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후흑문주 심온 4
1. 대법시행
욕설대회에서 우승한 송추는 은천협이 특별히 마련해 준 거처에 임시로 머물게 되었는데, 매 시간마다 거의 황홀지경이라 할 만했다.
역시 세상에서는 하나만 제대로 잘하면 인생이 행복해 진다는 교훈은 틀림없는 명언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욕을 제일 잘해서 평생 호강을 한 사람이 없지만 이제 자신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것이니 기쁘면서 또한 자신 스스로가 여간 대견하지 않았다.
송추의 일과는 온갖 즐거움으로 점철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천하에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들이 대령하는데, 그중 한 명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두 명은 다리를 주물러 주며, 다른 한 명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비록 미녀들과 잠자리를 하지 못한 것이 약간은 서운한 기분이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식사는 최고급이었다. 그것도 손 하나 까닥할 필요가 없었다. 선녀같이 아름다운 미녀들이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고 있으면 알아서 과일이며 해산물이며 온갖 진미를 입 안으로 넣어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배가 꺼지는 동안에는 온갖 춤사위가 곁들여진 눈요기가 이어지는데, 정녕 이곳이 신선의 땅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매일같이 안락한 꿈같은 나날을 보내던 중 약 열흘이 지났다. 열흘이라는 기간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바로 장주 은천협이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조한 날인 것이다.
‘자자, 시팔 어서들 오셔. 평생 먹고 쓸 돈을 지니고 매일같이 이러한 삶을 살 테니까 말야.’
* * *
송추가 열에 들 떠 있던 기간 중 은하전장의 한 별실에서는 송추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점점 세밀하게 그려져 가고 있었다. 물론 송추가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는 건 당연했다.
그것은 아침 햇살처럼 영롱하고 해맑은 미래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소감을 묻는다고 해도 이보다 더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의 계획이었다.
논의자들은 네 명, 후흑문주 심온, 그의 사숙 이호, 그리고 송추를 제자로 받아들일 통증왕 굉운과 장주 은천협이었다.
솔직히 지금 송추가 누리고 있는 열흘 간의 행복은 애초 계산에는 없던 내용이다. 하지만 욕설대회를 빠짐없이 관전하고 그 결과에 흡족해한 통증왕 굉운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여 말미를 준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앞으로 사부로서의 길을 걸어갈 통증왕이 이렇게 제안을 하니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송추는 희락의 날들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따져보면 앞으로 송추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하고 괴로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열흘이라는 기간은 마지막 만찬과 같고, 마지막 여행과 같으며, 마지막 휴식인 것이다.
둥그런 탁자에 빙 둘러앉은 가운데 굉운이 은천협을 향해 말했다.
“돈은 준비가 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은천협의 얼굴에는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뭔가를 의심하고 넘겨짚는 식의 표정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말씀하시구려.”
“처음 말씀하실 때는 우승 상금이 필요없다고 하셨는데 어찌 지금은 다시 돈이 필요하다고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 오해는 마십시오.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랍니다.”
“하하하하하!”
통증왕 굉운이 크게 웃자, 그의 우측에 앉아 있던 이호가 눈을 찡그리고 바라보다가 결국 한마디를 뱉어냈다.
“어째 생각해 보니까 돈 욕심이 나든?”
굉운은 일순 정색을 하고 답했다.
“그 까닭은 우승한 자에게 돈을 준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때문이지요.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하하. 제자 덕에 호강하겠습니다, 형님.”
좌측 편에 앉은 심온도 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러나 비록 웃음을 지었다고는 하나 그 말 속에는 배배꼬인 심사가 가득하여 척 듣기에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물론이지. 그러나 어쩌나, 내 인생에 그런 복은 없으니 말이야. 장주, 내가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소. 고스란히 돈을 돌려주겠노라고 말이오. 이 사나이의 약속이니 믿어도 좋소.”
“아니, 아닙니다. 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도리어 은천협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서인지 양손을 저으면서 만류했다.
“사나이의 약속은 천금과 같은 법.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소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확실히 이야기해 둘 것이 있소. 송추를 고치는 것이 당장에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말이오. 일 년 정도의 기간이 걸릴 것이니 그때 가서 장주의 눈을 붕어처럼 튀어나오게 만들어주겠소.”
은천협은 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사람이 비록 이십대 초반으로 보여도 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으며 무림에서는 초절정의 고수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 있어도 결국은 해내고 말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일 년이라는 시간은 매우 짧지요. 사람의 인성이 일 년에 걸쳐 바뀐 것이 아닌 만큼 일 년은 기적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혹 일 년이 넘는다고 해도 상관없으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닥치시오! 사나이의 약속은 천금과 같은 법이오!”
