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그 말과 함께 선우현은 원혜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혜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방금 말하던 선우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음을 상기하고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오자, 간헐적으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에라도 늑대가 굴 안으로 머리를 디밀고 들어와 사나운 이빨 사이로 침을 질질거리면서 다가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공포는 지금쯤 선우현이 당하고 있을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써 꿋꿋함을 가지려 애썼다.
눈을 부릅뜨고 바깥 상황을 주시하던 중 깜박 잠이 들었던지 눈을 떠보자 세상은 환히 밝아져 있었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이 찾아와 새 날의 희망을 말하고 있었지만 원혜에게는 여전히 암흑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선우현은 어찌 되었을까?
무사할까? 무사해야만 해.
그러다 문득 자화부인이 떠올랐다.
암흑뿐인 곳에서 자신을 거둬주고 돌봐주었던 중년의 미부!
언제나 힘들고 괴로울 때면 그녀, 자화부인은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은밀한 가운데 말하길, 자신이 능력만 있다면 탈출하도록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미 자신의 탈출에 대한 소식은 전해졌을 터, 그 속에서 자화부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을 드리고 있을 것이리라.
어느덧 시간은 점심을 지났다. 세 끼니를 굶었지만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온갖 걱정과 불안이 마음에 팽배해 배고픔에 대한 느낌은 아주 먼 순위로 밀려난 상태였다.
선우현이 불쑥 굴 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오래 기다렸지요?’라고 말하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모습을 이제나저제나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러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원혜, 내가 왔소. 이제 아무도 뒤쫓는 사람이 없으니 어서 나와보구려.”
바깥쪽으로부터 환희에 찬 음성이 전해져 오자 원혜는 뛸 듯이 기뻐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굴을 막 벗어나려는 찰나, 문득 선우현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원혜,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어떤 발자국 소리에도 나와선 안 되고, 심지어 내 목소리가 들려도 나와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내 반드시 돌아오리라, 반드시!”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그런 단상은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상황이 바뀌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거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간 원혜는, 역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선우현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사방을 둘러봐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 숨은 건가요? 장난치지 말고 어서 나와요.”
그녀는 이제 모든 난관이 무너져 내려 선우현이 장난을 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야 나온 거구려. 나는 여기에 있소.”
뒤쪽에서 들린 소리에 원혜는 가슴이 요동치는 기쁨에 겨워 급히 몸을 돌리고는 품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다, 당신은 누구죠?”
그렇다. 거기엔 사십대 중반 정도의 낯선 사내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을 뿐, 그 주변에는 선우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 우현은 어디에 있는 거죠?”
불안한 마음에 음성이 덜덜 떨려 나왔다.
“글쎄올시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극락으로 갔을까, 지옥으로 떨어졌을까? 하아, 어쨌든 그거야 내 알 바가 아니지 않겠소?”
그제야 비로소 상황이 명확히 이해되었다.
낯선 사내의 음성은 선우현의 음성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던 것이라, 애초부터 이곳에 선우현이 다시 돌아온 건 아니었던 것이다.
원혜는 왜 우현이 목소리를 들어도 나오지 말라고 하였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뒤였다.
“자, 그럼 아가씨도 놈이 기다리는 저승으로 떠나봐야겠죠?”
사내는 여전히 선우현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기에 원혜는 선우현이 배신을 한 것이 아닌데도 마치 선우현에게 배신당한 느낌에 사로잡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그 순간은 정녕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어서 원혜는 호흡하는 것조차 잊고서 그 자리에서 사내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슝~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한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 하고 울렸다.
“멈춰라! 만음귀조(萬音鬼助)!”
만음귀조(萬音鬼助)!
그는 귀신의 도움으로 만 가지의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자였다.
한 번 들은 목소리는 똑같이 흉내 낼 수 있었으며 심지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기에 그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또한 기묘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자였다.
만음귀조는 자신의 목을 향해 쏘아져 오는 비도의 각도에서 벗어나 뒤로 신형을 날렸고, 그 틈에 선우현이 어느새 나타나 원혜의 앞쪽을 가로막고 섰다.
“우현!”
