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91화 (91/125)

# 91

또한 그동안 암암리에 벌어들인 돈은 은하전장을 통해 전국 각지의 보육원과 양로원에 기부되었다.

온 강호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이어 그만큼의 웃음을 터뜨렸다.

다단궁에 아들이 입궁했다고 자랑했던 이들은 집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다단궁에 들고자했다가 여러 사정으로 기회를 놓쳤던 이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경악을 금치 못한 건 소림사 방장이었다.

그는 만천하에 자신의 어리석음과 안목없음을 드러낸 것이라 거의 열흘 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드러누웠고, 급기야 방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로 세상에서 그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10. 추악한 어둠

칠흑같이 어두운 밤.

깊고 깊은 산중으로 두 사내의 걸음은 하염없이 이어졌다. 앞서는 사내는 낫으로 숲의 길을 트고, 뒤에 따르는 사내는 등에 기다란 짐을 든 상태였는데 모양새만 봐도 사람이 들어 있는 보자기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깊숙이 이어지던 발걸음이 일순간 멈추었다.

“이쯤이 좋겠군.”

“그럴까?”

“이 정도면 충분해. 날이 밝아도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구. 게다가 늙은이잖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다보면 도리어 비탈길에서 구르는 화를 자초하고 말걸.”

“하긴, 늙은이가 고함을 지른다 해도 이 정도면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지.”

“아무렴.”

등에 진 긴 보자기를 내려놓은 후 입구를 벗겨내자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파는 작은 키에 비쩍 말랐으며 눈 쪽으로는 검은 천이 가려진 상태였다.

“이제 가볼까?”

“그냥 가려구?”

“그럼?”

“재미 좀 보고 가야지.”

“뭐? 노파하고?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 꽤 재밌었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거지, 재밌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가자구.”

노파를 데리고 온 것은 틀림없이 이 두 사람이었지만 이들은 곁에 놓인 노파가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인 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둘이 낄낄거리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곳으로부터 멀어져갈 때, 노파가 문득 소리를 높여 불렀다.

“오빠들, 어디가?”

두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가 거의 동시에 배꼽을 움켜잡았다.

“푸하하하하… 미친다, 미쳐.”

“크하하하하… 이거 또 시작이구먼.”

“오빠들, 지금 숨바꼭질 하려는 거지? 너무 멀리가면 안 돼.”

노파의 목소리에는 당장에라도 일어나 쫓아갈 기세가 담겨 있었다.

“그럼 이 오빠가 숨을 테니 잘 찾아봐.”

“잊지마. 열을 센 후에 찾아야 한다. 알겠지?”

두 사람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소리를 죽이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달빛도 짙은 구름 뒤로 숨은 어두운 밤, 오직 노파의 곁에는 괴괴한 어둠만이 함께 할 따름이었다.

“사람은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이죠. 낯선 곳에 놓이면 잠시 동안은 혼란을 겪겠으나 곧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알게 되는 법이니까요.”

“아무렴요. 그 환경이 조금 더 편안하냐, 불편하냐의 차이점이 있긴 하나 마음먹기에 따라선 황량한 사막도 푸른 목초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지난밤 작고 볼품없는 노파를 산중 깊은 곳에 놓아두고 온 두 사내는 지금 한 사람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일이 끝난 연후에 받게 될 나머지 절반의 돈을 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의뢰자의 마음에 최대한 죄책감이 머물지 않도록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인간의 적응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논하며, 노파가 산중에 놓이긴 했으나 그 속에서 아주 행복하게 나름의 기쁨을 창조해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마지막 남은 죄책감마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입니다. 역시 암흑쌍계(暗黑雙鷄)의 명성은 괜히 얻어진 것이 아닌가 봅니다. 자, 여기 나머지 돈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의뢰자의 말에 두 사람은 손을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확인은 무슨…….”

“앞으로 또 부탁하실 일이 있거들랑 언제든지 불러주시구려.”

암흑쌍계라 불리운 두 사람의 얼굴엔 순박해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미소만을 따지자면 더럽고 추잡한 일을 대행해 주는 뒷골목의 쓰레기들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무구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두 분을 부를 일이 없어야 하겠으나 세상 일이 꼭 그렇게 됩니까? 일이 생기는 대로 연락드리지요.”

“발이 보이지 않게 달려오리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대행자가 인심 좋은 얼굴로 작별 인사를 고하자 의뢰자도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네, 그럼 살펴가십시오.”

‘이 씨발놈들아. 크크크크크.’

“무풍!”

