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통증왕 굉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며 은천협을 충격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으나 은천협은 여전히 얼이 나간 사람의 표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새끼! 씨발놈아!”
욕설의 제왕이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는 이때에 터져 나온 거친 욕! 주인공은 황당하게도 은천협이었다. 그는 도무지 눈앞의 송추가 진짜 송추인지 알아내고자 살짝 도발해 본 것이었다. 만약 진심에서 우러난 변화가 아닌 어떤 강압이나 협박, 혹은 무언가에 매수되어 잠시잠깐 연극을 하는 것이라면 욕을 듣는 순간 욱, 하고 욕을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 심정은 그때까지 굳은 채로 멈춰 서 있던 총관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지 사뭇 기대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허허허, 장주께서 언짢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동안 제게 서운한 것이 있으시다면 오늘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으십시오.”
“헉!”
은천협과 총관은 동시에 경악했고, 그 모습을 보며 이호와 심온, 굉운은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장주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겠소만 이 녀석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소이다.”
굉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천협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람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만큼 그 습관을 바꾸는 것 또한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닐 터인데 어찌 백팔십도 바뀌어서 나타날 수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하, 무슨 일이든 특별한 예외가 존재하는 법이지요. 게다가 사람의 마음이란 보이진 않아도 무엇보다 강하기도, 날카롭기도, 또한 빠르기도 하니 마음먹기까지가 어려울 뿐 한 번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는 것이지요.”
그 뒤로 다과가 나오고,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도 은천협은 문득 문득 사실대로 이야기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앞서 답했던 대로의 뻔한 내용을 되풀이할 뿐이어서 은천협의 답답함은 이루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성공리에 송추가 개과천선하였음을 알린 일행은 장원에서 하루 묵어가시라는 은천협의 말을 정중히 사양하고 작별을 고했다.
“그동안 대회 개최에서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습니다. 은하전장이 더욱 번성하길 바라겠습니다.”
이호와 심온, 굉운이 차례로 예를 갖춘 후, 끝으로 송추가 겸손히 허리를 숙였다.
“은 장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아직까지도 허망한 욕의 세계를 왕래하였을 것입니다. 무의미한 생활에서 건져주시고, 또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게 된 것은 모두 은 장주님의 덕분입니다. 아무쪼록 사부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들어서 세상을 빛내는 자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도저히 욕이라고는 살면서 단 한마디도 뱉어낸 적이 없는 사람마냥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은천협은 답례를 할 생각조차 잊어버리고는 그저 속으로 ‘허허허’거릴 뿐이었다. 일행은 은천협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크게 개의치 않고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은천협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달려가 굉운을 붙들었다.
“잠깐만 이야기 좀 하지요.”
굉운은 이호 등에게 곧 따라가겠다는 손짓을 해 보이고 은천협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도대체 어떠한 감동으로 감화시켰기에 사람이 저리 바뀔 수가 있는지요. 불쌍한 늙은이 하나 살린다는 생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은천협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사실 그는 처음에는 어떤 협박에 걸려 억지로 욕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전혀 꾸밈없는 송추의 태도를 보고는 이는 정녕 마음을 움직이는 커다란 감동이 원인이 되었을 거라 단정지었다. 정녕 그렇다면 그 감동의 실체를 반드시 가르침 받아야겠다는 것이 그의 현재 다짐이었다.
굉운은 은천협의 눈이 활활 타오르며 갈망하는 것을 보고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은천협이 즉시 귀를 내밀었고, 굉운은 소곤거리며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겁니까?”
은천협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것도 사실 반반이지요. 나 또한 장담하긴 어렵구려. 하지만 이 방법이 실패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소이다.”
굉운이 어깨를 한차례 으쓱하고는 돌아서자, 은천협은 허겁지겁 내전으로 달려갔다.
심온 일당이 은하전장을 나와 삼십여 장 정도 걸었을까?
“이보게, 송 공자 잠시만 기다려 주게.”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저만치 은천협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은하전장의 주인인데다 그 밑에 부리는 자가 한둘이 아니건만 직접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오니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면 저럴까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잠시 후, 은천협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 이르자 굉운을 뺀 세 사람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건넸다.
“무슨 일입니까?”