반갑고 기쁜 마음에 이름을 외친 원혜는 곧바로 울컥하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선우현이 떠날 때는 두 팔이 온전했지만 지금 왼쪽 팔 소매는 허망하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옷의 사방에 피가 묻어 있어 그가 치른 격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선우현! 이거 인사가 아주 고약스럽군 그래. 보아하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닌 듯한데,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고집인가, 만용인가?”
만음귀조의 목소리는 이번에는 기가 막히게도 원혜의 목소리로 바뀐 상태라 선우현과 원혜는 소름 끼치는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만음귀조, 우리를 내버려 두시오. 세상의 그늘에 숨어 우리 두 사람 죽는 날까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살겠소. 하늘에 맹세할 수 있소. 제발 그냥 보내주시오.”
“우헤헤헤헤… 우헤헤헤헤…….”
만음귀조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하듯 웃는 모습이었지만 어디에도 어린아이의 느낌은 없어 실로 기묘한 기분을 풍기는 광경이었다.
“이거이거, 그대는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뛰어나군. 극단에 들어간다고 해도 성공하겠는걸. 이보시게. 입은 말하라고 있는 것이지 다물라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럼 만약 혀를 자른다고 하세. 그렇다고 말을 못할까? 대신 손으로 글씨를 쓰면 되거든. 그럼 이번엔 손을 잘라야겠군. 하아, 그러나 어떡하지? 이번에는 다리로 글을 쓸 수가 있는데? 까짓 다리도 잘라 버리지. 오호, 이런이런, 엉덩이로 글자를 쓸 수도 있겠군. 자, 어때? 이래서는 뭘 자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러니까 죽는 수밖에. 이 일은 죽느냐 사느냐 중 하나만 있을 뿐 어디에 숨어 지낸다, 봐준다? 이건 있을 수 없어.”
“잘 알고 있소. 어찌 그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겠소.”
“어허, 아는 사람이 자꾸 고집 피우면 곤란하지. 세상에 내로라하는 정파의 인물들이 복면을 뒤집어쓰고 마음껏 향락을 즐기는 것은 강호를 위한 길이야. 그렇게라도 묵은 감정과 고단함을 풀어내니까 무림이 평화로운 것이거든. 솔직히 어디 가서 마음 놓고 바람을 피울 수가 있나, 마음 놓고 술집에 드나들 수가 있나? 사파 놈들이야 원래 그러려니 하지만 정파라는 이름에는 온갖 체면과 격식이 따르니 이거 완전히 미치는 거지. 그래서 자네 또한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는 전도유망한 자임에도 비밀 회원이 되었던 것 아닌가. 정녕 처음의 맹세를 잊어버렸단 말인가?”
이 말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원혜는 그동안 자신이 어떤 곳에 있었으며,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향락의 희생물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만음귀조의 말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파무림의 내로라하는 자들이 비밀스럽게 만든 향락의 장소. 함께 치부를 드러내었기에 또한 함께 치부를 감출 수 있다는 논리로 무장한 곳에 하나의 노리개로 납치되어 교육되어진 것이다. 그들 각자가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난 함정에 빠졌을 뿐이오. 그러나 한번 발을 디딘 후에는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에 절망하였고, 거기에서 원혜를 만난 다음에 다시 삶의 희망을 보았소. 내게 이제 무당파나 강호는 아무 의미도 없소. 그저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초야에 묻혀 편안히 여생을 보내고 싶을 따름이오.”
“허허, 이거 영 말이 통하질 않는 친구군. 이제부턴 계속 같은 말만 반복될 듯하니 긴말 필요없이 서로의 목을 취하도록 힘을 기울이도록 하세.”
그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만음귀조의 몸이 홀연히 움직여 선우현의 면전으로 다가오더니 일장을 날렸다.
마치 그것은 산들거리는 바람 한줄기가 불어오는 듯 표홀한 움직임과 함께였으나 선우현은 그 속에 태산을 무너뜨리는 기세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음귀조의 장기에 대해 강호에 알려지기로는 현란하고 기묘한 음성 변조였지만, 그를 곁에서 본 자라면 그의 무공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우현은 태극권을 시전하며 부드럽게 적의 기세를 끌어들여 장력을 흘려보내고 옆구리 쪽을 파고들었다.
그는 무당의 성세를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수재라는 평가와 함께 다음 장문인은 그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온 자답게 태극권이 펼쳐지자, 그 주변의 공간을 일렁거리게 하며 만음귀조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만음귀조는 태극권이 세력을 간단히 뿌리치며 역공을 펼치면서 쾌활하게 웃었다.
