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3. 탈출
“씨파, 겨우 이 정도로 내가 당한 고통을 보상하려 한단 말이냐?”
송추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한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깨어난 지 삼 일이 지나 기력이 완연히 회복되자, 굉운과 이호, 그리고 심온이 화합의 차원에서 야유회를 가자고 제안하여 후흑문의 본거지를 빠져나와 들판으로 나온 것인데 욕설의 달인인 송추가 야유회 따위로 기뻐할 위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자야, 넌 왜 그리도 불만투성이냐? 너는 도대체 언제쯤 만족할래?”
“씨발새끼, 미친 영감, 홍어 좆같은 놈, 아구창을 찢어 죽일 놈…….”
송추는 혹시나 또 험악한 경우를 당할 것을 염려해 소리 죽여 욕을 퍼부었다.
그 꼬라지를 보며 이호와 심온은 미심쩍은 눈으로 연신 굉운을 바라보았다. 분명 대법을 시행함은 욕을 제어한다는 것이었는데 욕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 나들이 특별 계획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 염려는 붙들어 매두고 내 말대로만 해.’
오기 전에 이렇게 굉운이 장담을 한 탓에 그나마 믿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큰 나무 아래 그늘 진 곳에 자리를 펴고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젖었고, 한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며 연신 들릴 듯 말 듯 욕을 내뱉고 있었다.
“야, 뭐 좀 먹지 그러냐?”
“됐어, 씨바라.”
심온이 애써 다정하게 말을 걸었으나 송추는 쳐다도 보지 않고 욕으로 응대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권하는 말도 없어졌다.
아삭아삭. 우적우적.
흥겹게 입을 놀리면서 준비해 온 과일과 간식을 먹는 소리에 대응하여 송추의 욕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그러다 변화가 인 것은 자리를 편 지 약 반 시진 가량이 지나서였다.
호리병의 술을 입으로 가져가던 이호의 손길이 멈추고, 마른 고기를 씹던 굉운의 입술이 그대로 정지했다.
“이 기운은?”
“좋지 않군요.”
어느새 심온의 얼굴도 굳어진 상태였다.
“사숙, 어떻게 할까요?”
“기다리는 것보단 마중 나가는 것이 낫겠다.”
“그럼 그렇게 하죠.”
한쪽에서 세 사람의 급작스럽게 변한 표정과 대화를 듣고 있던 송추는 더불어 아연 긴장하는 낯빛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떤 강력한 적이 부근에 출현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생각할 때 무서운 것이 없어 보이던, 일명 사부라 지칭하던 늙다리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이, 이봐들… 야, 씨바. 무슨 일 난 거야?”
그러나 상황이 긴박한 듯 송추에게 일일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야겠다.”
이호가 눈에 힘을 주어 하는 말에 굉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굉운은 약간 옆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풀밭의 위쪽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 아래로 한 평 남짓 되는 흙자리만 고스란히 남게 되었는데 그곳을 향해 이내 손을 날렸다.
송추는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어 흙바닥과 굉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는데 이내 입을 쩍 하고 벌어져 다물지를 못했다.
분명 손이 땅에 닿지도 않았건만 손의 방향에 따라 땅이 푹푹 꺼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거의 한 번에 팔 길이 정도만큼 밀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윽고 사람 키의 절반 정도의 깊이가 확보되자, 굉운은 몇 가닥의 나무를 그 위에 대고 뜯어냈던 풀, 흙을 그 위에 덮었다. 그러자 거의 겉에서 볼 때는 그저 다른 땅과 다를 바가 없이 되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이 안에 들어가 있거라.”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데다 방금 전 보인 무위를 보고 일순간 쫄아 있던 송추가 굉운이 다시 들어올린 구멍 안으로 엉거주춤 거리면서 들어갔다.
“이거이 지금 뭐 하자는…….”
그러나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굉운의 머리 위로 어둠이 덮쳤다.
“늦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이곳을 벗어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언뜻 송추의 머리로 이렇게 생매장 당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무겁게 내리누룰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거기에 대해서는 곧바로 걱정하는 마음을 버렸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네.”
그 이후로는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안에 쭈그리고 앉아서 귀를 쫑긋하고 있던 송추는 한순간 자신의 운명이 왜 이렇게 갑작스레 꼬이게 되었는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행?)
