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59화 (59/125)
  • # 59

    “저는 무기명 씨를 따라왔습니다. 그는 제 낭군님이세요.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그분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요? 왜 그러시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그녀는 이때까지도 무기명과 자신 사이에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신분의 차이로 집안이 개입하여 떼어놓으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라 몽둥이였다.

    복면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무심하게 몽둥이를 날려 흠씬 두들겼다. 비명 소리와 살려달라는 애원 소리가 창고 안을 울리고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아 쫙 뻗어버린 뒤에도 몇 대를 더 맞은 뒤에야 몽둥이질은 멈추었다.

    몽둥이질은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가해진 터라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통증에 신음하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였다.

    누군가 입에 물을 들이미는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니 화려한 의상을 걸친 중년 여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중년 여인은 원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에게 물과 죽을 먹여주었다.

    원혜는 먹으면서 무기명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이 왜 맞았으며, 이곳은 어디인지에 대해 물었지만 중년 여인은 그저 고개만 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시 그녀가 나가고 창고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원혜는 고향이 그리워지고,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있을 때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이제는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갈 수 있을까?’

    사흘이 지나는 동안 창고 안으로 간단한 식사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먹지 않으려 했지만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어찌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싶은 마음이 들자 그때부터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 세 명의 복면인이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 몽둥이를 휘둘렀으며, 이번에도 원혜는 피곤죽이 되어버렸다.

    얼마 후 중년 여인이 찾아와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약을 건네고, 아픈 곳을 싸매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 후로 열 번가량이 반복되었고, 그 후 원혜는 복면인들만 보면 사시나무 떨듯 떨었으며, 중년 여인을 마치 친엄마처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날 무렵, 중년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원혜야, 힘들지?”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무기명과 이 여인은 어떤 사이인지 궁금할 법도 했지만 그보다 이제까지 아무 말이 없던 사람이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자 괜히 울컥하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 많이 힘들었을 거야. 실컷 울렴. 내 언제나 어깨를 빌려주마.”

    한참이나 소리 내어 울던 원혜가 눈물이 잦아들자 중년 여인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너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단다. 네가 만약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을 시엔 내 목숨이 달아나니 부디 날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원혜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때 원혜는 마음 깊이 중년 미부에게 의지하고 있던 터였기에 그녀의 가르침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맙구나. 나 또한 매인 몸이라 너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다만, 네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켜주마. 너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쉽게 목숨을 버리는 짓을 해서는 안 돼.”

    원혜는 중년 미부가 비록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나 그녀 또한 어떤 꾀임에 빠져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전적으로 그녀를 믿고 따라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 다음날부터 원혜는 성적 노리개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남자를 기쁘게 해줄 것인가에 대해 그녀는 배워야 했고, 기이한 곳곳에 투입되었다.

    어느 날은 약을 복용하게 한 후 남자를 받아들였는데, 그 약을 먹기만 하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이성이 마비되어 오로지 남녀 관계만 생각하게 될 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꼭 약을 복용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순순히 그 모든 관계에 응했는데 그것은 다가오는 모든 사내가 몸은 알몸이되 얼굴은 복면을 뒤집어썼기에 몽둥이 복면인들이 떠올라 복종하는 자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성폭행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날은 쇠사슬로 온몸을 침상에 꽁꽁 묶어둔 채 진행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날은 채찍으로 맞아 등줄기에 선혈이 흘러내리는 중에 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복면과 가면을 쓴 세 남자와 함께이기도 하고, 숫자를 맞추어 집단으로 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길 장장 사 년여의 시간이 흘렀고,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건 사 년째를 넘기던 그해 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똑같은 사람이 반복하여 자신을 찾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귓가로 한줄기 음성이 파고들었다.

    “놀라거나 날 쳐다보지 마시오. 이것은 전음이란 것이오.”

    ‘전음?’

    그녀는 명확히 전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대다수가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한참 정상체위의 관계가 진행되는 중이었기에 그녀는 아래쪽에서 물끄러미 복면 속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따스해 보였다.

    복면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당신은 내 말에 대답할 필요는 없소. 아니, 대답을 해서는 안 되오. 이곳은 비밀의 곳이니만큼 또한 보이지 않는 많은 눈들이 있기 때문이라오.”

    원혜는 이 남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남자나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린 지 오래였기에 겉으로 표내진 않았어도 속으로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사내의 전음은 계속 이어졌다.

    “아마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전부터 그대를 사모해 왔소. 왜냐고 묻는다면 거기엔 특별한 답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구려. 내 마음이, 내 심장이 그렇게 말하더구려. 당신을 보고 간 후 언제나 떠오르는 건 당신의 얼굴뿐이었다오.”

    원혜는 이 말을 들을 때 사내의 몸 아래 놓인 까닭에 두 사람의 눈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원혜는 살며시 눈웃음을 보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용의가 있소. 그래서 당신에게 묻고 싶소. 이곳을 벗어나 나와 같이 초라한 움막이지만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 아니면 이곳에서 계속 생활할 것인지 말이오.”

    그녀가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자신에게 말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사내가 다급히 전음을 보내왔다.

    “아, 미안하구려. 만일 함께 가길 원한다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구려.”

