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지금 이 문제도 방장이 마음을 모질게 먹고 몇 마디 변명을 늘어놓았다면 강호인들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보이니 이는 실로 대인의 풍모요, 강호의 진정한 귀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감히 또 말을 돌리려 하는가? 그렇게 내가 두렵더란 말이냐?”
다단궁주의 호통이 쩌렁하고 울렸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뼈를 부수고 한쪽 눈을 빼가지 않을 시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때 좌측 가장자리에서 무리를 뚫고 한 명이 성큼 한 걸음 나서더니 다단궁주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나는 불제자도 아니고, 소림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구대문파에도 속하지 않은 무인이외다. 한데 진행되는 상황을 보아하니 다단궁주의 말이 지나치다 싶구려. 대문파들 중에서 소림만큼이나 고개를 숙인 곳이 있었소이까. 잘잘못은 인생사에서 언제 어느 때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건만 아예 뿌리를 뽑으려고 한다면 강호에는 정녕 피바람이 멈출 날이 없지 않겠소. 그러니 이젠 노기를 거두고 소림의 뜻을 받들도록 하시오.”
그는 날카로운 인상에 등뒤로 검을 맨 삼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그의 목소리나 안광이 뚜렷한 것이 그가 결코 이류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었다.
이때 군중들은 대다수가 소림방장의 인의에 감동을 받은 터라 곧바로 그 주변을 시작으로 성토가 일기 시작했다.
“다단궁주는 이제 그만하시오.”
“진정한 대결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않겠소.”
“맞소. 이미 방장이 마음을 낮추었으니 그대도 노를 거두시오.”
“다단궁에서도 모든 궁인들을 바르게 관리 감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그만합시다, 그만해.”
그 속에서 간의 크기가 적은 사람들은 사람들의 목소리 뒤에 숨어서 몰래 욕을 내뱉는 이도 있었다.
“씨발새끼, 그래서 늙으면 뒤져야 해.”
“저 고집 누가 꺾노. 흰머리 원숭이같으니라구.”
“저거 막상 붙으면 곧바로 깨갱거리고 말 걸? 안 그러냐?”
“그걸 말이라고. 어휴, 저런 건 내 한 주먹거리도 안 돼.”
군중들의 비난이 일파만파 번져 나가는 상황에서 다단궁주의 얼굴이 실룩거리는가싶더니 해지더니 이내 한소리 고함과 함께 군중들 쪽으로 쌍장을 내밀었다.
“고얀 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모두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림방장과 소림무승들은 솔직히 애꿎은 군중들에게 손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장력을 발출하는 모습을 보고도 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순간, 처음 당당한 보무로 나서 다단궁주를 꾸짖었던 검사를 포함 그 주위 삼백여 명이 일제히 쓰러졌다.
“크억!”
“으아악!”
“아악!”
그들은 마치 태풍에 휩쓸린 벼처럼 그 자리에 드러누워 연신 고통스런 신음을 발했다. 이 일은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악랄한 짓이었다. 전혀 싸울 의사가 없는 이들이었고, 그들은 단지 비난을 퍼부었을 뿐이었다.
개중에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이들도 있을 터였기에 다단궁주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했고, 상처 입지 않은 뭇 고수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림사는 물론이고 정파의 뭇 고수들이 오늘의 사태를 참관하러 왔기에 다단궁주의 행위는 마치 무덤을 파는 일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신음 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왜 나서지 않느냐고 성토하는 사람도 없었다. 거의 모두가 그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다단궁주와 쓰러진 삼백여 명을 번갈아 보기 바빴다.
단 일 장에 삼백여 명을 쓰러뜨렸다.
‘이게 정녕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생각이었다. 여기서 만약 영웅이라도 될 양으로 튀어나간다면 그 즉시 피떡이 되어 곱게 흙바닥에 놓여질 것이 분명했다.
어쩐 일인지 삼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 중 피를 흘리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잘은 몰라도 모두 꿈틀꿈틀거리는 것이 부상을 당했을 뿐 죽은 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미 죽지 않을 정도의 장력만을 뿜어냈다는 것이다.
저토록 먼 거리에서 장력을 내뿜어 삼백여 명을 부상 입히고, 거기에 앞에 선 자나 뒤에 선 자나 부상의 상태가 거의 동일하다면?
