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대안은?”
감정에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대안?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대로 덮어둘 수 없는 일이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좌중의 머리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수만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가 지우고 또 떠올리길 반복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홍추! 홍추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로 풍목아였다.
형벌당주 좌염이 고개를 갸웃했다.
“만박귀자 홍추 말입니까?”
“그래, 그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 염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홍추라…… 그가 정말 알고 있을까? 비록 그가 유체 이탈이 가능하여 강호 사정 중 모르는 것이 없는 자로 불려지곤 있지만, 세상천지의 모든 곳을 다 다니는 건 아니고, 또한 유체 이탈 또한 일 년 중 네 차례 정도가 고작이 아니던가?”
노공도 염천의 생각에 동감의 뜻을 비쳤다.
“홍추가 만약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을 리 만무하잖은가?”
노공이 이처럼 말한 것은 세 차례 정도 홍추가 비밀스럽게 몇 가지 사실을 알려와 해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추는 정파와 사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것은 복잡한 일들에 연관되지 않기 위함일 뿐 사실은 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였다.
그런 그였기에 만일 청룡장의 문제를 알았다면 진작 달려왔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 홍추를 대안으로 제시했던 풍 장로가 잠시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았었는지 머뭇거리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장로 갈유가 나섰다.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군. 조금만 각도를 바꾸면 일은 간단히 해결된다네. 생각해 보게. 홍추가 청룡장에 대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 모르고 있다고 해도 그를 찾아 그의 능력을 발휘하여 적의 소굴이 어디이며 적의 수뇌가 누구인지 알아내면 되는 것이니까.”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말이었다.
갈유는 이어 심온을 향해 시선을 옮기고는 말을 이었다.
“문주님, 홍추가 알든 모르든 우리는 이 사실들을 설명하여 그를 설득해야만 합니다. 그가 돕는다면 이 일은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온은 시선을 멀리 두고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지. 홍추가 우리를 돕는다면 적의 수뇌를 따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고, 적의 소굴을 침투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외부에서 각개격파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편 다른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흠, 만약 홍추가 청룡장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왜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무엇이 그를 붙든 것일까?’
두 눈을 질끈 감아 얽힌 생각들을 단절시킨 심온이 한순간 눈을 뜨며 말했다.
“좋다. 홍추를 찾는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그를 찾아야 해.”
그 뒤 이야기는 열 명의 감시자의 죽음에 대한 흔적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가로 이어졌다.
몇몇이 독살당한 흔적을 남겨놓자고 했지만 대다수는 아예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괜히 어설픈 흔적을 남겨놓았다가 실마리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예 흔적을 없애는 것으로 감시자들이 다른 일로 얽혀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홍추를 찾는 일은 추적 전문인 만추당이 맡았다.
얼마 못 가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모두에게 한 달여가 지날 때, 만추당주 진효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만박귀자의 처소는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현재로는 그가 스스로 처소를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은 실마리는 찾았으니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진효.
기대에 부풀어 있던 심온을 비롯한 모두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을 때 서신 하나가 날아들었다.
―흔적을 찾아 감숙성 남단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바늘구멍만큼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만추당의 모두는 만박귀자를 찾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효.
암담한 내용 탓에 후흑문은 한동안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 청룡장의 일은 현 강호의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당연히 해결해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고 기다려야 한다니 그 답답함은 말로 형용키 어려웠다.
이제껏 불가능을 모르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심온 또한 외출을 삼가고 거처에 틀어박혔다. 가끔 바깥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었지만 그때도 그의 얼굴에선 웃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훌쩍 여름이 지나갔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후흑문도 다시 예전의 활력을 찾아갔다. 그 중심엔 원혜가 있었다. 그동안 원혜는 문 외곽 쪽에서 담유설과 함께 지내면서 가끔 모습을 보일 뿐이었는데, 차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멀리서나마 후흑문인들을 보면서 손을 흔들다 사람들이 바라보면 부리나케 달려 숨어버렸지만 그녀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어둡기만 하던 심온도 점점 웃음을 찾아갔고, 조급하게 먹었던 마음에서 이제는 장기전을 준비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서 평온을 되찾았다.