통증왕이 큰 소리로 외친 탓에 은천협은 물론이고 이호, 심온까지 일제히 쳐다봤다.
그의 목소리가 사나이의 약속이라는 말뜻과는 정반대로 여자의 고음을 흉내 내어 뾰족하게 외친 탓이기 때문이다.
이호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너 미쳤지?”
* * *
느긋하게 은천협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던 송추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이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저 새낀 또 뭐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어오는 건 통증왕 굉운이었다.
‘저, 저거 손에 든 건 또 뭐야? 나쁜 새끼, 날 어떻게 하려는 수작인 거냐?’
굉운의 오른손에는 송추가 충분히 긴장할 만큼의 크기를 가진 돌덩이가 들려 있었다. 송추가 아닌 누구라도 모르는 사람이 무표정하게 돌을 들고 다가오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송추는 이제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닌가! 없을 때는 빼앗기는 두려움이 없었고, 크게 생명에 대한 염려도 없었지만 이제 많이 가진 자라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이 새끼야, 넌 뭐야! 저리 꺼지지 못해! 가까이 오지마!”
송추는 욕설대회에서 상대를 무너뜨렸던 욕의 정화를 담아 공격했다. 하지만 통증왕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아, 이 돌 때문에 놀란 모양이로구나. 나는 장주의 부탁으로 앞으로 네게 무공을 가르치게 될 사람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네 사부가 될 사람이지.”
그제야 송추는 긴장을 풀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새끼, 그러면 그런다고 말을 하고 들어와야지. 야! 근데 나 사실 무공 따윈 필요없거든. 그냥 조용히 꺼져줄래?”
기분이 나빠지기에 충분한 말임에도 굉운은 흐뭇하게 웃어줄 따름이었다.
“잠깐만 생각해 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무공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들어섰을 때 말이다. 내가 적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널 죽이러 온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상금을 받은 부자인데 그냥 이 돌로 네 머리를 박살 내버린다면 설혹 천하게 네것이라도 무슨 소용이겠냐는 거다. 너무 간단하지?”
“흠, 네놈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구나. 하지만 날 지키는 건 충분히 무공이 강한 자를 고용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지랄이야, 지랄은?”
“음, 너는 은 장주의 경우를 생각하는가 보구나. 물론 은 장주는 돈은 많지만 무공을 배우지 않았지. 단지 그 주변에 고수들이 많을 따름인데… 은 장주와 너와는 많은 차이가 있단다. 은 장주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따르지만 너 같이 욕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녀석에게 과연 무인들이 진정으로 따를까? 돈을 보고 곁에 머무는 자라면 언젠가 네가 자고 있을 때 이렇게 네 목을 쥐어 터뜨려 버리고 모든 돈을 훔쳐 달아나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누구보다 무공을 더 열심히 익혀야 하는 것이지.”
굉운은 ‘이렇게 네 목을 쥐어 터뜨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손에 들고 있던 돌덩이를 움켜쥐어 바스러뜨려 버렸다. 그것은 말의 효과를 수백 배로 증가시켜 일순 송추는 자신의 목이 쥐어터지는 느낌에 양손으로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은 장주, 그 늙다리가 어련히 알아서 사람을 보냈을라구. 대회 우승자인 내 목숨이 쉽게 달아난다면 그건 은 장주에게도 체면이 서지 않는 문제여서 이 사람을 내게 보낸 것이로구나. 그럼 배려를 내 받도록 하지. 그나저나 이 새낀 엄청 쎈 놈이구나.’
속으로 중얼거리길 마친 송추는 양팔을 활짝 벌리고 환영의 태도를 보이면서 말했다.
“좋다, 내 무공을 배워주마. 짜식, 어때 기분 좋지? 좋아, 좋냐?”
“아무렴 좋구 말구. 그럼 일단 구배지례를 통해 사부와 제자로서의 관계를 맺도록 하자.”
“응? 야, 그런 거 안 하면 안 되냐? 뭘 그런 형식을 따져?”
“그게 싫다면 아예 관두지.”
이젠 완연히 심리적 우위를 차지한 굉운이 슬쩍 튕겼다.
역시 예상대로 송추는 곧바로 반응했다.
“알았어, 알았다구. 새끼 엄청 성질 급하네. 그렇게 살면 못쓴다, 씹새끼야. 좋아. 내가 한다, 해.”