“역시 한 손으로는 무리가 따르는군. 이래서야 너무 싱겁게 되겠는걸.”
사실이 그랬다. 선우현이 만약 왼팔을 잃은 지가 수년이 지났다면 충분히 한 팔만 가지고도 무공을 펼치는 데 나름대로 익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는 아직까지 왼팔이 남아 있는 듯한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왼팔까지 보조하여 공격하는 생각을 하였기에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고수들 간의 대결에 있어서는 작은 허점이 곧 치명적인 결과로 다가오는 법이어서 선우현은 곧바로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저만치 물러서서 두 사람의 격전을 지켜보던 원혜는 무공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나 연신 뒤로 물러서며 간혹 비틀거리는 선우현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만약 그날 무기명이란 악한에게 홀리지만 않았어도 우현이 오늘과 같은 곤란을 겪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 정녕 우리의 인연이 맞닿아 있었다면 어느 산골 깊은 곳에 있었다 한들 만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형세는 갈수록 선우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만음귀조의 신형은 처음과 다름없이 가볍고 민첩했지만, 선우현은 이미 여러 차례 장력에 맞은 데다가 이곳에 오기 전 받은 상처가 도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어 갈수록 몸이 무거워져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문득 원혜의 눈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아! 자화부인. 부인이신가요?”
방금 전에 이곳에 도착한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서 있었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원혜는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나 또 한편으로는 그녀 또한 일권을 내지를 만한 힘이 없는 부녀자일 뿐이어서 도리어 이곳에 있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원혜가 자화부인 곁으로 가고자 막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선우현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원혜! 그녀에게 다가가지 마시오!”
순간, 원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선우현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했지만 그만큼 자화부인도 친어머니만큼이나 의지했던지라 선우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치열한 중에도 피 끓듯 외치는 음성이었기에 차마 그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바로 해답을 얻었다.
“앞으로 뒈질 놈이 뒈질 년을 걱정하니 참 세상은 아름답구나.”
한겨울의 빙판처럼 서늘한 음성이 자화부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또한 그녀의 얼굴엔 조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원혜는 도저히 자신의 눈과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본래의 자화부인이 죽고 가짜가 자화부인으로 변장하고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음귀조가 선우현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소리까지 흉내 낸 것을 보았기에 또 다른 괴이한 인물이 있어 수많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미친년,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게로구나.”
그 말이 다시금 자화부인의 입에서 나오고서야 원혜는 자신이 철저히 속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따뜻한 위로가 돼주었던 그녀, 부모 대신 부모의 역할을 해주었던 그녀였다.
시(詩), 서(書), 기(棋), 화(畵)를 가르쳐 주고,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남자를 상대할 수 있는 여러 방중술을 가르쳐 주면서도 안타까워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곳에 끌려와 같은 처지에 놓인 모든 여인들의 대모(大母)가 바로 자화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하길, 어느 대갓집에 안주인으로 있다가 납치되어 이러한 삶을 살게 되었노라고 했다. 기품이 서린 언행에 그런 줄로만 알고 지내왔건만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속임이고 조롱이었다니…….
원혜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모든 생각이 제멋대로 흘러내려 사방으로 흩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에 절망하고 있을 때, 원혜를 깨운 것은 뜻밖에도 만음귀조의 커다란 신음 소리였다.
“크헉!”
마치 고양이가 쥐를 궁지에 몰아놓고 가지고 놀 듯하던 만음귀조로서는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순식간에 비틀거리면서 다섯 걸음을 뒷걸음질치던 만음귀조는 울컥 하고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무당의 쥐새끼가 발악을 하는구나!”
그는 입가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닦지도 않고 다시금 몸을 날려 선우현을 몰아쳤다.
선우현은 비록 일격을 성공시키긴 했으나 그건 가히 천우신조로 얻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뿐이고, 실제 지금 그의 형편은 서 있는 것조차 기적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 기적 같은 일격을 성공시킨 데는 자화신녀의 등장이 원인이었다. 그로선 만음귀조조차 물리칠 수 없어 과연 원혜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건만 자화신녀까지 나타나자 불안이 극에 달하여 몸 안의 잠력이 한순간에 뿜어져 적을 패퇴시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