지금 당장 달려가지 않더라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각오는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된 상태였다.
9. 상처받은 은천협
전 중원에서 부자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은하전장의 주인 은천협은 요 며칠 밤잠을 통 자지 못하고 있다.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제껏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많은 선행을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아랫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들 하나하나를 각기 존중받아 마땅한 인격체로서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평생 쾌락과 웃음을 쫓아 돈을 써도 닳지 않을 만큼의 재력과 그에 더불어 남을 위할 줄 아는 따뜻한 덕과 인자함을 갖춘 그야말로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와 같음에도 모두가 다 그를 부러워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까닭인즉, 그는 날 때부터 꼽추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부러 잊으려 했으나 의식의 깊은 곳에는 신체의 기괴함에 대한 강박관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꼽추라는 사실도 가끔 잊고 지내는 때가 많았으니 크게 상심하거나 슬퍼하진 않았다.
그의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의 장애를 해결하고자 세상에 이름난 명의란 명의는 다 동원하여 아들의 몸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고 했으나 의원들은 한결같이 곱사등을 제거할 경우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말들뿐이어서 결국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꼭 불행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타고나 빼어난 수단을 발휘하여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을 수백 배로 불려 오늘날 명성이 드높은 은하전장을 만든 것이다.
그런 그가 이 밤, 잠을 설치는 데는 단지 꼽추라는 사실이 새삼 서러워서가 아니었다. 이제 그의 나이 환갑을 훌쩍 넘은 때라 더 이상 소년 시절의 서정적인 슬픔에 눈물을 흘리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답답한 원인은 신뢰의 붕괴, 믿었던 이들로부터의 배신 때문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건 닷새 전으로, 그가 우연히 집안 하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였다.
막 담을 끼고 돌아가려 할 때, 그는 들려오는 소리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담 저편으로 세네 명의 하녀들이 수군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하전장에는 백여 명이 넘는 하녀들이 있어서 일일이 목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들의 목소리의 맑기와 높이를 통해 이제 이십대 초반의 한창 꽃다운 나이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은근한 호기심이 일어 벽에 달라붙어 숨을 죽이고는 하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봐,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혹시 꼽추의 귀에 우리 말이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처음 들려온 말에 은천협은 당장에 얼굴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집에서 부리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욕을 하거나 하찮게 별명을 붙여 부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녀들 중 하나가 꼽추라고 말한 것이다. 은하전장에 꼽추는 오직 그 혼자뿐이었으니 다른 사람을 지칭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들으면 들으라지. 그 늙다리는 아마 들어도 우리에게 환히 웃어줄걸! 그것이 아마 자비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멍청이가 그런 자비라도 있으니 사람 구실하는 거지.”
“흐흐, 네 말이 맞아. 아주 꼴사납지. 그러면 누가 저를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나 봐.”
“저번에 꼽추가 내 가슴을 쳐다보는데 눈빛이 아주 은근하더라.”
“얼마 전에 새 부인을 들여놓고 널 그렇게 보더란 말이야?”
“그렇다니까. 아주 내 옷을 투시하고 가슴을 샅샅이 훑는 것 같아서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몰라.”
“엄청 웃긴 새끼네. 그렇게 밝히는 놈인 줄은 몰랐는걸.”
거기까지 들으면서 은천협은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꼽추라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이 분노는 자신이 진심으로 했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조롱받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여자를 탐하는 색귀로 거론되는 것 또한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비록 얼마 전에 새롭게 부인을 들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부인과 사별하고 외로움 속에서 지내다가 마음을 살필 줄 아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별히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녀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꼽추가 밤에 힘은 좀 쓴다던?”
“말도 마. 나이가 예순이 넘었는데도 젊은 녀석들 못지않다잖아.”
“크크크, 하긴 돈이 많으니 몸에 좋은 걸 얼마나 많이 처먹었겠어. 산삼이다 하수오다 기괴한 벌레 같은 것도 정력에 좋다면 남자들은 별의별 것을 다 처먹으니 꼽추도 아마 무진장 먹었을 게야.”
