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61화 (61/125)

# 61

만음귀조를 어서 물리치고 자화신녀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이 이루어낸 공격이었다.

“쯧쯧쯧, 팔이 하나뿐인 병신에 온몸이 피로 범벅된 놈 하나를 요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니, 도무지 네놈은 먹구름 낀 하늘과 다를 바가 뭐가 있단 말이냐.”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어디서 함부로 망발인 거냐?”

만음귀조는 무척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그렇기도 한 것이 자화신녀의 말대로 선우현의 상태는 그야말로 죽음 직전이었건만 아직도 공방을 이루고 있으니 스스로도 답답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도와줄까?”

달콤하게 뱉어내는 말에 만음귀조가 벼락같이 외쳤다.

“끼어들지 마라! 내 공을 넘보겠다는 것이냐?”

“후후, 그럴 리가. 단지 나는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뿐인걸.”

그와 같이 말하던 자화신녀의 양손이 소맷자락 속으로 들어갔다가 한순간 밖으로 뻗어졌다.

순간 사방이 검은 빛살로 가득 차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수백개의 암기가 선우현과 만음귀조의 몸에 박혀 버렸다. 자화신녀가 뿌린 암기는 새끼손가락 마디만큼이나 작았다. 뿌려진 숫자는 족히 오백여 개는 될 것 같았고, 그 중 구할 가량이 격전 중이던 만음귀조와 선우현의 몸에 꽂혀 버린 것이다.

만음귀조와 선우현은 선 채로 고슴도치가 되어 죽음을 맞았다.

이 느닷없는 변고에 원혜는 한동안 울지도 못하고 선우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미친 듯이 달려가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빼곡이 박힌 가시에 그녀의 몸에도 곧바로 상처가 났지만 그녀는 아픔도 모른 채 울부짖으며 선우현의 이름을 불렀다.

“오호, 이런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나. 하지만 걱정 마. 네년도 곧 뒤따르면 곧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까.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서로 손 잡고 갈 수 있도록은 배려해 주마.”

자화신녀는 어느샌가 다가와 원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와 손길은 살기도 온기(溫氣)도 아닌 저주스럽고 추악한 악령의 섬뜩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여 원혜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 마구 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간을 가르는 한줄기 음향과 함께 원혜의 몸은 허공을 가로질러 그 앞쪽 나무에 메다 꽂혔다.

암기가 원혜의 옷을 뚫고 그대로 옷을 매단 채로 나무에 박혀 원혜의 몸이 박히듯 나무에 매달리게 된 것이었다.

“설마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 그런 생각은 좀 우습지 않겠니? 나는 네년에게 꽤 잘 대해준 것으로 아는데, 네가 감히 날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단다. 이젠 배신의 대가를 지불할 시간이 왔구나.”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오는 걸음은 전혀 내력을 기울여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원혜의 심장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세 걸음 정도를 떼었을까.

순간 자화신녀의 걸음이 멈춰졌다.

거부할 수 없는 한 음성 때문이었다.

“그 아이였나 보군. 고생이 많구나.”

‘청룡장주?’

비밀 장원의 장주였다. 절대 권력자라고 불리우고, 그 무공이 가히 하늘에 이르렀다고 알려진 청룡장주. 이제까지 그의 얼굴은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오직 목소리만 알려져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화신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헉!”

그녀는 갑자기 검은 물체가 확 다가오는 것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늦은 뒤였다.

“만음귀조, 네 이놈! 어서 이 손을 풀지 못하겠느냐!”

잊고 있었다. 청룡장주가 아니었다. 만음귀조가 청룡장주의 목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자화신녀로서는 만음귀조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화근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선우현은 워낙 부상이 심한 상태라 그녀의 자화신침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지만 만음귀조는 옅은 숨결이 남아 있었다. 그는 복수할 때를 기다리며 죽은 체하고 있다가 자신을 지나쳐 등을 보이는 자화신녀에게 청룡장주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놀라게 한 다음에 그녀를 껴안아 버린 것이다.

굳이 청룡장주의 목소리를 택한 것은 그녀가 같은 임무를 맡은 상태에서 동료를 죽였다는 것에 한순간 마음이 복잡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자화신녀는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느라 방비가 허술했고, 그 틈에 만음귀조가 자화신녀를 끌어안은 것이다.

