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75화 (75/125)

# 75

노인이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맛이 어떠십니까?"

"최고라니까. 무슨 말이 필요해. 말 시키지 말고 저리 꺼져. 으걱 으걱. "

노인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총관을 비롯한 부하들의 안색이 핼쓱해지고 말았다.

'도대체… 뭐냐, 이건…….'

'이런…….'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 처절히 이해되기도 했다.

노인은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제왕성을 나왔다.

조금 걸어갔을 때 그의 눈앞으로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맺히더니 곧이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제야 왔군. 난 오지 않는 줄 알았구먼."

"수고가 많았네."

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다름 아닌 제왕성주 엽지학이었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자네가 아니라면 내가 은거를 깨고 이렇게 나오기나 했겠나?."

"후후, 그래서 내가 더 고마워하는 것 아닌가."

"이제 어느 정도 고마움을 알았을 것이니 내 할일은 다 한 셈이네."

"암. 나중에 내 한번 찾아감세."

"천엽주(泉曄酒)는 필수야."

"하하, 당연하지."

노인은 현 개방 방주 종추의 사숙(師叔)인 천탐신걸(千耽神乞) 취명(醉明)이었다. 그는 걸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중원 사대 현자 중 한 명으로 불리고 있기도 했다.

번잡한 강호를 벗어나 자연을 벗 삼아 은거하던 중 절친한 제왕성주 엽지학의 부탁을 받아 깨달음을 주고자 이번에 강호에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외전 2. 위대한 청부(請負)

월성(月成)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친구의 주검 앞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응이 죽다니…….'

친구 하응은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싸늘히 식어 있었다.

"복수다, 복수! 내 이 자식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 테다."

그의 두 눈엔 핏발이 섰고 온몸은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의 분노를 누군가가 지켜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 반응은 월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누어질 것이 분명했다.

한 행 처리

월성을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

―절친한 친구가 죽다니, 정말 안타깝구려. 반드시 복수가 성공하길 비오이다.

월성을 잘 알고 있는 강호인들.

―야, 새끼야. 복수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복수냐. 속 시원하게 잘 죽었어. 하응 같은 놈들은 지금 죽은 것도 상당히 늦은감이 있어. 그리고 월성, 이 자식. 너도 얼른얼른 죽어 자식아. 강도에 강간범들이 무슨 복수한다고 설치고 난리야.

한 행 처리

그렇다. 월성… 그는 일명 도둑놈이자 강도인 것이다. 강호에서는 탐욕이 극에 이르렀다 하여 극탐(極貪)이라는 별호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하응은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색마(色魔)였다. 그래서 얻은 별호는 색탐(色貪). 둘을 합쳐 강호에서는 신탐쌍절(神貪雙絶)이라고 불렀다.

별호는 그런대로 운치가 있어 보이지만 두 놈 모두 인간성은 최악이랄 수 있었다. 월성은 비록 말도 안되는 일이라 할찌라도 한번 한다면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가진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옳았다.

"난 복수하고 만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천선장주 오씨 늙은이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

월성이 말한 늙은이는 오비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오비원의 이름 앞에는 몇 가지 수식어가 항상 먼저 붙는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천하제일고수.

―천선장주.

―덕망과 지혜를 겸비한 자.

지금 이 위대한 무인을 향해 패역무도한 강도 월성이 택도 없는 복수의 칼을 뽑아든 것이다. 지나가던 개가 성질을 내며 가슴을 치고 거품을 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오비원의 딸을 강간하려다가 모가지가 떨어져 나간 색마 친구 하응을 위해서 말이다.

* * *

그래도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했던 세 친구의 말을 들어보자.

"월성, 내가 친구라서 자네에게 해주는 말이니 새겨들어. 건곤진인 오비원을 죽이기 이전에 말일세.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네."

사기꾼 친구 모이겸의 말에 월성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 그게 뭔가?"

"먼저 장터에서 계란을 하나 사. 많이 살수록 좋아."

"응."

"눈을 들어 적당한 바위를 하나 찾아."

듣는 월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다음엔?"

"그리고 산에 올라가는 거야, 정성껏. 알겠나?"

"그리고는."

"그리고 준비한 계란으로 바위를 내려쳐. 알았나? 내려치는 거야. 안 깨지면 계속 내려쳐. 그러다 계란이 바위를 깨뜨리게 되면 그땐 오비원도 죽일 수 있을 것이네."

태연한 모이겸에 반해 월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복수를 도와주기는커녕 조롱하고 있다니…….