의뢰자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마치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가만히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형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으나 대답은 명백했다.

“암흑쌍계가 어서 죽여 달라고 재촉을 하는 군요. 난 마음이 약해서 누가 자꾸 간청을 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이런 성정은 버려야 하는데 그게 또 마음대로 되질 않아요. 제가 나쁜 놈이죠?”

“…….”

“그놈들은 나쁜 놈들이에요. 가만히 두면 세상이 썩게 될 겁니다. 그렇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두 마리의 닭이 크게 울지 않도록 주의하시구요. 닭 우는 소리는 아주 질색이랍니다.”

“실행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세요. 그놈들은 내가 사랑하는 모친을 유괴하고 깊은 숲에 방치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아, 그리고 내가 말은 잘 안 해도 늘 고맙게 생각하는 거 알죠?”

의뢰자의 얼굴 가득 안타까움과 연민이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 자연스러움이 그득했다.

암흑쌍계! 갈평과 도충.

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더럽고 추악한 일이었다.

작게는 돈을 뜯어내는 일에서부터 돈을 대신 받아내는 일, 협박, 공갈, 암매장, 암살 등 어둠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면 언제나 환영인 존재들이었다.

어둠의 일들은 더욱 깊은 어둠일수록 작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손을 뗄 수 없는 마력을 지녔다.

초기엔 가끔씩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들이 주로 보고 듣는 것들이 세상의 추악한 모습이다 보니 나중에는 일말의 양심조차 스멀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그렇기도 한 것이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양심을 지키는 이들이 궁핍하게 살다가 결국 힘이 모자라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온 터라 결국 세상이란 혼자 착하게 산다고 하늘이 감복한다든지 하는 따위는 어디 이야기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일뿐이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자, 거나하게 회포나 풀어보자.”

“그야 물론이지. 오늘 죽어보자구.”

“죽어? 크하하하, 그거 좋지.”

두 사람의 발걸음은 이제 막 문을 여는 야월루로 향했다. 이미 점찍어둔 매향(梅香)과 야화(野花)를 붙들고 온몸이 녹아날 때까지 비벼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불끈 힘이 솟았다.

어젯밤 꿈을 잘 꾼 탓인지 야월루의 최고의 기녀라 할 수 있는 매향과 야화는 매력적인 몸짓으로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물론 두 사람이 딸랑거리는 은전 소리가 빗장을 연 것이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그럼 특별히 보내볼까요?”

한 방에서 난잡하게 뒹굴려는 듯 막 덤비려던 갈평과 도충에게 야화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야화는 들꽃이란 이름에 걸맞게 야성적인 여성미를 발산하는 것이 특징으로 어지간한 사내들은 그녀 앞에선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곤 했다.

“오호, 특별히?”

“숲에서 해보는 건 어때요?”

“이야 그거 좋겠군.”

“역시 넌 야화로구나. 매향 너도 그렇게 해보겠느냐?”

분 냄새가 가득한 기방보다 자연 속에서 일을 치른다 생각하니 더욱 흥분되는 두 사람이었다.

“두 분이 원하신다면 마땅히 따라야지요. 하지만 주인 어른께 돈을 더 치르셔야 할 터입니다만…….”

“돈이 문제겠느냐. 어서 가자, 어서 가.”

“호호호호…….”

네 사람의 몸은 벌써부터 끈적대기 시작했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가운데 풀이 누벼지고 그 위로 네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거침없이 뿜어졌다.

갈평의 몸 위에서 허리가 휘어진 채 교성을 내지르고 있는 야화는 이제 거의 절정에 이르기 직전인 모양이었다.

“좋아, 좋아… 이 개자식아… 좀 더 좀 더…….”

야화는 역시 거칠다는 소문대로 관계 중에도 끊임없이 욕을 퍼붓고, 갈평의 머리를 움켜쥐어 거의 뽑아버릴 듯 잡아당기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흑… 이 씨발새끼~”

갈평은 야화와 같은 여자는 생애 처음이었지만 머리가 쥐 뜯기고 욕을 들어도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 어떤 여자보다 색다른 흥분이 뒤따랐다.

“아아아아악~”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은 그야말로 절정(絶頂)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울렸다. 남자란 관계 자체도 좋아하지만 여자를 만족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기쁨을 느끼는지라 갈평은 그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나니까 이 정도로 여자에게서 이런 소리를 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자기 만족이 가슴을 타고 시원스런 전율로 온몸을 흥분시켰다.

