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93화 (93/125)
  • # 93

    노공의 말은 아무도 듣는 이가 없으니 이는 마치 바다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아들을 멈추게 해주십시오.”

    상념에 젖어 있던 노공은 문득 들려온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주위에는 노파 외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이목을 감추고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라, 정작 말을 걸어온 이가 노망든 노파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같은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차이가 존재했지만 소리의 진원지는 분명 노파였다.

    “더 이상 그 아이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노공은 이 노파에게 깊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금은 잠시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온 상태임이 틀림없었다.

    “무슨 사연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그 아이는…….”

    거기에서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금 정신을 잃고 스르르 옆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보오. 정신 차리시오.”

    ***

    12. 어머니의 마음

    항상 노공이 돌아올 때는 귀한 식물들이 들려 있었던데 반해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비슷한 연배의 노파와 함께 돌아온 것에 문주 심온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문도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기도 한 것이 이제껏 노공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그의 신부는 꽃과 식물들뿐이라며 입버릇처럼 말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떡 하니 노파를 데리고 왔으니 저마다 한 소리씩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 우리 장로님이 이제 장가갈 모양일세. 얼씨구!”

    심온의 반응에 힘입어 뒤이어 온갖 갈채와 억측들이 쏟아졌다.

    “진짜 꽃이로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콩깍지가 씐 눈에 비친 여자지.”

    “도대체 얼마나 마음씨가 고운 분이실까나?”

    “아무렴, 여자는 역시 마음이 고와야지.”

    “하하, 이거 아무리 그래도 의외로 취향이 독특하신걸.”

    이에 노공은 안색 하나 변함이 없이 모든 말들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노파마저 주변을 초월하는 경지를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곁에서 한마디씩 쏟아내던 이들은 노파의 한 마디에 삽시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오빠! 사람들이 왜 이래? 내가 좋은가 봐. 내가 예뻐서 그런가 봐.”

    “허허허, 그렇다마다.”

    오로지 태평한 건 노공뿐이었다.

    노공이 노파를 데리고 본문으로 돌아온 것은 그녀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그녀는 치매가 심하였으나 하루 중 두세 번 가량은 짧은 시간이나마 제정신을 차렸는데 그때가 되면 전혀 다른 기품과 간절한 말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러나 문제라면 그 시간이 너무나 짧다는 점이었다. 거의 한 문장 가량을 넘기는 일이 없었고, 그 내용 또한 여지껏 계속 반복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더이상 그 아이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또는,

    ‘원래 그런 아이는 아니었답니다. 지금이라도 멈추게 해야 합니다.’

    등으로 아들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이런 까닭에 노공은 관에 맡기려는 생각을 접고 노파와 함께 돌아오게 된 것이다.

    본시 후흑문은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곳이니 만큼 상대의 의뢰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무일푼의 의뢰라지만 중요한 것은 의뢰의 경중이지, 은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었다.

    노공은 그녀의 정신이 온전치 않으나 고매한 의술의 경지를 이룬 매사괴의(每事怪醫)라면 비록 완치까지는 어렵더라도 그녀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시간을 길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 심온은 즉시 매사괴의에게 명해 그녀를 치료하여 어떤 사연으로 버려지게 된 것인지, 또 그 아들의 죄가 어떠한지를 알아내라 명했다.

    “거참 답답하구만.”

    심온은 매사괴의의 보고를 듣고는 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툭툭쳐 댔다. 그건 매사괴의 옆자리에 앉은 노공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치료를 나중에 할 걸 이라는 아쉬움이 남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감춰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매사괴의의 말인즉 치료는 성공적이어서 거의 하루 중 반나절 가량은 멀쩡한 정신으로 생활하게 되었는데 노파가 아예 입을 다물고 물어도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니 차라리 단편적이나마 한마디씩 던지던 상황이 더 낫겠다 싶은 것이다.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먼길을 돌아가는 수밖에.”

    심온이 이와같이 운을 떼고는 말을 이었다.

    “최대한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을 취합해 본 후 노파의 염려를 줄여주도록 해보자구. 첫째, 그녀는 버려졌다. 누가 버렸을까?”