“어찌 아랫사람을 두고 이리도 황급이 뛰어오셨소?”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나 보군요.”
간신히 숨을 고른 은천협은 송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송 공자에게 줄 것이 있어서 왔다오.”
송추는 자못 기대에 부풀어 미소를 머금었다. 저만치서 달려올 때부터 뒤로 오른손을 감추고 있었기에 특별한 선물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못 기대가 큽니다.”
따악~.
송추의 기대감에 걸맞는 격렬한 타격음이 머리로부터 울려 퍼졌다. 은천협이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참나무로 만든 몽둥이를 내려쳐 버린 것이다.
“하하하하, 고 녀석 샘통이다, 샘통이야.”
웃겨 죽겠다는 듯 즉시 배꼽을 움켜잡는 모습에 송추는 자신의 몸에 펼쳐진 금제를 까마득히 잊어먹고는 달려들었다.
“이런 개호로자식을 봤나. 이 씨발새끼야!”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금제가 곧바로 발동했다.
그때 은천협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사부라는 작자에게 속아 멀쩡한 사람에게 몽둥이를 휘두른 것으로 여긴 것이다.
또 한편으로 정녕 송추가 틀림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욕을 듣자마자 온 몸이 저릿해져 오는 느낌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은천협은 어찌 피하지도 못하고 놀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멱살이라도 움켜쥘 줄 알았던 송추는 두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면서 지랄염병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은천협은 멱살이 잡히거나 주먹이 당도하지도 않고, 도리어 푸다닥푸겔겔 하는 식의 괴상한 소리가 들려오자 슬그머니 눈을 떠보고는 황당함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 이런…….”
은천협이 이 급작스런 사태에 어리둥절해 있을 때, 곧바로 굉운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은 장주,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요. 잘 가라는 인사를 했으면 그만이지 쫓아와서 몽둥이를 휘두르다니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이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슨 핑계를 되려고 하는 게요. 내 제자는 요법에 걸려 입 밖으로 욕을 한마디라도 쏟아내게 되면 이처럼 지랄염병을 하고 만단 말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욕을 하지 않고, 공대를 하는 습관을 붙이면 언젠가 요법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우리 모두 항상 입 조심을 하고 있건만 어찌 이리도 무식하게 도발한단 말이오.”
그제야 은천협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솔직히 믿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지만 또한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억지로 이런 발작을 벌인다고 하기엔 상황이 너무도 실감났다.
팔다리를 요란스럽게 흔드는 것이야 조금만 연습하면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다고 쳐도 그르릉거리는 거품만은 결코 연습한다고 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한 건 누군가에게 요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사부라는 인간이 요법을 펼쳤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은하전장에 머물고 있는 숱한 고수들 중 누구도 이 세 사람의 신상에 대해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은천협은 이들이 평범의 범주를 벗어난 이들이기에 아마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은천협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할 때, 마침 발광을 끝낸 송추가 처연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사부를 노려보았다. 몽둥이에 맞을 때만 해도 욱 하는 성질에 은 장주에게 욕을 했지만 지랄을 하는 동안 생각해 보니 은 장주가 스스로 몽둥이를 휘둘러 도발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오직 하나였다.
“그래도 니가 내 사부냐, 제자를 아주 죽일 작정이구나, 이 씨발놈아!”
그것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란 것을 깜박한 송추는 다시금 발광의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파다닥, 파다다닥.
“굉장하군요.”
은천협은 벼락 맞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송추를 보고는 놀랍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동안 욕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이 정도 고통쯤은 당해야 마땅하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장주.”
“신경까지야. 어찌 됐든 바른 길로 인도해 가신다니 기쁠 따름이외다.”
“자, 그럼 이만 가리다.”
굉운은 발작의 끝물을 향해 달리는 송추를 옆구리에 끼고는 심온과 이호와 함께 콧노래를 부르면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은천협은 그들이 멀어지고 끝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세상은 넓고, 괴이한 자들은 너무도 많구나.”
