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네 분께서는 뭔가 착각을 하셨던 게로군요. 다단궁에 입궁을 원하는 자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자에 한한다는 내용은 미처 못 보신 모양입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으나 이후로는 동행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사람은 비로소 시험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거의 한 시진 가량 험한 산길을 걸어오는 동안 두 노인이 쉬었다가자, 힘들어 죽겠다라는 말을 연신 내뱉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두 노인을 보니 연신 다행이란 말을 하면서도 죽음의 위기를 맞았던 사람의 혈색치곤 너무 안정적이라 다다궁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뜻은 없소이다. 나는 진심으로 다단궁의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오.”
“해코지하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무공이야 다단궁주의 손가락 하나조차 감당하지 못할 터인데 무공의 유무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그러지 말고 우리도 가게 해주시오.”
“처음부터 무공을 익히는 사람보다 우리 같은 사람이 더 낫지 않겠소.”
“제발 부탁하외다.”
네 사람은 원한다면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빌 수 있다는 듯 애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해가 있는 듯하군요. 위대하신 다단궁주님께서 무공의 유무를 자격요건에 넣으신 것은 다단궁의 무공이 워낙 특별하여 다른 무공들과는 결코 섞이거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라도 기존의 무공을 지닌 상태에서는 곧바로 주화입마를 당하게 되어 비참한 결과만을 맞이할 뿐이라, 이처럼 단서를 단 것이니 네 분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중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이 깃든 음성에 네 사람의 얼굴은 씁쓸하게 변했다.
여기에서 억지로 떼를 쓰고 강압적으로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다단궁주의 입김에조차 맞설 수 없는 일이니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이 무의미할 따름이었다.
“알겠소.”
그들이 왔던 길로 터벅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담유설이 심온에게 전음을 발했다.
―와 역시 우리 문주님 눈치가 빠르군요.
―아, 뭐 내가 눈칫밥을 보통 먹었어야지.
―근데 어떻게 눈치챘죠?
―계속 걸어오는 동안 힘들다 힘들다 말은 하는데 자세히 보니 전혀 힘든 게 아니었거든. 게다가 넘어질 때 너무 자연스러웠고, 약간 과장된 느낌도 있었고 말이야.
―이 녀석 아주 장한 걸. 너, 다시 봐야겠다.
막판에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전음에 심온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하하, 너 화났냐?
조롱이 마쳐진 순간 무사의 음성이 울렸다.
“자, 계속 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심온만은 굳어버린 채 거칠게 내리 꽂히는 폭포를 바라보았다.
“거기 안 갈겁니까?”
“갑니다.”
무사의 말에 심온은 한숨을 내쉬고는 힘겹게 걸음을 옮겨 뒤를 따랐다.
폭포 안쪽의 동굴을 지나 약 일식경 정도 지나 일행은 커다란 광장에 도착했다.
이미 그곳엔 백여 명 가량이 먼저 와서 줄을 맞춰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애써 태연한 척하는 가운데서도 불쑥 불쑥 흥분이 드러나 다단궁에 대한 흠모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의 흥분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광장에 앉은 상태에서 전면을 바라보노라면 저만치 성벽과 그 너머로 거대한 전각들이 위용을 뽐내며 버티고 서 있었기에 실로 다단궁을 선택했던 자신들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험한 산중에, 그것도 한 채가 아닌 수십 채의 엄청난 전각이 지어졌다는 것은 다단궁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그들 중 일부는 다단궁주의 놀라운 무위를 직접 본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은 다섯 냥을 지참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의심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산속에 지어진 휘황찬란한 전각들을 보자, 의심은 봄 눈 녹듯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다단궁은 이미 부(富)를 넘치도록 지니고 있다. 나의 은 다섯 냥은 마치 바다에 양동이물을 한 번 붓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다단궁주의 무공만큼이나 이미 그들이 갖춘 것들은 완벽에 가깝구나. 내 어찌 연약한 마음으로 의심을 하였을까.’
대게 이런 심정으로 그들은 이제 은 다섯 냥이 전혀 아깝지 않은 마음들을 품었다.