“자식, 그 정도면 뭐 하루 내내 잠도 안 자고 가능하겠는걸.”
“야야, 말 좀 그만 해라. 벌써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것 같잖아.”
“하하하하.”
“호호호호호.”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모양이지?”
여인들은 스스로 음탕한 말을 하고 그것이 즐거운지 한참이나 깔깔거렸다.
“씨발새끼, 그 돈 나에게 좀 나눠 주면 얼마나 좋아.”
“흐흐, 이년아, 차라리 첩으로 들어가지 그러냐. 꼽추가 죽고 나면 국물 좀 떨어지지 않겠어? 아니면 냅다 부인을 몰아내고 네가 안방을 차든지 말이야.”
“아서라, 늙다리에다가 꼽추는 사양이야. 이래 뵈도 돈에 팔려 가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구.“
“잡년, 니가 잘도 그러겠다.”
“사람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은 건 싫은 거야. 알겠어? 난 몸 파는 창녀가 아니라구.”
“이년아, 그렇게 말하는 년이 방금 전에는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고 하냐?”
“크크, 나 혼자 있을 때야 무슨 짓이든 못해. 하지만 정말 난 꼽추 따윈 싫다구.”
“뭔 소리냐, 난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 꼽추면 어떻고, 고자면 어떠냐? 평생 남부럽지 않게 호사하면서 사는 것이 소원이야.”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그만 지랄들하고 어서 가자.”
“좀 늦으면 어때서 그래.”
“이년아, 그래도 여기만한 데가 어딨냐? 괜히 밉보여서 짤리면 우리만 손해라구.”
“알았다. 그년들 보채기는…….”
거기에서 네 하녀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들은 서로 낄낄대더니 점점 멀어져 갔고, 은천협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충격에 더 이상 서 있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눈앞에선 늘 공손하고 예의 바르던 하녀들.
이것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게다가 이제껏 등 뒤에선 이러한 욕설들이 난무했다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다.
순간 은천협은 이러한 사실을 은하전장을 은밀히 지키는 여러 고수들도 알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눈과 귀가 밝아 틀림없이 하녀들의 이러한 행태를 봐왔을 것이다.
그들은 무인들인지라 이러한 내용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어쩐지 자신만 모른 채 이런 욕설이 돌고 있었다는 생각에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일로 수일을 괴로워하였고, 총관을 시켜 흉을 보던 네 명의 하녀를 쫓아냈다.
그럼에도 마음 가득 억울함과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가장 믿는 심복 중의 심복인 총관 금량을 불러 아픈 마음을 토로했다.
뭔가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의 이야기가 다 마쳐졌을 때 금량은 조용한 음성으로 한 가지를 제안했다.
“해결의 벼랑, 후흑문에 의뢰를 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후흑문?”
“그들은 의뢰를 수락하는 것이 문제일 뿐, 수락만 하면 어떤 일도 그들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후흑문이라… 후흑문…….”
***
10. 통증왕, 제자를 구하다
“소식 전합니다.”
총관 오교가 집무실로 들어오면서 내뱉은 말은 공허한 메아리만 남겼다. 집무를 위해 존재한 집무실은 지금 침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자에 한껏 상체를 젖힌 채 심온이 조는 차원을 넘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불사천마다! 불사천마가 왔다~”
오교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외치자 심온은 화들짝 경기를 일으키면서 두 팔을 휘젓다가 어어어, 하면서 의자가 통째로 넘어가 뒤로 나자빠졌다.
“뭐야? 불사천마가 어떻게 됐다고?”
넘어진 순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심온이 황급히 물었다.
심온은 불사천마가 반로환동을 통해 승천하려다 결국은 햇빛에 타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께름칙한 상태였기에 불사천마가 귀신이 되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던 터였다.
물론 불사천마가 살아오면서 수천에 이르는 인명을 살상했던 것을 생각하고, 또 그가 살 만큼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죽었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