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88화 (88/125)

# 88

구대문파에 어렵게 갓 입문한 이들 중에는 다단궁이 왜 이제야 등장한 것인지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고, 개중에 심한 경우는 아예 파문을 요구하는 일까지 생길 정도였다.

비록 자격 요건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에 한한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익힌 지 얼마 안 된 무공이야 적절히 감추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흠모에 가장 큰 문제는 지참금의 액수였다.

은 다섯 냥이라면 일반 가정이 이 년을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역시 훌륭한 무림문파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다단궁 정도라면 은 다섯 냥을 투자해도 나중에는 은 백 냥은 건져올 수 있을 것이라며 빚을 내서라도 다단궁에 들어가야 한다고 외치는 이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천하는 온통 다단궁으로 뒤덮이다시피 했으며, 천하인들의 마음도 다단궁이 모조리 사로잡아 버린 시기였다.

***

항산에서 열린다는 소림과 다단궁 간의 비무에 대한 이야기가 돌 때만 해도 솔직히 후흑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한 상태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단궁이라는 문파는 후흑문의 방대한 정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흑문에게 다단궁은 어쩌다 강호에 발을 내딛은 첫걸음에 엉뚱한 배짱의 결과로 치욕을 면치 못할 황당한 문파 정도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래도 강호를 휘도는 소문이 점점 갈수록 커지는 까닭에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리는 지는 알아보자는 속셈으로 두 사람이 파견되었는데 한 명은 자발적으로 나선 방종당주 담유설과 어쩔 수 없이 지목되어 갈 수 밖에 없게 된 형벌당의 말단 적연이었다.

적연은 밥 먹다 우드득 돌을 씹은 표정이 되어 절대 가지 않겠다고 버텼으나 형벌당주 좌염이 노구를 무릅쓰고 날라차기를 선보인 탓에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비록 형벌당에서는 가장 나이가 적은 자였으나 이미 삼십삼 세였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아직 젖내도 가시지 않은 담유설이 당주랍시고 자신의 직속상관인 형벌당주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언짢은 마음이 가득했었다.

비록 후흑문의 문주인 심온 또한 한참 어린 나이이지만 이미 어릴 적에 뼈가 갈릴 정도로 혹독한 수련을 거친 것을 아는지라 어떤 궤변이나 황당함으로 다가와도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담유설은 그야말로 느닷없이 당주로 임명된 경우였기에 그로서는 동행한다는 것이 큰 벌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항산까지 가는 내내 그녀의 주문과 폭언은 쉴 새가 없이 이어졌다.

다리를 주물러라, 어깨가 시리다, 어린 놈의 자식이 인상이 영 버릇없이 생겼다느니, 다리가 아프니까 업고 가라, 등등의 말들로 갈구어대는데 그로인한 심리적 불안 상태가 계속되는 탓에 아침이면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빠지기도 했다.

또한 느닷없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특기인 역용술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가 받는 정신적인 외상은 치명적일 정도였다.

일례로 객점에서 밥을 먹으러 갈 때면 꼭 맞은편에 앉아 추악한 외모로 둔갑해서는 밥맛을 뚝뚝 떨어지게 만들기도 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번화가에서 갑자기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 나쁜 새끼야. 이렇게 이쁜 나를 두고 네놈이 바람을 피워? 그 쌍년이 그렇게 좋든? 그 년이 나보다 얼굴이 이쁘길해, 마음이 착하길 해! 그 잡년의 말씨가 곱기를 해? 내가 어디가 모자란다고 허구 헌날 바람을 피우냐? 게다가 네가 뭘 잘했다고 사람을 패는데? 이 썩을 놈아. 입이 있으면 말 좀 해봐라’ 하는 식이었다.

적연이 뜨악한 표정으로 땀을 삐질거리고 있노라면 주위에서 온갖 족속들이 모여 들어 손가락질하며 조롱과 멸시의 시선을 던졌다.

적연은 모진 고난의 날을 지나 끝내 항산을 두 눈에 담게 되었을 때, 이제껏 당한 고행길이 이제 곧 끝난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어차피 꼭 함께 같은 시간에 복귀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라 미친듯이 서둘러 혼자 달려와 버리면 그만이었다.

적연은 혹시나 항산에서조차 담유설의 미친 짓이 이어지면 어쩌나 싶었지만 대기하는 동안에는 수많은 인파 때문에 별 다른 소동을 부릴 공간조차 없었고, 다단궁주가 등장하고 나서는 그가 예상치 못한 엄청난 무위를 보인 탓에 담유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차마 장난을 치지는 못해 내심 안도했다.