지금은 광장에 앉아 있지만 얼마 뒤에는 성벽 너머 전각들 속에서 하늘을 놀라게 할 무학을 배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 다섯 냥의 수백 배에 이르는 재물까지라도 얻을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심온의 무리가 자리를 잡은 후 그 뒤 세 무리가 더 도착한 후에 약 반 장 높이의 단 위에 한 사람이 올랐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본인은 다단궁의 수석장로인 갈존광이라 합니다.”
갈존광이 자기소개를 한 후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엉겁결에 박수를 치게 된 심온과 담유설은 왜 박수를 치는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뒤쪽에 앉은 두 사람이 작게 소곤거리는 대화를 듣고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석장로라면 다단궁의 2인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저리도 겸손하다니…….”
“그러게 말이네. 우리는 제대로 찾아온 듯하네.”
이들은 이미 감명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지라 작은 배려들이 모두 기쁘기 그지없었다. 반면 심온과 담유설은 정보를 캐러 왔기 때문에 그런 순수한 감동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석장로 갈존광의 말이 이어졌다.
“괜한 미사어구들을 사용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진 않겠습니다. 이미 본궁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을 터이니 지금 바로 본궁의 입단에 합당한지 여부를 가리는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앉은 자리는 아홉 개의 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앞으로 본궁의 아홉 장로가 차례대로 여러분들을 심사할 것입니다. 혹여 희망과는 달리 좋지 않은 결과를 만나게 되시더라도 이해하길 바랍니다. 어쩌면 그분들에게는 본궁보다 더 커다랗고 엄청난 인연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리 된 것일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광장 전체로 징소리가 울려 퍼졌고, 바로 심사가 이루어졌다.
총 삼백 명의 응시자 중 합당하게 여김을 받은 자는 이백사십삼 명이었다.
탈락된 자들은 주로 무공을 익힌 흔적을 지닌 자들이었고, 몇몇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다행히 심온과 담유설은 통과되었는데, 심온은 무공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고, 담유설은 역용에 능통한 자답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탈락자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가 있은 후, 그들이 인도에 따라 돌아가게 되자, 수석장로 구존광이 다시 단 위에 올랐다.
“어려운 길을 통과한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진대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본궁의 가족이 되었으니 이미 전생에는 더한 관계였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더 치하한 후, 결론을 지어갔다.
“앞으로 여러분은 험한 수련의 나날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나날을 지나 영광을 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모두가 뜨거운 함성으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불 속에라도 들어가겠습니다!”
“다단궁 만세!”
“천세 만세 다단궁주님!”
열렬한 반응에 구존광은 흡족한 듯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온 강호는 평화와 번영만이 수놓아질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께 앞으로의 과정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은 먼저 고향에 보낼 서신을 작성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다단궁의 배려가 절로 고맙게 느껴진 탓이다. 아무 연락이 없다면 가족들은 혹시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하고 큰 근심 속에 지낼 것이 분명했다.
탈락된 것이 부끄러워 차마 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가족들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서신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니 기쁘지 한량없었다.
“서신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작성해 주셔야 하며 문장마다 큰 기쁨을 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모든 이웃들에게 알려 크게 잔치를 베풀라고도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최고의 조직에서 최고의 무학과 최고의 보물을 얻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들은 벌써 강호의 영웅이 되어 산과 산 사이를 날으며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거기에 보는 것만으로 숨이 멎을 듯한 미녀를 반려자로 삼고, 악한 자들을 무릎 꿇게 할 것이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을 확신했다.
거기까지 이르는 동안 아무리 힘든 역경이 찾아온다 해도 기필코 극복하리라 마음먹었다.
“자, 이제 지참금으로 가지고 온 은 다섯 냥을 제출하시면 다단궁인임을 증명하는 다단패와 서신을 작성할 지필묵을 드릴 것이니 모두 성심성의껏 작성해 주시길 바랍니다.”
은 다섯 냥과 맞바꾼 다단패는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크기였고, 그 안에는 삼각형의 모양이 음각되어 있었으며 세부적으로는 그 안에 사람의 형상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
9. 다단의 뜻
연회는 칠 일 동안 베풀어졌다.