"이 나쁜 놈, 니가 그래도 친구냐. 죽어라 이 자식아."

월성의 주먹질에서 시작된 싸움은 반나절이나 계속됐고 모이겸의 머리통이 피범벅이 되고 월성의 어깨가 탈골될 때서야 둘의 싸움은 비로서 멈춰졌다.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모든 친구들은 월성의 복수 계획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히려 혹시나 건곤진인 오비원에게 잘못 보일까봐 죽은 하응과 알고 지냈다는 것조차 잊으려 하는 녀석들이 많았다.

전문 소매치기[도복만].

―가능하지. 암 가능하고 말구.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는 법. 자넨 아침에 일찍 일어나 늘 서쪽을 바라보게나. 그리고 아침해가 서쪽에서 떠오른다면 서슴없이 내게 달려와. 망설이면 안 되네. 복수는 중요하니까 말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 우리의 복수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네. 그땐 내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달려가겠네.

고리대금업자[고합].

―하응 그 자식 내 돈 빌려가서 갚지도 않고 죽어버렸어. 월성 자넨 하응과 제일 친하지 않았나.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자네가 하응 대신 돈을 갚아주는 것이 가장 이치에 합당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사기꾼[천보].

―으응? 넌 누구길래 나를 아는 척하는 거냐? 그리고 하응은 또 누구야. 허허, 요즘은 별 희안한 놈들이 다 찾아오네. 애들아 당장 이 미친 놈을 쫓아내라.

그 외에도 대여섯 명이 더 있었지만 위에 세 친구와 오십보 백보였다. 어느 누가 있어 천하제일고수 오비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월성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복수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무모한 성격의 소유자라지만 대놓고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하제일검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잖은가? 이 복수를 위해 다음으로 알아본 곳은 청부 살수 조직이었다. 그는 그동안 도둑질과 강도 짓을 통해 모아둔 총 재산을 털어 청부 조직을 찾았다. 중원 제일의 살수조직 흑월단(黑月團)을 찾아가 월성이 진중하게 말했다.

"건곤진인 오비원을 죽여주시오."

이 몇마디 되지도 않은 말, 이 말 때문에 월성은 흑월단에서 뼈를 묻을 뻔했다. 살아났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흑월단의 단주를 비롯한 장로들이 불을 뿜듯 소리쳤다.

"이 자식아. 차라리 우리보고 함께 자결을 하라고 그러지 그러냐!"

"너 대체 누가 보낸 거냐. 우리 조직을 무너뜨리려는 음모가 분명해. 넌 어디서 왔어. 우리의 맞수인 청살단에서 보냈지?"

"안 되겠어. 이 자식 고문해!"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흑월단에게는 조직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리 청부 조직이지만 청부를 받지 말아야 할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건곤진인 오비원이다.

"으아아아아악~!!"

월성의 비명 소리가 흑월단의 고문실을 울린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흑월단주 노둔아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고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쭈~욱~"

고문은 참으로 다양했다. 손톱뽑기, 칠 일간 잠 안 재우기. 물 고문, 머리털을 비롯한 몸에 난 모든 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기. 인두로 가슴 지지기. 눈동자를 바늘로 찌르겠다고 위협하기, 밥 굶기기,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물 붓기, 분근착골수로 모든 뼈들을 탈골시키기. 그 외에도 이루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고문을 약 삼 개월 동안 당한 후에야 월성은 간신히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고문의 막중함에 비해 흑월단주의 마지막 말은 맥빠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해. 그래도 자식아 건곤진인을 죽여달라는 것은 너무 한 거야. 다음부터 그런 말 하지마, 알았지? 험험. 험험…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정말 미안해."

토닥토닥.

씨익 웃으며 어깨를 두들겨 주는 흑월단주의 위로를 받으며 월성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섰다.

눈물을 머금은 월성의 모습은 참혹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머리털은 다 뽑혀 대머리로 변신했고, 분근착골수로 인해 뼈가 다 한번씩 탈골되었다가 붙여졌기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서야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 상태로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래 못 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너에겐 분명 무엇인가가 있어."

흑월단을 제외한 살수 조직 여섯 곳에서 던진 동일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월성을 갈구며 고문했다.

"말해. 말하란 말이야. 너의 진정한 목적은 뭐야?"

"저는 단지 오비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을… 으아악~"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이 자식 죽어라, 죽어."

한곳에 두 달씩, 고문의 기간은 일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월성이 일이관지 소하천을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랄 수 있었다. 그는 강호에서 최고의 기인으로 통하는 이가 아니던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이때를 위해 만들어진 말인 듯했다.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도와주마."