    “아들일 겁니다. 그 부근 마을에서는 노파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 먼 곳에서 일부러 신중산에까지 이르러 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노공이 답했다.

    “맞아. 아들일 거야. 그럼 아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해달라는 뜻은?”

    이 말엔 매사괴의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입을 닫아버린 것은 필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만큼 큰 죄를 짓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여기에 노공이 말을 덧붙였다.

    “아마 지난날 불쑥 한마디씩 던졌던 것은 의식 깊은 곳에 계속 메아리치던 말이 정신이 온전해지자마자 튀어나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많아지자 도리어 어머니로서 보호 본능이 작용한 듯싶습니다.”

    “그렇지.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럼 이렇게 해보자구.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겠다고 이야기를 해봐. 그를 막기만 할 테니 아무 근심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야. 만약 여기서 아들 생각에 입을 닫고 있는다면 그건 사실 진짜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설득해 봐.”

    “알겠습니다.”

    심온은 두 사람이 대답과 함께 내전을 나서자 잠시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열 달 동안 핏덩이를 뱃속에 두고 자신의 영양분을 다 쏟아주고,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으로 해산하여,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 어린것의 배설물과 토사물, 온갖 난장판을 다 받아주면서도 어머니는 아무 불평도 없이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식은 어머니가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면 무거운 짐짝처럼 여기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또 용서하시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면서…….’

    노파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 것은 물론이고 그것이 안 되자 사정도 해보고 심지어 공갈협박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매사괴의가 혼신의 힘을 쏟은 덕분에 그녀의 치매증세는 날로 호전되었지만 과연 이런 결과가 그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더욱 상심케 하는 것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그녀는 치매가 발동할 때는 그 어느 누구보다 밝은 얼굴을 했으나 정작 정신을 차렸을 때만큼은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공은 답답한 마음에 환사(幻士)에게 섭혼술을 부탁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곧바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정신이 멀쩡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후유증을 고려해야만 하는 방법을 노파에게 시전한다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아 보일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또한 박박 우겨 시행코자 한다고 해도 매사괴의의 반대에 부딪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온갖 수고로 호전시켜 놨더니 말짱 헛일 만들 일 있냐며 핏대를 세울 것이리라.

    강호 상에서 만난 적이라면야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다고 해도 개의치않고 섭혼술을 사용하겠지만 보통 사람에겐 무리였다.

    그녀가 머문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가고, 아무 성과 없이 하루하루가 지날 때 심온이 노공을 찾아왔다.

    “어때 아직도야?”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노공의 얼굴엔 심난한 표정이 가득했다.

    심온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좋아. 그냥 포기해. 노파 앞에선 아예 그 얘긴 꺼내지도 말고 그냥 재밌게 살자구. 그럼 되지. 뭔 걱정이야. 우리도 귀찮은 일 없고 좋잖아.”

    “아니,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엔…….”

    노공은 자신이 데려온 것도 데려온 것이지만 이렇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인지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세상에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정작 치매 노인을 보살피기 위해 데려온 것이 아닌데 이젠 순전히 그런 쪽의 방향으로 고정되는가 싶어 변론하려 했으나 이내 말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어허, 냅두래두. 앞으론 그냥 깡그리 잊도록 만들어줘. 그게 할망구를 위하는 길인 것 같으니까.”

    노공이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심온이 돌아서면서 못을 박았다.

    “이거 농담 아니야.”

    “명을 따르겠습니다.”

    노공은 명을 따르겠습니다,란 말을 뱉어내려 할 때까지만 해도 답답하기만 했으나 막상 그 말을 다 하고 나서는 한가닥 빛이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느낌에 얼굴이 밝아졌다.

    ‘허허, 가끔은 간단히 생각하는 게 이로울 수도 있지. 이럴 때보면 문주님이 대단하단 말이야.’

