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62화 (62/125)

# 62

그렇게 거의 일 식경 정도를 차근히 돌아보고 난 소감은 여타 장원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었다.

심온과 진효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치 보물이라도 찾는 사람마냥 꼼꼼히 장원을 살폈고, 거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두 사람의 그러한 수색 작업은 다음날, 또 그 다음날로 이어졌다.

수색 삼 일째, 심온은 대들보 위를 뒤적거리다 한순간 환호성을 내질렀다.

“찾았다! 찾았어!”

그리고는 이내 진효와 작게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더니 장원을 빠져나왔다.

얼마쯤 갔을까. 평소 돌아가던 중심가 쪽이 아닌 반대쪽 외곽으로 더욱 빠져나갈 즈음 뒤쪽을 바라보던 심온이 인상을 찡그리고 크게 외쳤다.

“제길, 들켰다!”

아직까지 뒤쪽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건만 무엇을 보고 그러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말과 함께 심온과 진효가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리기 시작하자 비로소 숨은 자들이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숫자는 정확히 열 명으로 얼굴마다에는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복면의 모양이 사뭇 특이했다. 이마 위쪽으로는 검은빛이었고 이마 아래쪽으로는 사람의 피부색과 같은 색이어서 얼핏 보노라면 복면이 아니라 얼핏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게 제작된 것이다. 특히나 두 눈은 시야 확보를 위해 구멍이 나 있고, 코와 입은 그림으로 그려져서 가까이에서 보지 않는다면 복면이라고 보기 힘든 모양이었다.

복면이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함이나 복면을 했다는 것만으로 쉽게 불순한 뜻을 지닌 자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깊은 밤중이 아니면 유용하지 못한 것인데 이들의 복면은 매우 교묘해서 약간의 은신법만 곁들이면 대낮에도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나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심온과 진효는 복면인들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앞서 갔다. 그들에게 잡히지도 않았지만 좀체 그들이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여력을 허용치 않았다.

시종일관 이십여 장의 거리로 앞서 가던 심온과 진효의 행보는 어느덧 긴 평야 지대로 접어들었다.

추적을 뿌리치는 데 있어 가장 금기시되는 것이 바로 평야 지대로의 도피였다.

제아무리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앞서 가고 있다고 해도 한눈에 도피하는 길이 보여 도망자에게는 막막함을, 추적자에게는 여유를 안겨줌과 동시에 다양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것이라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도피의 기본은 우거진 숲이나 언덕, 비탈 쪽을 택하는 것으로 급히 꺾이고 도는 길을 통해 추적자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심온과 진효는 간간이 뒤를 돌아다보며 적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릎 아래까지 자라난 풀들을 헤쳐 가면서 추적자들은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끝없이 쫓고 쫓기는 달음질이 이어질 것 같던 상황에 변화가 인 것은 평야에 접어든 지 거의 일 식경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이때는 추격자들의 뒤쪽에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염없이 벌판이 이어져 이들의 경공이 간단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심온의 물음에 진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두 사람은 즉시 길게 원을 그리며 돌아 걸음을 멈추고는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복면인들을 향해 오연한 자세로 노려보았다.

그 광경은 마치 오래전부터 적을 기다려 왔다는 듯 태연자약하기 이를 데 없어 방금 전까지 도망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복면인들 또한 이 갑작스런 변고에 복면 안의 얼굴들에는 깊은 의혹이 떠올랐다. 단지 지금 그들의 얼굴은 무표정한 그림이 복면 앞쪽에 그려져 그와 같은 심경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설마 이놈들이 우리를 유인한 것?’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노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군.’

‘느낌이 좋지 않다.’

솔직히 그들은 두 사람이 평야 지대로 걸음을 옮기자, 마음속으로 저마다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품었다. 비록 경신공부가 뛰어나 쉽사리 거리를 좁힐 수는 없었지만 사람이 몇 날 며칠이고 계속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숫자가 많은 자신들이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마치 드넓은 평야에서 대결을 하려고 애초부터 마음먹은 것마냥 당당한 기세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속을 알 길이 없어 저마다 깊은 의혹만 떠오를 따름이었다.