일생에 단 한 번 맛볼 수 있을까 싶은 음식들이 대거 쏟아지자 새로운 궁도들은 저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게 이런 행운이 오다니… 이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내 평생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보긴 처음이로다.”
투철한 사명감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나름의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는 심온과 담유설도 기분이 좋기는 매한가지였다.
연회장에서 쉼없이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과 꿀맛 같은 음식들이 하루 종일 곁을 떠나지 않으니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연회가 마쳐진 후의 일정은 기본 교육 과정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교육은 총 3차로 나뉘는데 1차는 다단궁의 역사와 다다궁이 이루어가는 강호를 향한 큰 꿈에 대한 것으로 나흘간 이루어지며, 2차는 예절에 대한 내용으로 사흘간, 제3차는 다단궁의 무공 이론과 가장 기본이 되는 기초 무공 전수가 거의 이십여 일 넘게 이루어진다고 했다.
모두들 설레이는 마음으로 교육을 기다릴 때, 그날 아침에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아침 식사가 마쳐진 뒤 수십 명이 뛰쳐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음식에 독을 타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이냐?”
“망할 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다 싶더니만 역시 뒤가 구렸던 거로구나.”
“어서 해독약을 가지고 와라. 어서.”
그러나 희한하게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소리치는 자들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독에 당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중 하나가 고함치는 이에게 가만히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겁니까?”
“내력이 모아지지 않소이다. 저놈들이 음식에 산공독을 푼 것이 틀림없소. 망할 놈들.”
산공독이란 오로지 내공을 지닌 자를 무력화시키는 것일 뿐 인체엔 별다른 해악이 없는 독이었다.
심온과 담유설도 이미 산공독의 투입 여부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담유설은 즉시 발작하려 했지만 심온의 만류로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진정해. 이건 또 하나의 시험일 뿐이야.”
심온의 설명대로 이것이 무공을 지닌 자를 구별해 내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었다는 것은 곧바로 증명되었다.
한동안 소란을 피우던 이들이 잠잠해진 건 누군가가 외친 한마디가 쇠망치처럼 그들을 흔들어놓은 뒤였다.
“무공을 지닌 상태로 들어온 너희들이 잘못한 거지. 이제 집에나 가라.”
그리고 바로 나타난 다단궁의 무사들에 의해 그들은 정중히 추방되었다.
“본 궁의 무공은 이제껏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인지라 몸 안에 이미 다른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분들에겐 치명적인 해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부디 서운하게 생각지 마시고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열흘이 지난 뒤에는 저절로 독효가 사라지고 본래 상태로 돌아올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뒤 몇 명이 반항하긴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력이 상실된 그들이 힘을 쓸 수 없었는 데다 애초부터 속이고 들어온 것이었기에 마지못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1차 교육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시간에 시작되었다.
교육 내용은 이미 밝힌 대로 다단궁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다단궁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조사인 절대천검이 세웠으며, 이제껏 암암리에 강호의 어둠을 물리쳐 왔으나 작금에 이르러선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 다음 다단궁인의 소양에 대한 2차 교육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던 다단궁의 무학을 전수받는 3차 교육의 날이 밝았다.
본인을 백 장로라고 밝힌 대머리 노인이 교육 담당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전면을 응시하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에 삼각형을 그렸다.
“이 모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의문은 가득했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담유설은 막 손을 들려 하다 심온이 손을 붙들고 인상을 쓴 덕에 호기심을 가라앉혔다.
백 장로는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무당의 태극권이 태극의 형상과 그 이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처럼 다단궁의 무학은 삼각형이 기본이 됩니다.”
궁주가 그러했듯 백 장로도 결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공대하면서도 결코 어색하거나 유약해 보이지 않는 겸손한 당당함이 배어났다.
“그러나 태극의 이치는 삼각의 원리에 비하자면 마치 어린아이의 놀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하나씩 삼각의 위대한 원리를 설명하겠습니다.”
무당의 태극권이 어린아이의 장난과 다를 바 없다는 말에 모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