“흐흐흐. 이년, 이제야 너를 품어보는구나. 영원히 나랑 함께하자.”

순간 자화신녀의 눈이 놀람으로 세 배는 확대되었다.

그 짧은 순간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짐작한 것이다.

만음귀조의 단전 쪽이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한순간 폭발했다.

내력을 안에서 격돌시켜 자폭해 버린 것이다. 그와 함께 자화신녀이 몸도 갈가리 찢어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방금 전까지 여유롭고 교태스럽게 미소를 머금던 그녀는 걸레 조각처럼 갈라져 허공을 가르다 땅바닥에 너저분하게 버려졌다.

원혜는 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여러 해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일지라도 충분히 끔찍하다고 느낄 만큼 처참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정인의 죽음,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의 공포, 다시 이어진 참혹한 죽음의 광경 앞에 미친 듯이 몸부림쳐 걸려진 나무에서 빠져나와 달아나기 시작했다.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 발견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날이 흐르는 동안 숨고 달리던 그녀는 대천산에 이르러 결국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참한 은둔 생활을 해온 것이었다.

7. 깃털 발견

담유설은 원혜가 설마 이 정도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였기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더듬더듬 이야기를 마친 원혜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것이 과거 속을 유영하며 선우현을 만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담유설은 다가가 원혜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지독하게 고약한 냄새가 났고, 더럽고 찌든 때가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담유설은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당한 슬픔이 해일처럼 덮쳐 와 숨을 쉬기 힘들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담유설은 그녀에게서 떨어져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돕고 싶었다.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당했던 아픔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또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노리개로 살아가는 여자들 또한 구해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까지 이렇게 비참한 괴인의 모습으로 살게 할 순 없었다.

‘일단 문주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가만히 고심하던 유설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잠깐 바깥을 살피고 올게요. 어디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돼요. 알겠죠?”

원혜는 살짝 고개만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깊게 묻어두었던 과거를 끄집어내자, 그 속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아픔, 그리움, 분노, 공포 등이 혼재하여 한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담유설은 굴 밖으로 막 나가려다가 바닥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눈치채지 못하게 원혜의 수혈을 향해 던졌다.

돌멩이는 작고 빠른 데다가 이미 원혜의 눈은 주변의 사물을 보고 있어도 정작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뭐가 날아드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곧바로 몸을 옆으로 기울이더니 잠들고 말았다.

담유설은 바닥으로 허물어지려는 원혜의 상체를 얼른 받치고는 반듯하게 눕혀놓고 한차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굴 밖으로 나갔다.

담유설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하나도 부풀리거나 빼는 일 없이 들은 내용을 그대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한참 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심온을 비롯한 모두는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미친 여자가 어디서 엉뚱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조잘거렸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당파의 선우현을 적용해 보건대 대략 시기가 일치했다. 무당에서는 선우현이 실종된 것으로 보고 당시 후흑문에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그 일을 맡았던 이들이 바로 추적에 능한 만추당이었다.

선우현은 무당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다시피 한 터였기에 무당은 후흑문에 의뢰하는 한편 자체적으로도 총력을 기울여 매우 날카로운 신경으로 무림을 주시했었다.

결국 후흑문에서도 선우현의 종적을 찾지 못하고, 잠정적으로 ‘암살’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무당에 알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 선우현이 스스로 잠적했다는 것은 차기 장문인으로까지 거론된 전도유망한 자가 취할 행동이라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일은 매우 큰일이어서 심온 또한 문주가 된 후로 보고서를 통해 숙지하고 있는 일이었다.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오늘에서야 실마리를 붙든 셈이었다.

침묵만 흐르던 좌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심온이었다.

“이번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정파무림의 누가, 얼마만큼 관여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치부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대항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번 일은 많은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심온의 음성은 평상시에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진지함으로 가득했다. 더불어 문득문득 살기가 비쳐 나오고 있어서 얼마나 크게 분노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심온은 담유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담 당주는 그녀와 함께 문으로 돌아가도록. 그녀가 사람을 기피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한동안은 한적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담 당주가 전담하여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군.”

“명을 받들겠습니다.”

담유설 또한 충직한 음성으로 답했다.

심온이 이어 입을 열었다.

“가는 길은 자겸과 유량이 곁에서 호위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청룡장으로 향한다.”

