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86화 (86/125)
  • # 86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래로부터 사람들은 꾸역꾸역 밀려오는 통에 벌써부터 작은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으악, 사람 살려~”

    “내 발을 붙잡으면 어떡해? 나까지 죽일 셈이냐? 이거 놔라.”

    “이봐, 여기 사람이 매달려 있어. 으악, 밀지마. 떨어진단 말이야.”

    절벽 끝자락으로 밀린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벌써 간당간당 매달려 구조를 요청했고, 겨우 힘을 모아 사람을 끌어올리고 나면 다시금 굴러 떨어지는 사람이 발생해 보통 난장판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소림은 물론이고, 개방을 비롯한 팔대문파의 사람들이 함께 고난을 극복하자는 마음으로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 까닭에 절벽에 매달려 아우성치는 이들을 구하기도 하고, 여러 방면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문에 의하자면 항산 자체가 지도에서 아예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지만 호기심이 거기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더 컸음을 항산의 뭇 인파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었다.

    정오가 되어 이날의 주인공 중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소림방장 공청이었다.

    그는 호위승인 팔대호원의 엄밀한 경계 속에 산 정상에 이르러 미리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공청은 생각지도 못한 인파의 홍수를 보고 보일 듯 말듯 인상을 찡그렸다.

    최대한 참관인들을 줄이도록 노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그였다. 하지만 제자들이 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막상 올라와 사람들의 시선을 접하고 나니 누구도 이들을 말릴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리에 앉는 순간, 누가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박수갈채 속에 공청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해 보인 후 자리에 앉았다.

    박수 소리가 멎은 후, 잠시 침묵이 감돌았으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금 옆에 사람들과 수군거리기 시작하는데 삽시간에 마치 수만 마리의 벌 떼들이 이동하는 것 같은 소리가 온 산을 메워갔다.

    “저 양반이 소림방장인가보군.”

    “그러게. 신수가 훤하니 인물 좋게 생겼구먼.”

    “인물이 좋으면 뭘 하나. 일평생 여자 하나 후리지도 못할 텐데.”

    “하이구, 생각하는 것이라곤.”

    그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못 진중한 대화를 펼치는 이들도 있었다.

    “예상과 달리 소림방장이 먼저 왔군.”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거늘, 무림의 태산 북두인 소림을 기다리게 하다니 다단궁 이거이거 실망인걸.”

    “그러게 말이네. 만나자고 한 것도 다단궁이니만큼 미리 기다리는 있는 것이 도리이거늘.”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을 것 같네.”

    “뭐가 말인가?”

    “굳이 소림이 먼저 나와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와서 설치는 것을 보니 어쩐지 소림이 구린 데가 있지 않은가 해서 말이야.”

    “허허, 그럴 리가 있나. 불제자로서 굳이 선후를 따지지 않고 겸손을 보이기 위함이겠지.”

    “아무렴, 소림이 달리 소림이던가.”

    “하하하, 알았네, 알았어. 난 그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 너무 몰아세우지들 말게.”

    이런 이야기들이 진행되는 동안 소림방장 공청을 비롯한 소림승들은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무공의 고강함과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신경에 의해 잡스러운 내용들을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야기 중에는 말도 안 되는 억지와 질퍽한 농담까지 소림과 범벅을 해놓아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들 딴에는 소근거린다고 말하는 것이라 내놓고 반박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석양이 질 정도가 되자 여기저기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거의 세 시진 가량(약 6시간)을 눈을 빼고 기다렸던 이들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은 다단궁주를 향해 욕을 서슴지 않았다.

    “이거 순 사기꾼 새끼들이 틀림없어.”

    “전 중원을 상대로 낚시를 하다니.”

    “소림사 저놈들도 멍청하긴 매한가지야.”

    “너무 목소리가 크네.”

    “들으면 들으라지. 썩을 놈들. 저거 좀 봐. 방장이란 작자가 썩은 동태눈깔로 멀거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잖아. 소림사의 미래도 뻔할 뻔자야.”

    군중들의 야유는 다단궁을 타고 넘어 소림으로 이어졌다. 소림이 단호히 오늘의 회합을 거부했다면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붉은 석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와중에도 떠나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 구경을 위해 심지어 어젯밤부터 좋은 자리를 찾아온 터라 이대로 물러가기엔 허망함이 도에 지나쳤던 것이다. 만일 끝까지 다단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대로 항산을 내려가야만 한다면 돌아서는 소림방장을 향해 돌멩이라도 던질 생각을 품고 있었다.