선인봉에서 모든 광경을 목격한 것은 담유설이었고, 적연은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관찰 임무는 담유설에게 맡겨놓고 약간 아래쪽에 쳐져 나무에 등을 기대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황이 종료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들과 뒤에 담유설이 방방 뛰면서,

“대단해, 엄청난 자야. 보고도 내 눈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구.”

라고 외쳐대는 바람에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담유설은 다단궁주에게 받은 충격이 너무도 컸는지 돌아가는 길에는 오직 다단궁에 대해서만 떠들 뿐 괴롭히는 일은 없어, 굳이 도망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적연은 순순히 동행하여 복귀하였다.

대신 담유설이 입을 열 때마다 한 사람을 거론하였기에 적연은 내심 그 사람이 염려되기 시작했다.

“돌아가면 문주하고 같이 다단궁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해야겠어.”

“적연 너도 꼭 옆에서 심각하게 말해야 해. 알겠지? 이건 문주님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라고 말이야, 알겠어?”

심지어 그녀는 거짓 협박을 하기도 했다.

“만약 그렇게 안 하면 혜화에게 네가 나와 함께 항산으로 가는 동안 같이 잠을 잤다고 이야기해 버릴 거니까 알아서해.”

혜화는 적연과 혼약이 약속된 사이였기에 적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은 당연했다.

“아니, 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려는 겁니까? 정말 당주님 미친 것 아닙니까?”

남자가 그런 유형으로 협박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여자의 협박이라니 적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작태였다.

“그러니까 임마, 확실히 약속을 하란 말이야. 알겠어, 모르겠어?”

“아이씨, 알았습니다, 알았다구요.”

“아이씨? 이 자식이 뒤질라고.”

“아, 또 왜 그래요?”

“어라, 욕까지? 네놈이 감히 하극상을 저질러?”

“아이씨, 잘못했어요.”

“이런 망할 놈을… 확 그냥!”

담유설과 적연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복귀하였으나 그보다 더 빠른 신법을 펼친 것은 소문이었다.

더욱이 소문에 이어 다단궁이 제자를 모집한다는 소식까지 전 중원에 삽시간에 알려진 탓에 담유설과 적연이 문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돌아서 있었다.

담유설의 흥분에 찬 보고는 확인 사살에 불과했으며, 심온을 끌어들이는 노력은 굳이 적연이 달리 돕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심온이 성큼 나서서 잠입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탓에 담유설은 환호성을, 적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심온이 다단궁에 잠입한다는 것은 담유설과 함께가 아닌 다른 동행자를 원한 것이었지만 담유설은 분노한 낯빛으로 단도를 쳐들고 당장에 배에 쑤셔 받을 듯이 난리를 부렸다.

“가려거든 내 시체를 묻고 가야 할 것이오.”

결국 심온은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처연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야지, 살아. 같이 가자.”

마음 한편으로는 잠입에 있어 그녀의 역용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위로하는 심온이었다.

***

8. 잠입

오태산(五台山) 아래로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중엔 다단궁에 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지참금을 준비하는 못한 자들이 거의 태반을 이루고 있었다. 혹시나 다단궁 사람들의 눈에 띄어 발탁되거나, 요행히 열정을 높이 평가받아 제자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다단궁의 무사들의 시선은 무관심 그 자체였다.

무사들은 산 입구를 차단하고 허락된 자에 한해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은 다섯 냥을 보여준 후 통과된 이들의 표정은 마치 당장에라도 다단궁인이 된 것만 같은 기쁨이 넘쳐났고, 그것을 멀찌감치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들은 더욱 부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통과된 이들의 숫자가 스무 명이 되자, 무사 한 사람이 그들을 인도하여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도 돈, 저기서도 돈, 돈이 내 발목을 잡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논밭이라도 사놨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집은 이렇게 가난한 걸까?”

“옆집 형은 친척들이 돈을 모아주었다고 하던데 우리 집안은 이게 뭐람.”

부러운 시선들은 이제 한마디씩을 뱉어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개중에는 소리 죽여 욕을 뱉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다단궁 이놈들 아주 악질이구먼. 돈 벌려고 수작질 하는 거 아니냐구. 더러운 새끼들.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사실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한 사람이 대뜸 물었다.

“돈 빌려드릴까?”

“저, 정말이오? 부탁하외다.”

“흥, 방금 전까지 악질이라고 하더니 이젠 들어가고 싶은 게요?”

“그야 홧김에 해본 말 아니겠소?”

“일없소.”

“이놈이 사람을 가지고 노네. 야, 너 몇 살이야?”