모두 조용한 음성으로 문주의 명에 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담유설과 원혜의 모습과 보이지 않게 주변의 그림자에 숨어 뒤따르는 문자겸과 초유량의 흔적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를 지켜보던 심온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지나칠 뻔했던 일이 온 강호를 뒤흔드는 일이 되겠구나.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작은 일을 소홀히 넘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되는군. 아, 그나저나 그들의 세력이 결코 작지는 않을 터인데…….’

정녕 무서운 것은 악한 자들이 아니라, 명예나 권력을 지닌 자나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자가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저지르는 행위다.

이제껏 보존해 왔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더 잔혹하고 완벽하게 살인을 자행하고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차라리 사파를 표방하고 있는 자들은 굳이 감출 것이 없다는 식이므로 악을 행해도 태연하며 모조리 씨를 말려 버리는 일이 없는 법이다.

굶주린 야수는 흉포하기 그지없지만 배가 부를 때는 사냥을 하지 않는 법이다.

원혜의 이야기대로라면 그들은 그 어떤 조직보다 견고할 것이 분명했다. 지난 시간들의 추악함을 감추고, 또 앞으로의 시간에서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보태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심온은 어쩌면 이번 일이 후흑문의 사활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 당주, 전서를 띄워 서안으로 모든 장로들과 당주들 휘하의 고수들을 집결하라고 전해. 물론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게 최대한 은밀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도 빠뜨리지 말고.”

서안!

참으로 다행스런 일 중 하나가 청룡장이 서안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원혜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납치되고 또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전혀 알지 못했으나 탈출하는 과정에서 선우현으로부터 청룡장이 서안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들은 것이었다.

명을 받은 진효는 품에서 급히 암호문으로 내용을 작성한 후, 동쪽 하늘을 향해 길게 휘파람을 서너 차례 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로부터 독수리 한 마리가 진효가 내민 손목에 내려앉았다. 이 독수리는 추적과 은신에 능한 만추당과 항상 함께 움직이는 일원이었기에 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진효는 독수리의 발목에 서신을 견고히 묶은 후 약속된 신호로 발목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자 독수리는 알아들었다는 듯 길게 부르짖더니 힘찬 날갯짓과 함께 그대로 날아올랐다.

“자, 우리도 이동하도록 한다.”

심온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몸을 날렸고, 그 뒤를 만추당의 고수들이 마치 한 덩어리인 듯 바싹 붙어서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그로부터 이십여 일 후, 심온 일행은 서안에 도착했다.

문에서는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전서를 받고 아무리 빨리 달려온다고 해도 열흘 안에 이곳까지 오기는 힘들 것이었다.

진효는 은밀한 손길로 서안의 곳곳에 후흑문인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도착하게 될 경우 어디로 집결해야 하는지를 적어놓았다.

서안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큰 도시였기에 청룡장을 찾는 일에 모두가 함께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단 심온과 진효만 청룡장을 찾아 나섰다.

청룡장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역시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몇 번 먼산을 쳐다보는가 싶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룡장을 알려준 것이다.

“청룡장이라… 그렇지. 예전에는 꽤나 잘 가꿔진 곳이었지. 지나면서 봐도 괜히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폐허나 다름없는 걸 왜 찾나?”

예전이란 말에 심온은 이미 예상했던 터라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선우현과 원혜의 탈출이 있었음에도 여지껏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아니, 그럼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청룡장에 거하신다는 한 분이 언젠가 여유가 되거든 꼭 찾아오라는 말씀이 있으셔서 이제야 이곳에 오게 되었거늘…….”

대충 둘러댄 답변에 노인은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

“누가 살고 있긴 하지. 거지들이나 부랑자들이 머물다 가곤 하니까 말이네.”

심온과 진효는 노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네고 곧바로 알려준 대로 걸음을 옮겨 청룡장에 이르렀다.

전혀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탓에 정녕 폐가가 되어 흉흉한 기운이 바깥에까지 전해져 왔다.

반쯤 열린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무성한 잡초들과 제멋대로 자라난 정원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바람결을 따라 고약한 냄새가 코를 괴롭게 했다.

내전 쪽으로 들자, 뿌옇게 먼지가 쌓인 바닥에 질서없는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고, 벽 모서리마다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그 아래쪽으로는 나무판자가 놓여 있었는데, 홑이불이 펴져 있는 것이 노인들의 말마따나 거지들의 잠자리인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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