그들이 오 장여의 간격을 두고 반원의 형태로 심온과 진효를 감싸 포위하고 바라볼 때 심온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모두들 환영하는 바이오.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들이 많았소이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산들거리며 기분 좋게 옷깃을 스치니, 이내 마음에 더욱 울화가 치미는구려. 하하하하…….”

심온은 웃음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곧바로 반원의 포위망에서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는 자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는 심온이 선 위치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자였기에 첫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이와 같이 다수의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중앙으로 파고드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익을 안겨다 주는 선공이랄 수 있었다.

중앙 쪽이라면 곧바로 좌우 양 날개가 오므라들면서 포위 공격을 받을 것이지만, 지금처럼 가장자리를 치는 것은 날개를 꺾는 것과 같아서 빠른 신법을 구사한다면 다수의 움직임을 묶어놓을 수 있는 방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은 진효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왼쪽 가장자리에 선 자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심온과 진효의 공격은 매우 신속한 것이 거침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임을 낱낱이 예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폐허가 된 청룡장에서 심온은 연일 수색 작업을 벌였고, 오늘은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았다고 소리를 질렀었다. 이것은 모두 어딘가에 비밀리에 은신하며 감시하고 있을 그림자들을 불러내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찾고자 하는 건 없었고, 그러한 수색 작업을 통해 감시자들의 이목을 붙들고, 결국 찾았다, 라는 외침과 함께 그들을 밖으로 끄집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심온의 계산으로는 원혜의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과거 근거지였던 청룡장을 버린 후라도 이곳을 감시하는 눈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역시 그 예상은 적중했다. 솔직히 심온은 찾았다, 라고 말한 후 혹시라도 뒤쫓는 무리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적들은 쫓아와 주었다.

도주로를 평야 지대로 잡은 이유는 심온과 진효가 그만큼 무공에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긴 평야는 자신들의 행적을 빤히 드러내 놓기도 하는 것이지만 적들의 규모 또한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이다.

감시자의 규모를 모르는 가운데 숲 속에서 격돌하게 된다면 또 다른 암습자까지 염려해야 하니 온전히 힘을 발휘하기 힘들고, 다수의 감시자일 경우 힘에 부칠 것도 감안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들로 심온은 적의 수효가 열 명이며, 이제껏 달려오는 동안 그들이 보인 경공의 수준을 가늠하여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몸을 세우고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복면인들은 본래 부여된 사명이 살인으로, 입을 막고 흔적을 제거하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무 말도 없이 심온과 진효에게 살수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검을 뽑아 들고 자연스럽게 다섯 명씩 한 조를 이루어 각기 심온과 진효의 목숨을 노렸다.

심온은 첫 공격에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자 순식간에 다섯 개의 검날에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각기 검법을 시전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강한 한 명의 검사가 도도한 내공을 곁들여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작은 물결은 아무 힘이 없으되, 물결이 한데 뭉쳐 방죽을 무너뜨리는 힘을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에 심온은 방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적의 하나하나의 검로(劍路)를 보지 않고, 그들이 검진으로 융화하여 핵심적으로 뻗어오는 커다란 그림의 공격을 맞아 부딪쳐 나갔다.

다섯 명의 검수가 펼쳐 내는 검진은 각기 자신의 일검으로 심온을 물리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서로의 공격과 수비를 상호 보완하여 절대적인 일검을 완성하는 것이었기에 심온의 대처는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

한편 진효의 경우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진효는 커다란 검진의 흐름을 살펴 그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기인 쾌속한 신법을 이용해 각개격파를 이루는 식이었다.

검진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꿈틀거리면서 변화하여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데, 변화하기 직전에 미세하게나마 공백이 생기게 된다. 진효가 노리는 부분은 바로 그 틈새였다.

틈을 파고들어 흐트러뜨림으로써 검진 전체에 균열을 가해 조화로운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두 개의 검진 속에서 맞서길 약 이백 초 정도가 지나갔다. 이때의 형세는 심온 쪽은 서서히 압도해 가고 있었고, 진효의 진영은 팽팽한 가운데 유불리가 교차하는 상황이었다.

이 격전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다시 오십여 초가 지날 무렵이었다.

두 개의 검진에 각기 둘러싸인 심온과 진효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매우 근접해진 상태에서 두 개의 검진이 거의 맞닿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내 두 개의 검진은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한 개의 검진을 이루어 심온과 진효를 아울러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변화는 복면인들만 이룬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심온과 진효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위치를 바꾸면서 검진이 연합하지 못하도록 신법을 전개해 다시금 아까같이 두 개의 검진이 되도록 유도했다.