***
6. 다단궁이 강호를 뒤흔들다
사숙 이호와 통증왕 굉운, 그리고 그의 제자 송추는 열흘 정도 더 머문 뒤에 후흑문을 떠났다. 함께 하는 동안 심온은 굉운으로부터 항문압박공과 방광급속완충에 대해 세심한 가르침을 받았고, 청룡장의 문제에 관해 다시금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조우했을 때 의견을 나누었던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된 선우현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청룡장임을 감안해 보면 그 세력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은밀할 것이라는 점과 섣불리 나섰다가는 역시 도리어 뒤통수를 맞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다시금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이호와 굉운은 철저히 무관심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던 심온조차 이야기를 듣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충 두 사람의 말은 이러했다.
“조바심 부릴 것 없다. 청룡장 무리는 이미 행적이 노출된 터라 반드시 수색하는 무리가 있을 거라 생각할 거야. 놈들은 수색하는 무리를 탐지하려고 바싹 긴장하고 있겠지. 그런데 우리가 온전히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것을 모르는 놈들은 촉각을 곤두세워도 전혀 감지할 수가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할 거란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조직일 것이라고 미리 겁을 먹을 거란 얘기야. 그렇게 되면 굳이 우리가 찾아서 손을 쓰지 않아도 놈들의 활동은 상당부분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정파를 표방하는 놈들이니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까봐 몸을 사리느라 바쁠 테지.”
“천하욕설대회에 참가했던 놈들 중 서문기라는 가명을 쓰고 나타난 작자가 있었지 않느냐? 그자가 신분을 숨기려고 복면을 썼지만 형님과 나는 짐작하길 그자가 현 무림맹주거나 그에 근접하는 신분을 지닌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뭐든 크게 상관없겠지. 굳이 서문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정파인들 중에는 끊임없는 절제와 도덕을 강조하다 보니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이 많아 은근히 답답함에 겨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거다. 그러니까 서문기도 복면을 뒤집어쓰고 욕설 대회에까지 나온 것이 아니겠냐. 그런 것처럼 청룡장 무리들은 음욕을 해결하는 쪽으로 무리를 지은 것이지. 그것을 억제하고 무너뜨리려 한다면 약간의 희생은 치르더라도 해결은 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경계와 막연한 두려움이 그들의 심리를 견제하고 음행을 묶어두게 될 것이라는 거다. 가만히 두면 자연히 그들 내부에서 분란이 생겨 결국 스스로 와해될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이호와 굉운의 잇따른 말에 심온은 충분히 공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하염없이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허점이 노출되고 뿌리가 드러난다면 여지없이 달려가 뿌리부터 통째로 불살라 버릴 생각이었다.
‘너희는 부디 조바심을 부리고, 서로 의심하고, 염려해라. 틈이 보이는 즉시 이 어르신이 달려가 줄 테니.’
* * *
강호가 발칵 뒤집혔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다단궁’이라는 문파가 소림사의 방장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것도 조용히 찾아간 것이 아니라, 전국 방방 곳곳에 날짜와 이유를 적어놓았으니 강호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중원 천지에 다단궁주의 도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소림사 방장에게 고함.
본 좌 다단궁주는 소림사의 교만한 작태를 두고 볼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노라. 그대의 죄는 뭇 불제자들의 행실을 관리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그 의무를 소홀히 하여 강호에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패역하다 해도 불제자는 마땅히 가르침을 따라 올바른 행실을 보여야 하건만 소림이 불도(佛道)는 뒤로하고 오로지 소림 무학을 자랑 삼아 약한 자를 핍박하니 본 좌는 일벌백계하여 온 천하에 바름이 무엇인지를 알리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삼 개월 뒤, 팔월 초하룻날 항산의 선인봉으로 오라. 만일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소림사가 다단궁이 두려워 몸을 웅크린 것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본 궁에서는 온 천하에 소림사가 무릎 꿇었음을 선포하겠노라.
이 대단한 선전포고에 모든 무림이 커다란 의문과 함께 어리둥절함에 빠졌다.
도대체 어떤 배짱을 지닌 자이기에 소림사를 걸고넘어지느냐가 첫째였고, 둘째는 천하 방방곡곡에 방을 붙여놓은 것을 통해 다소나마 다단궁의 세력이 꽤 크다는 데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제껏 풍월로라도 어디선가 그런 문파나 단체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미루어 짐작이라도 할 텐데 이건 아예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라 그 황당함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