더 이상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다. 공청은 반쯤 얼이 나가 멍하니 다단궁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도 없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항산이 피로 물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지금은 조용히 이 상황이 덮어지길 바라야 할 상황이었다. 어쩌면 눈 하나 정도 빼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다단궁주는 쌍장을 내뻗은 자세를 거둬들이고는 이내 머리를 감싸쥐었다.
“으아아아악~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았구나. 왜 참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듯 절규했다.
“좀 더 참았어야 했다. 내 어찌 내 사람만 귀히 여기고 저들을 가볍게 여겼단 말인가. 정녕 내가 소림에 죄를 추궁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 외침에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지기 일보직전인 모든 강호인들이 안도했다. 당장 울 것 같이 굳어버렸던 얼굴이 서서히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살았다.’
마음이 품은 뜻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저토록 후회한다면 손을 쓸 일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다단궁주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 다단궁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혹시 아예 입막음을 위해 다 죽여버리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통에 절규하던 다다궁주가 이내 소림방장을 향해 걸어왔다. 소림방장 앞으로 팔대호원이 가로막으려 막 신형을 날리려 할 때 한줄기 전음이 그들에게 전해졌다.
“날 호위하려 하지 말라. 그것은 도리어 화를 북돋는 일이 될 뿐이다.”
팔대호원이 왜 그 사실을 모를 것인가. 단지 그들은 생명을 잃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사명을 받았기에 몸을 날려 그를 감싸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방장이 직접 명을 내렸기에 그들은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섰다. 상대를 격발시켜 화를 자초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단궁주는 어느새 방장의 눈앞에 이르렀고, 방장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차려 자세를 취했다. 딱딱하게 굳은 나무토막처럼 기립한 방장 앞에서 다단궁주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누구를 탓하겠나. 나는 비로소 나 자신도 별수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허물이 산과 같건만 고작 한 평도 채 안 되는 남의 허물을 벌하려 했다고 생각하니 미안할 따름이다. 소림과 다단궁 사이의 일은 없던 일로 하겠노라.”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원래 아미타불이라는 불호는 느긋하게, 부드러운 어조로 발해야 그윽한 부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법이다. 한데 지금 소림방장 공청이 외친 불호는 아주 절도있고 박력있는, 마치 군대에서 부하가 대장에게 말하듯 딱부러진 것이어서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 중 누구도 웃는 자는 없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저러다 변심하여 갑자기 머리를 바스러뜨리고 눈알을 뽑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내 직접 치료해 준 후, 완쾌될 때까지 보살피리라. 귀한 발걸음을 해주어 고맙소이다.”
끝에 가서는 반 공대를 하였기에 모두는 비로소 위기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다단궁주는 아직도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다가가 그들의 상태를 봐가면서 혈도를 짚거나 진기를 유입하는 식으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 또한 모두를 다시 한 번 경악에 빠뜨렸다. 그가 한 사람 한 사람 지날 때마다 그렇게 당장 죽을 것 같던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멈추고 심지어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몸을 점검하는 이들조차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천지에 이와 같이 절세적인 무공에, 신에 근접할 의술을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비로소 세상이 얼마나 드넓고, 숨은 고수들의 힘이 정작 드러난 이들보다 얼마나 더 막강한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다단궁주는 그렇게 삼백여 명을 치료해 준 후, 경악한 표정에서 해방되지 못한 군중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앞으로 다단궁은 더 이상 음지에서 일하지 않을 것이오! 천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날 것이외다! 많은 부족함이 있더라도 강호 동도들의 보살핌이 있다면 우리 다단궁은 조화롭게 강호 제현들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소이다! 날이 어두워지려 하니 모두들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본 좌에게 피해를 입은 삼백여 명은 완치될 때까지 보살필 것이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군중들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질서정연하게 산을 내려갔다. 조화롭게 강호 제현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하지 않은가. 괜히 어설프게 꾸물거리다가 ‘야, 너 거기 무슨 불만있는 거냐?’란 식으로 붙들린다면 정녕 생을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에 어느 누구 하나 군소리없이 산을 내려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상을 당한 삼백여 명에 속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고, 그 근처에 있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장력의 범위를 벗어난 이들은 꿈을 잘 꾼 덕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7. 천하가 놀라다
항산에서의 일은 온 강호를 깜짝 놀라게 했다. 더 정확히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옳을 정도였다.
다단궁은 단번에 소림을 위시한 구파일방을 가볍게 뭉개고 강호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시월 초하룻날의 결전이 있기 전 수없이 떠돌아다니던 거짓말 같은 다단궁주의 위용에 대한 소문은 모두 기정사실화 되었고, 거기에서 수배는 더 부풀어 퍼져 나갔다.