“그렇게 좋았어? 역시 야화는 소문대로야. 아니아니, 소문보다 더욱 대단해.”

그러나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의 얼굴엔 당혹이 어렸다.

“뭐, 뭐야?”

어찌된 일인지 흥분에 겨워 허리를 젖힌 그녀의 몸이 돌아올 줄 모르고 여전히 젖혀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허벅지로 무언가 뜨뜻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에 불길함이 가득했다.

아직 저쪽에서는 매향과 도충의 신음 소리가 뜨겁게 들려왔지만 그마저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벌떡 몸을 뺀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야화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등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그곳으로부터 피가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상황 설명은 어느 샌가 나타난 네 검객이 말해 주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누, 누구냐?”

그때 대답대신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푹!

“크억!”

“아악!”

살을 파고드는 단 한 번의 칼질에 비명은 두 개였다. 보지 않아도 매향과 도충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굴까? 그걸 묻기 전에 네가 누구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빠를 것 같은데. 넌 누구냐?”

갈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갈평이다. 암흑쌍계라 불리는 갈평.’

상대의 말은 명확했다.

네가 암흑쌍계라 불리는 갈평이니 네가 저지른 숱한 악행들로 인해 언젠가 보복을 당할 것을 생각지 못하였느냐는 뜻이다.

“이건 보복이 아니야, 배신이다.”

갈평은 이 낯선 칼잡이들이 피해자 측 인물들이 아니라, 추악한 일들을 의뢰한 자들의 수하일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는 이제껏 혹여 신상에 위험이 닥친다면 그것은 의뢰자 측에서 아예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들을 제거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이제 그 일이 닥친 셈이었다.

“글세, 보복일까, 배신일까? 내가 생각할 땐 그저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일뿐인데 보복이나 배신 따윌 들먹일 필요나 있을까 모르겠군. ”

“크크크크크크… 너희들이 숫자가 많고 실력도 꽤 된다고 인정하마. 하지만 나를 너무 과소 평가하는군. 암흑쌍계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헉!”

한껏 여유를 부리던 갈평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좌측 맞은 편에 있던 한 사내가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내용물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곳엔 사람 머리가 들어 있었고, 그는 절대 자신들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안정 장치정도야 제거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그랬다. 상자 속의 인물은 암흑쌍계의 안정 장치였다. 그들 신상에 문제가 발생하여 약속된 기한 안에 연락이 되지 않을 시엔 추악한 의뢰자들의 정체와 의뢰 내용을 까발리도록 되어 있는 암흑쌍계의 숨겨진 동료였다.

이제껏 암흑쌍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숨은 동료 덕이었다. 그런데 이제 안정 장치마저 목이 떨어져 나갔으니 갈평이 느끼는 공포는 극에 달했다.

“매향과 야화, 이 두 년은 돈을 미끼로 삼으니까 역시나 덥석 물더군. 바깥바람을 쐬도록 해보라고 하니까 죽을 줄도 모르고 좋아라하는 것이 아니겠어? 멍청한 년들.”

갈평은 한번 더 깊은 나락으로 추락했다.

방금 전까지 맛본 극한의 쾌락은 사형수에게 베풀어진 마지막 연회인 셈이었다.

“이 더러운 놈들아. 늙은 어머니를 버리라고 한 것은 네놈들이잖느냐?”

그가 발악같이 외쳤다.

“늙은 어머니를 버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허허, 이런 고약한 놈, 이번엔 생사람을 버리고 온 모양이로구나.”

갈평의 머리로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며 순간 몸을 비틀거렸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제껏 그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신랑 측의 의뢰로 혼사 날을 앞둔 신부를 겁탈한 것, 친형을 죽이라는 청부, 친동생을 죽이라는 청부, 새어머니를 먼 다른 지방으로 빼돌려 기루에 팔아넘기라는 의뢰, 약장수로 둔갑해 은밀히 독약을 제조해 준 일도 있었다.

그는 안전 장치의 파괴, 동료의 죽음, 기녀들의 꾀임 등 너무나 완벽한 함정에 빠진 나머지 본신의 무공을 쓸 생각도 못했다.

물론 아무리 흥분에 휩싸였다고 해도 몸 위에 올라타 있던 여인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충격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맞은편에 선 사내가 오른쪽 수하인 듯 보이는 이를 향해 짧게 말했다.

“혀를 잘라라.”

기루들이 늘어선 길엔 저녁이 되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해진다.

붉고 푸른 등불은 술 한잔을 그리게 하고, 욕념을 불러일으키니 저절로 발걸음이 끌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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