의 검신은 상대를 격살시키지 못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연이어 쏟아졌고, 거기에 더해 위로부터 다섯 호위가 장력을 퍼부으며 내려오자, 좌염은 오른손을 들어 장력의 회오리를 안겨준 후,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호위들은 장력을 해소하기 위해 잠시 멈칫했으나 한 명만을 남겨둔 채 곧바로 일곱 호위가 그의 뒤를 맹추격했다.
‘흐흐, 어서 오렴, 어서.’
막상 부딪쳐 보니 굳이 유인작전을 쓰지 않고서도 장로님과 함께라면 잠깐 사이에 소리없이 모두를 제압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획이 계획이니 만큼 원래대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부지런히 유인해 냈다.
혼자 남게 된 호위는 혹시 모를 제2의 침입자를 대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기도 했다.
침투한 자의 무공이 실로 대단했기에 그런 자라면 필시 혼자의 힘만으로도 옥헌장의 호위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문득 전면 가득 밀려오는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소리나 기척도 느낄 새가 없었다. 그저 정면을 응시하던 두 눈이 적을 확인했다 싶을 때는 이미 적은 코앞에 이르러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가더니 번개같이 도를 뽑아 그어갔다.
‘베었다.’
도선(刀線)이 달빛에 명확이 반사되어 허공에 그려졌다.
‘헉!’
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도를 그어 가는 진보연환(進步連環)을 통해 두 토막으로 자르고 다시 되돌아와 수직으로 쳐 올리는 회중포월(懷中抱月)로 네 토막을 만들려 했건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의식할 사이도 없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언제 점혈 당했단 말인가?’
어느새 마혈과 아혈까지 찍힌 그는 회중포월을 막 시작하려는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우뚝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침입한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기척도 숨결도 느낄 수가 없자, 언제 어느 때 급작스럽게 머리가 날아갈 지 모르는 두려움에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점혈한 이는 물론 노공이었다.
속전속결로 호위를 제압한 그는 이내 미끄러지듯이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자는 단 한 명 정도, 지근 거리에서 보호하고 있을 그림자 무사.
드러난 호위들의 수준을 보건대 그다지 위협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생과 사의 갈림은 지형과 시간 그리고 작은 행운들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노공은 오감을 극대화시켜 나아갔다.
‘뭐지?’
그는 내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옅게 풍기는 피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피 내음은 나아갈수록 점점 짙어져갔기에 노공은 이내 이곳에 호위따위는 없다고 판단했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몇 가지 의문이 뒤따랐다.
좌염이 나타나면서 가로막던 여덟 명의 호위의 행동을 보건대 그들은 전혀 내전 안의 피 비린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윽고 피 내음을 쫓던 노공이 이른 곳은 침상이었다. 등잔불에 드러난 침상의 광경은 붉은 피가 흥건한 상태였고, 피의 주인은 가슴이 파헤쳐진 채 참혹한 죽음에 이르러 있었다.
등잔불을 가까이 가져가 동공의 상태와 체온 그리고 몸 이곳 저곳을 살피던 노공은 죽은 지 고작 한 시진 이내라고 판단했다.
‘이거 고약하군.’
노공은 재빨리 주변을 뒤져 또 다른 시체가 없는 지 확인했다. 더불어 격전의 흔적을 샅샅이 살폈지만 어디에도 싸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시체나 격전의 흔적이 없다라… 그림자 무사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인가?’
노공은 황급히 밖으로 나가 점혈해 놓은 호위무사를 들쳐 메고는 침상 앞에 내려놓고 물었다.
“여기 죽어 있는 사람이 누구냐?”
호위무사가 눈을 부릅뜰 뿐 아무 말이 없자, 그때서야 아혈이 찍혀 있다는 것을 인지한 노공이 아혈을 풀어주었다.
“이 죽일 놈아, 네가 감히 장주님을 죽이다니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호위무사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들에게 장주는 존경받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자가 장주란 말이더냐?”
정녕 노공의 놀라움은 호위무사 못지 않았다.
노파를 생각해서라도 장주가 죽는 일은 없어야 했다. 또한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냐는 것이었다.
“이 가증스런 놈이 어디서 발뺌을 하려는 거냐? 무풍님만 계셨어도. 흑흑…….”
“무풍이란 자는 어디에 있느냐?”
노공은 무풍이란 자가 바로 그림자처럼 따르는 호위무사라고 생각했다.
물음에 아무 답이 없자, 노공은 호위의 손을 붙잡고 장주의 시신을 만질 수 있도록 했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을 감지한 호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런, 도대체 누가?”
눈앞의 복면인이 살인자라고 하기엔 시체는 너무도 싸늘했다. 혹여 특수한 음한지공을 통해 시체의 온도를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만 강한 무공을 소유하고, 복면까지한 침입자가 굳이 내가 죽이지 않았노라고 강변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장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살인자는 그림자 무사다.”
“그, 그는 한 시진 전에 잠깐 다녀온다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장주님의 명을 받들어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건만… 그가, 어찌 그가…….”
“살해된 시각과 일치하는군. 내가 여기 온 것은 너희 장주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말을 하면서 노공은 마혈마저 풀어주었다.
혹시 급작스럽게 달려들면 어쩌나 싶었지만 호위는 노공은 보이지도 않는 듯 죽은 장주의 팔을 붙들고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흐느꼈다.
그 순간 노공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노공이 바라보고 있는 건 죽은 장주 옥청정의 턱 부분이었는데 그쪽이 미세하게 들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건 틀림없이 인피면구의 흔적이었다.
‘설마 가짜였단 말인가?’
즉시 턱 아래 부분을 잡고 들어올리니 그대로 따라 올라왔다.
그 광경을 옆에서 제지하려던 호위는 그럴 사이도 없이 인피 한 장이 벗겨지면서 전혀 엉뚱한 사람의 얼굴이 나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 장주님은 어디 계시단 말인가!”
그로선 믿기 힘든 일이었다. 목소리부터 습관 하나하나까지 어느 것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었건만 도대체 언제 어떻게 장주로 둔갑을 하였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노공은 인피면구를 발견함으로 인해 장주를 살인한 범인으로 지목했던 그림자 무사에 대한 혐의를 풀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인 건 장주가 아니라 가짜 장주를 죽였을 뿐이며, 어쩌면 지금쯤 장주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그동안 의문시되었던 여러 내용들이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첫째로 늙은 어머니를 버린 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가짜라면 치매에 걸린 늙은이가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