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63화 (63/125)
  • # 63

    더욱이 아홉 명의 검수가 불리함을 느끼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심장을 찔렀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객방 안이 질식할 것만 같은 무게에 짓눌렸다.

    심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차례의 흐트러짐이 없었고, 얼굴은 굳어 있었던 까닭에 모든 수뇌들 또한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가 없었다.

    심온은 이어 환사를 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환사,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네. 지금 느낌으로는 만약 여기에서 길을 잃는다면 영영 그들을 놓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속하, 힘을 다하겠습니다.”

    사로잡힌 복면인은 쓰고 있던 복면이 벗겨지고 전혀 구멍이 뚫리지 않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복면이 벗겨진 그의 얼굴은 사십대 초반의 중년 사내였는데 견식이 넓은 후흑문도들 중 누구도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객방의 한가운데 의자에 앉혀졌고, 그와 마주하여 환사가 서 있었으며, 객방을 빙 둘러 심온과 장로들이 에워싸는 형태로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환사가 보자기를 벗겨냈다.

    그러자 살기가 가득 오른 눈빛이 그대로 환사의 눈을 찔러갔다.

    그 광경을 보건대 그는 보자기 안에서도 계속 눈을 부라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은 빨리 죽어야 할 사람인데 왜 죽이지 않고 이렇게 억압해 놓은 것이냐는 식의 눈빛이었다.

    “눈빛이 매우 훌륭하군. 나도 자네와 같은 눈빛을 가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네그려.”

    환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두 눈에 부드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장로들은 곧바로 기의 벽을 펼쳐 냈다. 이것은 외부로 안의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기벽 안이 외부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집중력이 배가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우웅, 하는 옅은 진동과 음향이 객방 안을 울렸고, 거기에 맞추어 환사의 음성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너무 무섭게 노려보지 말게. 이 늙은이는 담력이 대단치 못해서 사나운 눈빛을 보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제대로 고문다운 고문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거든. 그럼 일단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내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줌세. 아주 먼 옛날이었다네. 한 마을에 매일 밤마다 꿈을 꾸는 사람이 있었다네. 너무 옛날 일이라 그 사람 이름은 잊어버렸네만 사십대 초반의 사내였지. 그가 하는 일은 여러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이었어. 세상사는 어떤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 일이 많은지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고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란 말일세. 여자 문제, 돈 문제, 성격으로 인한 갈등, 부부 간의 잠자리, 혹은 자신이 남몰래 저지른 잘못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지. 아마도 그런 일 때문에 그가 매일 밤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군. 아니, 확실히 그러했을 것이네.”

    환사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서는 소매를 휘저어 제압되었던 혈도를 모두 풀어주었다.

    잠깐의 틈만 보여도 목숨을 끊어버릴 것이 분명한 적이었기에 환사의 행동은 무모하기까지 한 행동처럼 보였으나 뜻밖에도 사로잡힌 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느다란 미소와 함께 흐릿한 눈빛으로 환사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환사의 술법 속으로 이미 발을 디딘 상태에 이르렀고, 어느덧 자신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환사의 이야기는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꿈의 내용은 그가 들었던 내용만큼이나 다양했다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 천둥 번개가 치고 굵은 빗줄기가 온 지면을 강타하는데, 홀연히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이 나타난 것이네. 머리는 뱀의 형상이고 몸은 호랑이였지. 그뿐인가. 다리는 천 년 묵은 지네의 그것이었는데, 그 크기가 보통 집 같은 경우엔 한 발에 뭉개 버릴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했지. 그러한 괴물이 떡하니 자신 앞에 나타난 걸세.”