검진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이 적의 변화에 맞게 꿈틀거리는지라 이내 다시 두 개로 나뉘어 처음과 다름없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매우 큰 변화라 할 수 있었다.

그건 심온과 진효의 공격 방법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까닭으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이제껏 진효를 상대했던 다섯 검수는 변화와 변화의 작은 틈새를 막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공격하는 방법이었는데, 갑자기 상대가 심온으로 바뀌게 되자, 태산의 누름처럼 검진의 결을 쳐 내려가는 장력 앞에 순간 혼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것은 심온을 상대하던 다섯 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온과 달리 진효가 변화의 간극을 타고 갈라진 틈에 예리한 공격을 퍼붓자, 이내 당황하면서 손이 어지럽게 변한 것이다.

생사를 논하는 치열한 격전에 있어서는 작은 허점이 커다란 타격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이내 심온의 장력이 검과 검 사이를 가르며 다섯 검수의 몸에 작렬했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진효 또한 두 명의 검수에게 타격을 입혔다.

심온 쪽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진효를 감싸던 검진 또한 두 사람의 손실로 인해 이내 진효의 손속 아래 위험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게 되고 말았다.

심온은 이들을 생포하여 청룡장이 어디로 옮겼는지를 알아내야 했기에 비틀대는 검수들에게 살수를 쓰지 않고 곧바로 혈을 짚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심온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복면 검수의 혈도를 제압하고 다른 이에게로 손을 옮기려던 그 짧은 순간에 네 명의 검수가 검을 들어 자신의 심장을 찔러 버린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향해 칼을 들이댄 것은 마치 적을 향해 살계를 펼친 듯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은 것이었기에 심온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짚단처럼 허물어진 이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고 그대로 세상과 작별했다.

그러나 거기에 마냥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바로 그 뒤를 이어서 진효와 맞서던 다섯 검수도 이내 똑같은 방법으로 자결해 버린 것이다.

심온은 속절없이 쓰러진 그들의 주검을 보면서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철저히 억압하였단 말인가. 자신의 생명을 단 한 차례의 머뭇거림도 없이 버릴 수 있게 한 이들의 배후가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심온은 정신이 퍼뜩 든 사람처럼 머리를 들더니 혈도를 제압하였던 한 복면인에게 신속하게 손을 뻗어 대여섯 군데의 혈을 추가로 찍었다.

그 복면인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심온은 아홉 명의 망설임없는 자결이 가져다준 충격으로 한 곳의 혈도를 점하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이러한 놀라움은 진효 또한 다를 바가 없어서 그는 아홉 구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정녕 앞으로 상대해야 할 자들이 얼마나 잔악한 자들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본래 심온의 계획은 복면인들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은 하수인에 불과할 뿐이라 명령의 권한이나 주도할 입장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옳지 못한 일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므로 혹독한 고문을 통해 그들의 입을 열게 할 작정이었다. 도리어 그들이 고문을 하기도 전에 모든 사실을 불어버릴까 염려했던 심온이었다.

한데 전혀 뜻밖에도 생명을 거리낌없이 버리면서까지 입을 열지 않으려 한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는 간신히 포획한 한 명의 복면인에게 고문을 하는 것으로는 결코 그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 밖에 고문과 유사한 행동조차 취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가 입을 자유롭게 열게 놔둘 수가 없는 일이었다. 턱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망설임없이 혀를 깨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온은 환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환사라면 술법을 통해 그의 심령을 제압하여 입을 열게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나갈 무렵, 상인 차림을 한 후흑문의 핵심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때 심온은 낙양에 머물지 않고 낙양 외곽에서 하룻길 거리에 있는 도원촌의 한 허름한 객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열 명의 감시자가 일정 기간이 이를 때마다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는 식으로 본대와 연결되어 있다면 추가로 파견될 적에게 노출될 수도 있을 것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장로들과 당주들, 그리고 환사가 도착하여 심온은 그간의 일을 설명하였다. 이제껏 산전수전 다 겪었던 이들이었지만 청룡장에 얽힌 이야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놀라움의 연속이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신음을 뱉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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