    모두의 답답함 속에서 정작 가장 큰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소림방장 공청이었다.

    그의 생각으론 넉넉히 반 시진 가량 정도 기다린다면 상대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었다.

    대게 강호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정할 때는 날짜만 언급할 뿐 상세한 시간은 말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그럴 때는 암묵적으로 정오를 칭하는 편이었다.

    당연한 논리로 정오에 맞추어왔건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 같아선 분노한 어조를 발하며 산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뒷날 다단궁이 전국 각지에 방을 붙여, ‘그새를 못 참고 산을 내려간 옹졸한 소림방장…’ 하는 식으로 소문을 낼까 두려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더욱 더 화가 치밀었다.

    사람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분노의 공기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시간 속에 아래쪽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외침이 온 산을 뒤덮었다.

    “다단궁주다, 다단궁주가 왔다!”

    군중들의 목소리에는 언제 원망 불평을 했었냐 싶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낚은 것이 아니었다는 데서 오는 안도와 시간이 갈수록 갈망하던 마음이 커진 탓에 심지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속출했다.

    “드디어 오셨구나. 그분이 오신 게야.”

    “이제 죽어도 원이 없구나.”

    “무림에 전설로 남을 현장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구나.”

    다단궁주의 옷차림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귀티가 났다. 마치 한 마리의 고고한 학과 같이 손을 휘젓는 작은 동작에서는 봉황의 기세가 넘치고, 발걸음 속에는 용의 승천의 기운이 뿜어지는 듯했다.

    거기에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희고 긴 수염을 배꼽까지 늘어뜨린 모습은 그가 실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열두 명의 검사가 호위하였고, 산 아래까지는 가마를 타고 왔으나 초입에서부터 걷기 시작하였는데 그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평범해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냈다.

    “제자야, 잘 보거라. 옛 속담에 이르기를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했다. 다단궁주는 실로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강한 자들은 원래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무공을 드러내지 않는단다.”

    “사부님의 가르침 마음에 새기겠나이다.”

    온갖 박수갈채와 환호, 그리고 선망하는 시선을 받으며 다단궁주는 정상에 올라 결국 소림방장과 약 이십여 장을 격하고 마주했다.

    파리가 윙윙거리듯 소란스럽던 곳이 마치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인양 정적에 빠졌다.

    한줄기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한바퀴 돌며 지나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단궁주였다.

    “방장께서 먼저 와 계셨군요. 제 생각으로는 소림사를 영도해 가시는 분 정도라면 적어도 저보다 한 시진 정도는 뒤에 오실 것이라 생각했소만 과연 불제자의 아량은 그 깊이와 넓이가 측량할 길이 없소이다.”

    말인즉 공경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현실과 대조해 볼 때 이 말은 조롱이 명백했다.

    그러나 워낙 대놓고 말한 탓에 도리어 사람들은 다단궁주를 뻔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소림이 다단궁에 뭔가 죄를 지었기에 이러한 역학 관계가 형성된 것이라고 볼 따름이었다.

    그런 생각은 공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과의 말을 정중하게 했다면 내심 마음을 놓았겠지만 상대가 처음부터 강하게 나오자 그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으론 움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강호에 나갔던 소림승들 중에 누군가가 단단히 다단궁 사람에게 모욕을 준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불제자는 억겁의 시간과 함께 하니 먼저 기다리는 것이 도리지요. 너무 개념치 마시오.”

    “불제자라… 거참 듣기 좋은 말이구려. 하지만 내 손속은 불제자라 하여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으니 유의하길 바라외다.”

    다단궁주가 뱉어낸 말은 어찌나 싸늘하든지 이제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겨울의 거센 북풍한파가 몰아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모두는 입술을 굳게 다물 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수만의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다단궁주. 저 기백은 아무나 발휘할 수 없음이 아닌가.’

    ‘감히 무림의 태산 북두인 소림사의 방장 앞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손속을 운운하다니 도대체 얼마만큼 강하단 말인가.’

    ‘뭔가가 있다. 소림은 죄를 진 것이 분명해.’