잽싸게 구배지례를 성의없이 마친 후, 화사하게 웃으며 일어선 송추는 불쑥 거의 닿을 듯이 다가선 굉운을 보고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자야, 너는 나의 제자다. 일단 맞고 시작하자.”
그때부터 굉운은 사정없이 패버렸고, 송추는 사정없이 몰매를 맞았다. 구타음이 퍼져 나가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호와 심온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기가 막힌지 아무 말도 못하고 패는 광경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사숙, 정말 통증왕 맞습니까?”
심온의 물음은 당연했다. 통증왕이 왜 저런 식의 막주먹으로 통증을 주냐는 것이다.
이호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쟤가 원래 저래.”
* * *
연공실에는 총 네 사람이 자리했다.
그들 중 가장 의욕에 넘친 자는 굉운이었고,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이호였으며, 호기심으로 가득한 건 심온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송추였다.
송추는 상체를 벌거벗은 채 가부좌를 틀고 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자는 것인지, 정신을 잃은 것인지 고개를 힘없이 앞으로 떨구고 있었다.
그의 등뒤로는 굉운이 바짝 붙어 앉았으며, 다시 그의 뒤로는 양쪽으로 벌려 이호와 심온이 자리했다.
“너 이거 사기치는 거면 죽는다!”
이호는 천진난만하지만 비교적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심사는 지금 다소 뒤틀린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식으로 내력을 보태주는 것이 일명 <욕을 제어하는 신기한 대법>과 좁쌀 만큼도 연관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굉운의 말에 의하면 <욕을 제어하는 신기한 대법>을 시전한 후엔 이 천하의 욕쟁이가 더 이상 욕을 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호는 자신이 고령자임에도 어린아이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신기함의 결정체임에도 불구하고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세상에 어떻게 그런 기괴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이냐?’라고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른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이 안 믿어주시면 어쩝니까? 이제껏 제가 두 눈 부릅뜨고 거짓을 고한 적이 있었습니까?”
굉운은 이외도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무학의 깊이와 변화는 헤아리기 힘들다고 역설하며 무공에 있어서는 이 아우가 달리지만 통증술에 관해서는 자신에게 맡기라며 가슴을 치며 장담했다.
이에 이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으며, 심온은 애초부터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에 일체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형님, 준비되셨습니까?”
“네.”
이호가 과장되게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영낙없이 어른이 억지로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 해야만 하는 어린아이였다.
“아하, 형님 힘 내시라구요. 아우, 준비되었지?”
“아까부터 대기 상태인걸요. 지루해 죽겠어요.”
“하하하하, 그럼 서둘러야겠는걸.”
말을 끝냄과 동시에 굉운의 손이 송추의 등의 요혈을 한차례 가격하자, 송추가 졸다가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화들짝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바로 눈앞에 벽이 보이고, 이내 자신의 상체가 벌거벗겨졌다는 것을 깨닫고 막 고함을 내질렀다.
“이 개자식들아, 왜 옷을 벗기고 지랄이냐? 날 강간해 버릴 셈이냐? 난 맛없으니 딴 놈들을 알아봐라!”
송추는 역시 욕설대회 우승자다웠다. 아무리 수다스러운 인간일지라도 혼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게 되면 주변을 살피고 잠시 동안은 진지하게 상황을 예의주시할 터인데 깨어나자마자 욕을 퍼부으니 우승자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아, 이리 와라. 나랑 한판 붙자. 신경줄을 뽑아 옷을 해 입어버리겠다. 이 잡놈의 새끼……!”
그야말로 높이 쌓은 둑이 터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욕은 쉴 새 없이 연공실 안에 울려 퍼졌다.
송추의 욕이 멈춘 것은 한순간 귀가 아닌 머리 속이 쩌렁 울리면서 한 음성이 들려온 뒤였다.
-이것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기 힘든 기연이다. 서투르게 행동하여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전신 불구로 살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편집자-전음입니다).
머리로 들려오는 것이라 누구의 음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송추는 이것이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염병할 놈, 난 무공 따윈 필요없으니 얌전히 모가지를 숙여라. 썅!”
욕은 거칠기 그지없었지만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다. 송추는 정녕 기연 따위는 한푼의 관심도 없었으나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손아귀에 들려진 돌멩이가 무슨 밀가루조각 부서지듯 했던 터라 결코 허튼소리만은 아닐 것 같았다. 불구로 지내면서 욕을 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