"정말입니까?"

"자식, 너는 이제껏 속고만 살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청부를 해라."

"누구에게 말입니까?"

"전설의 살수에게지."

"네? 전설의 살수라구요?"

"그래, 바로 전설이다. 너는 먼저 청부의 조건을 갖추어라."

"뭐든지 하겠습니다."

"우선 비급을 익혀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뒤이어 이루어질 것이다."

"어디에 있습니까?"

"만학서원의 귀퉁이에 모아두었다."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비급에 기록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또 실천했다. 그의 몸은 날로 건강해졌고 마음도 풍요로워졌다.

만나는 사람에 게 항상 먼저 인사했고,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가끔 복수의 마음이 약해지려 할 때면 쓰디 쓴 돼지 쓸개를 입에 물었다. 그 자극은 마음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고, 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월성의 나이 사십삼 세가 되었을 때 그는 비급을 연마해 오 성 정도의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의 몸은 몰라볼 정도로 좋아져 예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는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했다.

이십 년 뒤

월성의 나이 오십삼 세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전 중원을 위진시킬 정도가 되었다.

별호도 참으로 다양하게 불려졌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철의 사나이', '덕성(德聖)', '개과천선(改過遷善)의 화신', ' 중원제일의 인상 좋은 사람 서열오위' 등이었다. 노력은 끝내 그의 인상마저 변화시킨 것이다.

한 행 처리

삼십 년 뒤.

영락제 십 년, 그는 드디어 모든 비급을 온전히 터득하고 완성했다. 이제 곧 청부를 이루게 될 날이, 복수의 날이 이제 눈앞에 이른 것이다.

천선부 앞에는 많은 사람들과 화환들이 즐비했다. 화환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환 앞에 기록된 글귀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소림사).

―고 오비원 대협의 영전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명복을 빕니다(무당파).

―평소 고인의 은덕을 되새기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화산파).

모든 사람의 얼굴이 천하제일 고수 오비원의 죽음을 애석해할 때 월성의 가슴은 환희로 물들었고 두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드, 드디어… 복수를 했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어. 흑흑… 내가 그동안 말씀대로 행한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오비원이 죽을 때 월성의 나이 칠십이 세였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월성은 백오 세가 되어 죽었다. 그가 죽은 후 그가 걸어온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고자 했다.

그는 과연 어디에 기반을 두고 살았기에 훌륭한 인격체로서 마지막까지 살다 갈 수 있었나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어떤 이는 월성이 무공의 달인이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학문적 성취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집에 있는 서적을 발견한 모든 사람들은 비로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발견된 책들은 이러했다.

'장수만세(長壽萬歲)', '진시황(秦始皇) 무작정 따라 하기', '공동장수구역(共同長壽區域) 신비촌(神秘村)', '내 몸 내가 고치련다', '장수문(長壽門)의 후예(後裔)', '할 수 있다. 특별판 장수 비결(부록 있음)', '장수의 시대', '장수의 계곡 나우식가', '나도 장수할 수 있으면 좋겠다', '황제의 검에 숨겨진 비법'.

이외에 음식 조절에 대한 서적도 만만치 않았다.

'표류후식(漂流後食)', '삼우인식단(三友人食單)', '타락식단(墮落食單) 멀리 하기', '천상비뢰식', '만선문(萬善門)의 후식(後食)'.

하나같이 쟁쟁한 초절정 식이요법 장수 비결 서적들이었다.

그의 집안 구석구석 벽과 천장마다 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붙어 있었다.

1. 낙천적으로 생각하라.

2. 화를 승화시켜라.

3. 적당한 시간 수면을 취하라.

4. 물은 꼭 생수를 마셔라.

5. 몸을 청결히 유지하라.

6. 밥은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7. 술을 마시지 말라.

8. 적절한 운동을 하라.

9. 아침 식사는 반드시 해라.

10.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들어라.

모두의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일이관지 소하천은 월성을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오비원을 죽일 수 있는 전설의 살수가 딱 한 분 계시지. 그리고 충분히 들어줄 수도 있는 분이시라네. 아니, 반드시 들어주실 거야. 그분은 이제껏 어느 누구의 청부도 거절해 보신 적이 없거든. 그러나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건 자네가 복수를 하고자 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야. 그 청부를 수락할 살수는 바로 하늘이기 때문이지. 그 누가 천명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말이야. 어떤가! 자네는 하늘에 청부를 해보겠나?”

<4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