    공청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손을 쓰는 것이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무슨 연유로 시주께서 분노하시는 건지 듣고 싶구려.”

    말을 하면서 속으로 공청은 오늘 일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상대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인데다 전혀 외적으로 무공을 드러나지 않으니 그 경지가 이미 반박귀진에 이른 것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으하하하하, 소림은 역시 광오하기 짝이 없구나. 사람들을 속일 순 있으나 하늘의 그물은 능히 빠져나갈 수 없는 법이다. 명색이 불제자라면 오계(五戒)를 알 것이 아닌가?”

    오계라면 일반인들조차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달리 오악(五惡)이라고도 부르는데,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음주(飮酒)를 뜻했다. 공청은 이 물음이 대답을 요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기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방장께서는 소림승들이 오로지 소림에만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요? 그들이 정녕 강호를 활보하지 않는다면 오계를 범할 리는 없을 것이나 강호를 횡행하는 동안 소림의 위세와 무공만을 믿고 약한 자를 핍박하는 행위를 펼쳤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순진하게 눈만 깜박거리고 있을 것이오이까.”

    이로서 공청은 눈마저 깜박거리지 못할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답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한 곳이오. 세상 어떤 선량한 곳이라도 모두 하나같이 움직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그러하기에 소림에는 계율당을 두어 징계함에 망설임을 두지 않고 있소이다. 그런 만큼 시주께서는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아미타불.”

    군중들은 설마 하니 소림방장이 이렇게까지 머리를 숙일 것은 생각조차 못했거늘 아무 거리낌 없이 낮은 자세를 취하자, 새삼 소림을 달리 보는 마음이 되었다. 힘이 없는 자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지만 강한 힘을 지니고서 스스로를 낮춘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다단궁주의 닫힌 마음은 너무도 견고해 쉽게 따스한 바람이 스며들지 않았다.

    “일을 저질러 놓고 말 한마디로 막으려 하다니 그렇게는 아니 되오.”

    철통같이 강경한 어조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는 어느새 소림사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공청이 방장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머리를 숙인 것이 모두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준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곧바로 이어진 다단궁주의 말로 인해 급반전되었다.

    “소림승이 내지른 장력에 오른쪽 어깨뼈가 바스러지고, 한쪽 눈이 실명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그저 말로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오! 이런.”

    “끔찍하군.”

    “아, 소림이.”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방장 공청은 물론이고 함께 동행한 소림 무승들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도에서는 음주(飮酒)와 망어(妄語)를 금하거늘 술에 취해 장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작자를 내 어찌 그냥 보고 넘기란 말이냐. 그대가 비록 머리를 숙였다고 하나 그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내 오늘 그대의 어깨뼈를 부수고, 한쪽 눈을 멀게 하겠다. 내 말이 과하다 여기는가? 제자와 방장은 다르다고 말할 것인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그 따위 변명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백발의 노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공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림사 내부 조사에서 다섯 명 정도가 술에 취해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이 떠올랐다.

    ‘아, 정녕 나의 불심이 약하였구나. 어찌 제자들을 단속치 못하고서 강호를 아우를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는 성품이 어질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대로 어깨뼈를 내주고 한쪽 눈을 뽑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훗날 두고두고 이번 일이 선례가 되어 소림승들의 작은 과오조차도 모두 방장이 책임을 지게 된다면 방장의 몸이 백 개라도 해도 모자를 것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그는 불호를 외운 후, 한껏 죄스러움을 담아 말했다.

    “무슨 말인들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거듭 소림을 대표하여 용서를 빌 따름입니다. 오늘의 비무는 제가 진 것으로 하겠습니다. 또한 크게 다치신 분을 직접 뵙고 사과할 것이며, 그분을 소림으로 모시고 가서 직접 치료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정녕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소림이 강호에서 차지하는 명망으로 볼 때 굳이 이처럼 굽신거려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강호란 피로 하루를 열고 또 마감하는 곳이다. 어떤 시비가 붙었다 해도 강한 힘은 완벽한 변호인과도 같아서 모든 죄를 사면받을 수가 있었다. 무림공적에 이를 만큼 파렴치한이 아니라면 문파의 큰 힘에 의해 작은 과오는 안개에 갇힌 숲처럼 모호해지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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