“넌 몇 살 처먹었냐. 이 쌍놈아.”

이렇게 한쪽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드잡이질을 하면서 타는 가슴을 풀어냈다.

심온과 담유설은 돌아가는 모양새를 무리들 속에서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줄을 섰다.

차례가 이르고 심온이 은자 다섯 냥을 보이자 무사는 표정없이,

“행운을 비네.”

라고 짤막하게 말하고 다음 사람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미 줄을 설 때, 스무 명씩 끊어서 이동하는 중에 서로 잘려 나가는 일이 없도록 계산을 해놓았었기에 이동하는 스무 명의 무리에 심온과 담유설은 함께 하게 되었고, 숫자가 차자 사십대 초반의 무사가 길을 인도했다.

심온은 함께 이동 중인 다른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십대 초반에서 중반까지가 열 명이었고, 삼십대 후반의 사내가 여섯 명, 오십대가 둘, 그리고 마지막 두 명은 놀랍게도 육십은 족히 넘겼을 법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노인들이 소곤거리며 대화하는 모양새를 보니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들은 늦은 나이에 비슷한 열정을 가진 이성(異姓)을 만난 것이 무척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잘해봅시다그려.”

“그래야지요. 애들이 효도한다고 여길 보내줍디다.”

“좋은 자식들을 두었소이다. 난 할망구 몰래 왔수다. 나중에 깜짝 놀래켜 줄 작정이라오.”

“여직 임자있는 몸이었구려.”

“여기에서는 그냥 총각이라고 생각하시오.”

“이런 응큼한 노인네같으니…….”

마지막 말은 거의 소곤거리는 상태였지만 심온과 담유설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둘은 서로 마주보고는 표시나지 않게 동시에 미소를 머금었다.

―노인네들이 무슨 야유회 나온 것 같은걸.

―그러게요. 저러다 둘 만 놔두면 확 타오르겠는걸요.

―확~ 은 아닐 것 같은데.

―그렇긴 하네요. 크크크…….

거의 한 시진 정도를 걸었을까.

다단궁의 무사가 인도한 곳은 시원스럽게 폭포가 쏟아지는 곳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무사의 말에 연로한 두 노인과 오십대 지원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옆으로 난 작은 틈 사이로 폭포 안쪽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잡고 갈 수 있는 줄을 쳐놓긴 했지만 돌이끼가 앉은 곳은 매우 미끄러우니 각별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길은 한 사람씩 일렬로 진행할 만큼 좁았고,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아래쪽 바위들이나 물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을 듯 보였다. 그러나 견고하게 길게 이어놓은 밧줄이 길을 따라 폭포 안 쪽까지 이어져 있었기에 손만 놓치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발했다.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폭포길을 지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대단한 강호인이 된 기분이 든 것이다. 심온과 담유설도 과장된 감탄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너무 좋구만, 너무 좋아. 이러다 신선이라도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늙어서나마 영화를 누리는구나.”

가장 흥분한 두 노인은 주거니 받거니 흥겹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순간 노파의 발이 미끄러운 이끼를 밟으면서 의지와는 달리 쫙 벌어지면서 중심을 잃고 나자빠졌다. 몸이 느닷없이 축 처지는 바람에 손아귀에 힘이 약한 노파는 그만 밧줄을 붙든 손을 놓치고 말았고, 떨어지면서 앞쪽에 가고 있던 노인의 아랫도리를 움켜쥐었다.

“으어억~”

“뭐야, 크어억~”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움켜쥔 노파의 손아귀 힘에 노인도 같이 무너졌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순간, 뭔가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두 노인의 추락을 방지했다.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노파의 손을 붙들었고, 이십대 후반의 사내는 노인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보다는 늦었지만 또 다른 삼십대 중반의 사내 둘도 어느 샌가 추락 지점으로 이동해 있었다.

“고맙소이다, 고마워. 하마터면 죽을 뻔했구려.”

“어이구, 영락없이 제 명도 채우지 못하고 염왕을 만나러 갈 줄 알았는데 휴, 백년감수했다.”

두 노인의 안도에 담유설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옅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심온을 바라보았고, 심온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로 답했다. 사실 두 노인이 추락하려는 찰나, 담유설은 몸을 날려 구할 생각이었다. 한데 그 순간 심온이 전음을 날려 그녀를 붙든 것이다.

―멈춰!

멈칫 하는 순간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나서면서 두 노인은 끌어올려졌다. 담유설은 그제야 두 노인의 급작스런 추락은 무공을 익힌 자가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시험이었음을 이해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앞에서 인도하던 무사는 무공을 드러낸 네 사람을 차례로 보더니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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