    환사는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음성이나 표정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고, 눈빛은 시종일관 부드러워 강압적인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이때 상대는 현실 세계가 아닌 환상 속으로 빠져든 상태에 이르러 있었기에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작렬하는 대지 위에 서 있었고, 그 앞으로 머리는 뱀이고, 몸통은 호랑이며, 다리는 지네인 괴물이 흉악스럽게 혀를 낼름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포에 휩싸여 오들오들 떨 뿐, 도저히 발을 떼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때 괴물의 입이 열렸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괴물이 뱉어낸 소리는 분명 말의 뜻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인간 세계에서 들어볼 수 없는 소리였다. 거대한 쇳조각을 다른 날카로운 쇠로 갈라낼 때 나는 소름 끼치는 음향과 비슷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쭈뼛해지고 말았다.

    “저는 황…… 규입니다.”

    그의 대답은 공포가 뼛속까지 이른 자의 음성이었다.

    사실 이때 환사는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환사가 한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그 괴물은 뱀의 머리를 하고 혀를 낼름거리다가 문득 입을 벌려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나? 네 이름은 무엇이냐? 라고 말일세.”

    환사는 이처럼 옛날이야기를 이어갈 뿐이었으나 술법에 걸린 황규는 마치 자신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 듯 환상에 빠져 실제 괴물을 눈앞에 둔 듯 자신의 이름을 밝히게 된 것이다.

    “다시 괴물이 물었네. 황규 네놈은 청룡장의 주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그러자 황규가 대답했지.”

    황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번개가 칠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방의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어둠인데도 괴물의 모습만큼은 낱낱이 볼 수 있어 두려움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는 오들거리면서 괴물의 물음에 답했다.

    “저, 저는… 감시자 중 한 명입니다. 혹여… 청룡장의 비밀에 접근하려는 자가 있다면 저희가… 소리없이 처단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청룡장은 지금 어디로 옮겨졌느냐?”

    뱀 대가리를 한 괴물이 한순간 머리를 황규의 눈앞에 들이밀면서 물었다.

    “개, 개봉입니다. 개봉으로 옮겨졌습니다.”

    “개봉의 어디냐?”

    “그곳은… 자…….”

    그때 막 답하려던 황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이제껏 두려움에 떨고 있어 이보다 더 큰 두려움을 나타낼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극도의 불안과 갈등, 공포가 어우러져 세상의 모든 공포를 한데 뭉쳐 놓은 공간에 빠져 버린 사람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환상 속에서 황규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또 다른 괴물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 괴물이 노려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청개구리의 머리에 곰의 몸, 그리고 뒷다리는 사람의 것이었고, 앞다리는 악어의 다리를 닮아 있었다.

    청개구리머리를 한 괴물은 뱀머리괴물의 뒤편 사선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문제는 그 미소 속에서 황규는 억겁에 이르는 저주의 공포를 보았다는 점이었다.

    청개구리머리의 괴물은 이어 목소리를 냈다.

    “입이 매우 가벼워졌구나. 네 가족들은 벌써 잊어버린 게냐?”

    그 목소리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교태가 묻어난다거나 협박하는 투가 아닌 평범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황규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수백 년 동안 고이고 썩어 서서히 흐르는 듯한 소리로 들었다.

    “아닙니다! 잊지 않았습니다.”

    답변을 하려다 느닷없이 말을 바꾸는 것에 환사의 얼굴빛이 변했다. 술법에 다른 무언가가 개입한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계점에 이르게 될 시 심령 속에 걸어놓은 금제가 발동하여 술법을 방해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청룡장의 수괴는 불리할 시 자결을 명한 것에 그치지 않고, 혹여 술법에 의해 강제로 입을 벌릴 것을 염려하여 금제까지 펼쳐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지옥의 끝에서 온 나만을 두려워하라.”

    황규는 환상 속에서 뱀머리의 괴물의 말을 듣고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내 개구리 머리의 괴물이 성큼 한발 나서면서 뱀머리괴물의 어깨를 물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괴물은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그것은 실제로는 황규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사투인 까닭에 황규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환사는 곁에서 계속해서 뱀머리괴물이 승기를 잡을 수 있도록 말하였다. 만일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신을 집중하여 황규가 금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대결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황규의 의식 세계에서 펼쳐진 두 괴물의 사투 끝에 두 괴물 모두가 치명상을 입고 죽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곧 외부로 참혹한 결과를 불러왔다.