    사람의 마음이란 묘한 구석이 있다. 싸움을 일례로 들어봐도 주위에서 말리면 더욱 거칠어지고,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을 때는 제풀에 지쳐 흐지부지되고 만다. 누군가가 붙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거칠어질 수 있고, 주위의 안절부절못한 시선이 폭력성을 부추기는 것이다. 하지만 말리기는커녕 무표정하게 주위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한다면 지독한 원수가 아니고서는 막상 싸우기가 뻘쭘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노파의 마음엔 이런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속마음을 열어보려 노력했던 이들이 이젠 아무 궁금증도 없는 사람마냥 대해 왔기에 도리어 그녀의 마음에 초조함이 일고 만 것이다.

    노공은 물론이고, 시끌시끌한 담유설이 들락거리고, 한번씩 심온까지 가세해 떠들썩하니 요란을 떨어대면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전에는 자식을 위한다는 보호 본능에서 말을 아꼈으나 지금에 와서는 과연 이대로 버려 두는 것이 아들을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그녀는 결국 보름 정도가 지나 스스로 입을 열었다.

    “정주의 옥헌장이 내가 머물던 곳이라오. 그 아이는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내가 노망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칠게 변하더니만…….”

    그녀는 한동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엔 아들에 대한 원망보다는 왜 명이 이토록 길어 아들을 힘들게 했는지 스스로를 자책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노공이 듣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다.

    “일전에 말하길, 아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말려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그는 당시 상당히 거칠고 불쾌한 느낌을 받은 터였기에 단순히 어머니를 버렸다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고, 그것이 알고 싶었다.

    “세상에 중한 죄가 많이 있겠으나 제 부모를 버린 것만 하겠습니까? 그 아이가 심령이 상하고 그로 인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갈까 그게 염려되기 때문이지요.”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노공은 뭔가 큰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너무나 상식적인 답변이 나오자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려온 일이니 만큼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염려 마시오. 그 마음을 돌이켜보리다.”

    “대인의 은덕 어찌 갚을 수 있을는지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공은 즉시 이러한 내용을 심온에게 보고하고는 정주로 가서 이 일을 처리하겠노라고 밝혔다.

    “좋아, 정주면 여기서 멀지도 않으니 금방 다녀올 수 있겠군. 혼자 가면 적적할 테니 형벌당주와 함께 가도록 하지?”

    형벌당주와 함께 가라는 뜻은 가서 적당히 밟아주고 오라는 뜻이었다.

    노공 또한 같이 가면 말동무도 되고 좋을 것 같아 흔쾌히 뜻을 받들었다.

    ***

    13. 인피면구의 비밀

    형벌당주 좌염과 함께 정주에 도착한 노공이 옥헌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옥헌장은 꽤 큰 장원이었으나 사람의 오고 감에 있어서 별로 특색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일단 술이나 한잔하지.”

    좌염의 물음에 노공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좋지요.”

    좌염은 노공이 그저 술이 당겨서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물은 건 곧바로 들어가서 주리를 틀 것이냐는 것이었는데, 노공은 일단 이 부근에서 옥헌장이 어떠한 곳인지를 탐문하고 정보를 취합해 보자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별로 들지 않은 객잔을 골라 들어간 둘은 술과 안주로 쓸 만한 음식을 주문하여 마신 후, 추가로 주문하면서 점소이가 가져올 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술맛이 아주 좋구나.”

    “감사합니다. 안주를 푸짐하게 드렸으니 천천히 드시다 가십시오.”

    “잠깐 물어볼 게 있네만.”

    곧바로 돌아서려던 점소이가 얼른 허리를 굽혔다.

    “말씀하십시오. 소인이 아는 것이라면 성심껏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부근의 장원에서 며칠 신세를 질까하는데 어디가 좋을지 모르겠군. 오는 길에 보니까 옥헌장이 있던데 그곳은 어떤가?”

    대개의 행인들은 객방에서 묵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학문에 능하거나 무예가 출중한 이들 중에는 시정의 객방보다는 장원의 사랑채에 머물며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점소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 두 손님의 행색은 뭔가 특별한 구석이 없어 보였지만 굳이 그러한 판단을 내려야 할 필요는 없었기에 아는 대로만 답을 했다.

    “옥헌장은 무리가 따를 것입니다. 거기보다는 이곳에서 서남 방향으로 약 이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복유장이 있는데 그곳의 장주님께서 시와 학문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라 지나는 선비분들을 맞이함에 각별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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