“저 멍청이 계속 저기 숨어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심온이 미심쩍은 눈으로 한 곳을 바라보면서 굉운에게 중얼거렸다.
“하하, 멍청해도 그렇게 멍청하려구.”
“하지만 벌써 두 시진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이 없잖냐? 저 녀석은 예상 밖으로 멍청할지도 모르겠다.”
이호도 기다리다 지쳤다는 말투가 역력했다.
부근에 다가오는 살기 어린 기운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굉운이 말한 계획으로, 송추가 기회를 타고 자연스럽게 탈출하는 것으로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맹랑한 성격의 송추이기에 여지없이 빠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장장 두 시진(약 4시간 가량)이 지나도 들썩임조차 없자 지루한 마음을 참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우리 연기력이 너무 뛰어났던 겁니까? 아니면 원래 강단없는 놈인데 우리가 사람을 잘못 본 겁니까?”
심온의 말에 굉운은 입을 이리저리 뒤틀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굉운의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움직인다.”
“진짭니까?”
“이제야 기어 나오다니. 쯧쯧… 이런 녀석이라면 그냥 제대로 패도 욕을 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었겠는걸.”
“형님, 이 아우의 눈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녀석은 아니라니까요.”
“글쎄다… 더 두고보긴 하겠다만.”
들썩임에 이어 확 땅꺼풀이 제쳐지면서 송추가 튀어나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맞으면서 송추는 길게 기지개를 폈다.
“아, 씨바랄… 깜박 잠이 들어버렸네.”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흥, 그래도 배짱이 아예 없는 놈은 아닐세.”
“제법인걸요?”
잔뜩 쫄아서 나오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떠들던 이호와 심온이 어느 정도 인정하는 투로 말하자, 굉운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랬잖아. 보통 놈은 아니라니까.”
송추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개새끼들, 뭐라고 나보고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내가 뇌가 없냐? 간이 없냐? 씨발 것들, 확 창자를 잘라 볶아먹어 버릴까 보다. 대체 어떤 놈을 만나는지 몰라도 콱 제대로 뒈져 버려라. 망할 새끼들…….”
그 말과 함께 송추는 있는 힘껏 달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씨발 것들과 망할 새끼들이 된 세 사람은 송추가 달음질하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는 거의 동시에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하하.”
“푸하하하하…….”
“키키키킥…….”
“오늘 저녁 식사는 정해졌네.”
“내장전골?”
“딱이죠.”
* * *
열흘 정도가 지나자, 비로소 송추는 자신이 온전히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음을 실감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지독한 행군을 했지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평소와는 달리 지칠 만한 상태임에도 몸에 기력이 넘치고 발걸음이 마냥 가벼운 까닭이었다.
그것은 대법을 시전하면서 혈도의 많은 부분이 열리고 기가 세맥 곳곳에 퍼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기의 흐름이 뇌의 조정에 영향을 미쳤다곤 하나 몸 또한 일정 부분 유익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내공도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내력의 운용법도 전혀 모르는 지라 고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지만 그래도 달음질하는데는 여간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뒤쫓겠느냐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송추는 이 기분을 만천하에 공표하고자 동추산 정상에 올랐다.
때는 한낮이라 정상에는 대여섯 명의 노인과 서너 명의 아주머니가 따로 또 같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환호성을 토해내기도 했다.
송추도 발을 딛기에 좋은 곳을 골라 우뚝 섰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도 아스라한 절벽이었지만 무게 중심을 적절히 잡고 서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개쌔끼들아~ 나 송추, 여기 있다. 이 좆같은 새끼들아~ 잡을 테면 잡아봐라. 이 개미허리 절반도 안되는 새퀴들아~”
우렁차게 울려 퍼져 메아리까지 들려오자, 산 정상에서 기분 좋게 운치를 누리던 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송추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바라봤기에 그것만으로도 압박을 느낄 만했지만 송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욕 고함을 퍼부었다.
“야~ 호~ 욕하는 게 뭐가 어쨌다고 지랄 염병들이야. 이제껏 내게 뭐 보태준 것 있어? 좆만새끼들, 너그들은 하늘의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시여, 그 씨바랄 놈들을 용서하지 마소서. 용서하면 그땐 정말 네 죽고 나 죽고다.”
이젠 하늘을 향해 협박까지 일삼는 말에 나이 지긋한 노인이 혀를 끌끌거리며 꾸짖었다.