소문은 다단궁주를 신화의 인물로, 다단궁을 전설의 시작으로 만들어가며 하루하루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꿰뚫고 지나갔다.
항산에 다녀온 사람들은 큰 벼슬아치가 된 양 거들먹거렸고,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한마디를 듣기 위해 온갖 환심을 사가면서 말씀을 구걸했다. 듣고자 하는 이들이 간절해질 수록 이야기를 전하는 자들은 더욱 과장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어. 이 나 고춘석이가 말일세. 누구라고? 고.춘.석.”
“아, 그래 알겠네. 춘석이 자네가 대단하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나. 어서 말 좀 해보게.”
“아,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듯 그 광경이 선명히 떠오르는군. 석양이 깊어질 무렵, 다단궁주는 산 정상에 이르렀다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저 늙은이가 뼈다귀 성하게 내려가면 다행이겠거니 생각했었지 뭔가.”
“아니 그렇게 보잘것없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보는 눈이 없었던 게지. 보잘것없는 건 아니었지만 소문만큼 화려하지 않았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으이. 하지만 하늘 밖의 하늘의 권능은 도리어 평범 속에 갈무리하는 법이니 만큼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다지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던 게지.”
“그렇게 말하니 더욱 신비롭기 그지없구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어. 늙은이가 곱게 늙을 것이지 굳이 소림을 걸고 넘어져서 지 무덤을 파는지 모르겠다고 수군거렸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다단궁주는 준엄하게 소림방장을 꾸짖으면서 선 채로 몸이 붕 떠올랐었네. 아무 예비동작도 없이 떠오른 거야. 그건 정말이지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였어. 그와 함께 그의 발 아래로 하얀 서기가 어리는데 어찌나 신비하든지 침을 삼키는 것도,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어 먹고 바라만 보았다네.”
“세상에나… 어찌 그런 일이.”
“아, 내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구나.”
“자, 그래서 어찌 되었나?”
“소림방장도 보통 내기가 아니더군. 그는 소림승이 강호에 나가 다단궁 사람을 해한 것에는 사과를 했지만 그렇다고 비굴해 보이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지. 그러나 이미 다단궁주는 작정을 하고 왔는지 꾸짖음을 멈추지 않았네. 그때 한 검객이 용기있게 소림의 편을 들고나섰는데 그자의 말이 끝날 무렵엔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저마다 다단궁주를 힐난하지 않았겠나?”
“이런,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 거로군.”
“그렇지. 다단궁주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쪽을 바라보더니 왼손을 쭉 펼치는 것이 아니겠나. 이때까지 그는 허공에 여전히 뜬 상태였던 건 두 말할 필요 없는 거고. 순간 그의 손끝에서 자줏빛 섬광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장장 천여 명이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네. 더욱 놀라운 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쓰러졌는데 나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에서 벗어났다는 거야.”
“대단하네, 대단해. 천명이라니.”
“자,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
“그리고 나서는…….”
이렇듯 강호는 온통 다단궁주에 관한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천하제일고수인 신비무영(神秘無影)일지라도 다단궁주 앞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할 것이라는 이야기며, 신비무영이 사라진 것도 사실은 다단궁주가 이미 제거한 것이라는 등, 그 외에도 숱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거론되었다.
그런 와중에 마치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다름 아닌 다단궁의 제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호 동도에게 고함.
다단궁은 강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자 하는 문파로서 정파의 기둥인 구파일방과 작지만 의기가 하늘을 찌르는 각 군소문파들과 함께 정의를 수호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한 취지의 일환으로 본 궁은 새롭게 제자들을 모으고자 합니다. 정의를 수호하고, 예를 흠모하는 뜻있는 강호인들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장소―오태산(五台山) 태청봉 아래 신협곡.
자격―몸과 영혼이 건강한 자.
20세 이상 가능.
지참금 은 다섯 냥 필수.
단, 무공을 익힌 자는 입궁을 금함.
시험―인성 5할, 체력 2할, 열정 3할
기간―구월 보름, 그로부터 삼 일 간.
천하 각지에 나붙은 방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단궁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전까지 만해도 화산파나 무당파 등 구대문파야말로 가장 들고 싶은 문파였으나 다단궁의 등장 이후로는 모두가 구대문파 정도는 하찮게 보는 의식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