    황규는 칠공에서 피를 흘리면서 결국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더불어 그 여파는 외부에서 술법을 구사하던 환사에게까지 이어져 환사는 울컥 하며 선혈을 토해내고는 몸을 비틀거렸다.

    황규의 죽음과 환사의 각혈은 거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제야 심온과 장로들이 달려가 환사를 붙들었다.

    황급히 기를 안정시키고 막힌 기혈을 여는 것으로 응급조치를 취하여 위급한 순간은 넘기게 되었지만, 이로써 다시금 이번에 맞서야 할 적이 간단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

    8. 아픈 선택

    황규로부터 적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 개봉이라는 것과 그곳의 이름이 ‘자’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냈으나 심온 등은 곧바로 개봉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황규가 괴사를 당한 것에 더해 환사가 부상을 입은 것 때문이었다.

    환사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으로 전력의 손실적인 측면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일개 척살조에 속한 이의 정신 세계를 장악한 존재가 황규의 정신 속에서 환사를 상케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얼마만큼의 대비를 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은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삶의 연륜이 깊은 장로들이었다.

    심온은 장로들의 의견을 존중해 임시로 수뇌부 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이곳까지 이르는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고 일을 처리해 갔다. 그만큼 마음은 급하기 이를 데 없고, 이 일은 촌각을 아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이야말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잠시 좌중은 침묵만이 흘렀다. 모두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고, 시선마다에는 여러 생각에 빠진 듯 초점이 맺혀 있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장로 염천이었다.

    그는 향년 육십구 세였으나 겉모습은 거의 오십대 초반과 같아 외모상으로는 장로 쪽보다는 당주들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제가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은 개봉으로 달려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환사가 크게 부상을 당하고 말았지요. 이것은 곧 적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굉장히 치밀하다는 것도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염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청룡장이 원래 상태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또 하나는 그 주변에 반드시 탐지꾼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보건대 적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깊게 대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거기까지 들으면서 심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겉으로는 온갖 정인군자 행세를 다 하고 있으니 그 치부가 드러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일 테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적들의 대비가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염천은 스스로 결론을 짓지 않고 일단 좌중을 향해 의문을 던지면서 말을 맺었다.

    즉시 형벌당주 좌염이 말을 받았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사항은 이곳 서안 땅에 척살된 열 명 외에 또 다른 무리의 존재 여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외의 무리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어. 하지만 지금에 와선 그렇다고 확언할 수는 없는 입장이 된 것만은 어쩔 수가 없군.”

    심온의 답변이었다.

    좌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서안에서의 일이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전제 아래 예상되는 염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입니다만, 제가 그들의 수뇌라면 저는 청룡장 주변을 감시하도록 남겨놓은 이들에게 정기적으로, 대략 열흘이나 칠 일 정도의 간격으로 변화가 있든 없든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정녕 그들이 그와 같은 체계를 갖추었다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극히 짧다는 것이지요.”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감시자들의 정신 세계에 금제를 걸어놓은 정도일진대 허술하게 아무 연락 체계를 마련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옳은 이야기야. 또 다른 의견은?”

    심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말투에는 어느샌가 심사가 뒤틀리고 있음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흠흠…….”

    헛기침으로 운을 뗀 장로 노공이 시선이 집중되자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적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적이 우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조금이라도 우리가 노출된다면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출 것이며, 은밀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곳에서 개봉까지 전속력으로 나아간다면 칠 일 이내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 자로 시작되는 장원을 찾을 것이고, 비밀 통로를 탐지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개봉에는 얼마나 많은 수의 은밀한 눈과 귀가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즉, 다시 말해 우리는 개봉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참담한 결론이었다.

    후흑문이 어떤 곳이던가! 해결의 문파이며, 불가능을 모르는 집단이 아니던가. 그러할진대 문제를 앞에 두고 가까이 다가설 수조차 없다니. 모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심온은 갑자기 일어나 다 때려부수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답답한 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자리한 모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후흑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인물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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