“아직 젊디젊은 놈이 어찌 그리 입이 험한 게냐? 사람이 어찌 마음에 담은 것을 다 풀고 살 수 있단 말이냐? 꾹 눌러 참는 가운데 마음속에서 분노와 한이 승화하여 결국은 커다란 보석을 품게 되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곱게 입을 다물고 이리 내려와 모두에게 잘못을 빌도록 해라.”
노인의 말에 주변에서는 후련하다는 반응들이 속출했다.
특히 노인은 아랫마을의 촌장인데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하루에 한 번씩 꼭 산을 오르는 터라 등산객들과 안면이 많아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모두의 대표가 된 상태였다.
“어르신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 네 녀석은 어서 내려와서 용서를 빌어라.”
“오늘 따끔하게 혼을 내줘서 다시금 이런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것들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저런 녀석의 부모도 애새끼 낳았다고 미역국을 먹었겠지. 에구, 불쌍하다, 불쌍해.”
그 순간 송추의 몸이 휙 돌아서면서 입이 거침없이 열렸다.
“이런 좆같은 새끼들! 확 눈알을 뽑아버릴까 보다.”
이번 욕설은 허공에 외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 일갈한 것이라 그 위력이 고스란히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촌장을 위시한 뭇 등반객들은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하면서 정말로 눈알이 뽑힐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정녕 천하 욕설 대회의 우승자다운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가 더 이어졌다.
“꺼져라. 씨바랄.”
결국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는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평소 험하게 경사진 등산로라 천천히 나무를 붙들고 내려갔던 그들이건만 지금은 발에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달려 내려가는데 그 민첩함과 빠름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삭신이 쑤시다고 말하던 연로한 노인들은 물론이고, 배와 허리가 구분이 안 되는 아주머니들 또한 정확히 내려갈 지점을 밟고 튕기면서 내려갔다.
그들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머리 속에 머물며 울려 퍼지는 송추의 욕설 때문이었다.
모두가 떠나 버린 텅 빈 산 정상에서 송추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머금고 다시금 욕 고함을 내지르려 손을 모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휘청!
느닷없이 머리가 텅 비어져 버린 듯 아찔한 현기증이 나자 송추는 비틀거리면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차례도 어지러움을 호소해 본적이 없던 그였기에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내 정신이 들었을 때는 까마득한 절벽이 눈앞 가득 다가오고, 절망이 온 마음을 뒤덮었다.
자신이 왜 절벽 끝자락에서 욕을 퍼부었는지 후회가 앞섰지만 마냥 후회한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송추는 순간 몸을 백팔십도 회전하면서 두 손을 뻗어 절벽을 붙들었다.
두 팔에 의지하여 대롱대롱 매달린 송추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온 힘을 발휘하여 올라서려 했다.
다행과 불행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산 정상에 아직까지 아무도 머물지 않고 있어 이 꼬락서니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으아아아악~”
죽을힘을 다하자,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는지 송추는 조금씩 몸을 끌어올려 위로 기어올라왔다.
“훅, 훅.”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절벽 끝자락에 앉아 아래를 쳐다보니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씨바,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제길, 재수 더럽구나. 하지만 이것으로 액땜했다고 치자. 이 정도의 고비를 넘겼으면 앞으로 큰 어려움은 없겠지.”
송추는 산을 내려가면서 가슴을 연신 쓸어 내렸지만 정작 왜 머리가 어질거렸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나요? 천천히 강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저 녀석 욕의 위력은 역시 대단한 데요.”
“흐흐흐, 그래 봤자. 며칠 남지 않았어.”
관찰자로서 굉운과 이호, 그리고 심온은 송추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살피며 때를 기다렸다.
***
4. 종소리의 공포
산에서 내려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송추는 객점에 들었다.
식사와 함께 숙박까지 해결할 요량으로 걸음을 딛은 곳은 풍찬객점이었다.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겉에서 보기에 정갈해 보여 들어간 것인데 실제 들어가서 보니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북적거린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저녁 이 시간에는 어느 객점이든 사람들로 붐빌 것이라는 생각에 송추는 점소이가 이끄는 대로 이층 난간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리탕 한 그릇!”
짧게 주문을 토해내자 점소이가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네네, 곧 대령하겠습니다.”
점소이가 막 돌아서려 할 때 송추의 말이 그를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