    원혜는 손을 들어 그의 턱을 슬쩍 어루만질 뿐 머리 쪽엔 손대지 않는 것으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날 믿지 못하는구려. 물론 그 마음은 이해하오. 그러나 내 이 마음은 진실이라오.”

    비록 전음으로 전해오는 음성이었지만 그 속에 진실이 묻어나는 것을 원혜는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의 말이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예전에 한 남자도 당신처럼 말했죠. 아니, 그는 더 진실되고 간절했답니다. 또다시 아프고 싶진 않군요. 미안합니다.’

    사내의 간청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어느덧 원혜의 마음도 서서히 열려가는 시점에서 사내는 결정적인 제안을 하게 되었다.

    바로 탈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한 것이었다.

    “열흘 후면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성대한 지하 연회가 베풀어질 것이오. 그날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할 수 있소. 부디 나와 함께 탈출을 원한다면 연회장의 서쪽 기둥 쪽으로 가 있길 바라오.”

    지하 연회란, 커다란 지하 석실에서 잔치를 베풀고 벌거벗은 뭇 여인들과 복면과 가면을 한 사내들이 마음껏 성의 향락을 즐기는 잔치를 말함이었다.

    이날만큼은 모두에게 향락이 주어지는 만큼 경비를 맡은 자들도 마음이 풀어지는 터라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탈출하기에는 그만인 날이었다.

    ‘아,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정녕!’

    그녀의 마음은 설레임으로 요동 쳤다.

    그러나,

    그날이 되었을 때 그녀는 서쪽 기둥 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많은 고민과 번뇌가 어찌 없었겠는가마는 그녀는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아니, 남자 자체를 신뢰할 수 없었다. 이것이 다른 형태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혹여 이미 노출된 탈출 계획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든 것이다.

    그 뒤 한동안 사내를 볼 수 없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왜 그때 오지 않았소?”

    원혜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그의 몸에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답했다.

    “바빴어요.”

    “바빴다?”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순간 사내의 눈빛이 슬프게 물드는 것을 원혜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원혜는 좀 더 모질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곳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곳이 단순히 성(性)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강한 어둠의 힘을 지닌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희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중요했다. 괜히 여지를 남겨두었다간 불행만을 자초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정 떨어지는 말을 한 것이다. 이곳에서 바빴다는 것이,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두려운 게요?”

    사내의 전음에 원혜는 한참 후에 글씨를 새겼다.

    “두려워요.”

    “사실 나도 두렵소. 하지만 난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소.”

    “훌륭하군요.”

    “그대를 믿게 하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정녕 내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까울 따름이오.”

    “당신이 내게 보이는 호의는 감사하게 받겠어요. 하지만 사람이란 그 마음이 영원하지 못하죠. 아마 일 년이 지나고 나면 내가 그때 왜 그따위 기녀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원망할 마음은 없어요. 애초에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는 건 당연하죠.”

    그러나 그 뒤 일 년여 동안에도 사내는 변하지 않았다.

    그제야 원혜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 있었고, 목숨을 걸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탈출은 역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지하 대연회 때 이루어졌다.

    이미 치밀하게 준비가 된 듯 믿을 수 없게도 탈출은 성공이었다.

    밖으로 나와 사내는 복면을 벗었다. 이십대 후반의 호남형의 얼굴이었다. 원혜는 그의 품에 안겨 기뻐했다.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오. 어쩌면 탈출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그러면서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내 이름은 선우현이라고 하오. 자, 일단 조금이라도 더 멀리 벗어나도록 합시다.”

    선우현은 그녀를 안아 들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경공을 펼쳤고, 원혜는 마치 날아가는 듯 빨리 치닫는 걸음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이 이처럼 빨리 달릴 수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지금 내 눈에 이렇듯 보이니 또 믿지 않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녀는 거의 반나절을 쉬지 않고 달리는 선우현이 안쓰러워 이제 더 달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였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그 누가 쫓아올 수 있겠는가 싶은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내가 빠르다고 하나 나보다 빠르고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오. 난 괜찮으니 좀 더 달린 후 쉬도록 합시다.”

    밤이 되어 야산으로 깊숙이 들어간 선우현은 토끼를 잡아와서는 그녀가 허기를 채우도록 해주었다.

    작은 모닥불, 그리고 그 위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토끼 고기, 그리고 곁에는 듬직하고 자신을 아껴주는 사내가 있으니 원혜는 비록 야산에 머물러 있었으나 마치 낙원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날은 분명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밤이었지만 원혜에겐 평생 잊지 못할 밤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쉬는 것도 잠시, 선우현은 다시 그녀를 재촉하고는 또다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열흘간은 계속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도 함께였다.

    원혜로서는 너무 심한 염려가 아닌가 싶었으나 혹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그의 말을 따랐다.

    깨끗이 흔적을 지우고 다시금 신형을 움직였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을까.

    원혜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선우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자 또 다른 고민이 있는가보다 생각했다.

    “무슨 일이죠? 뭐가 잘못된 건가요?”

    선우현은 절정의 고수들이 느끼는 기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니오, 아무것도……. 오래 달려오다 보니 피곤이 쌓여서 그렇게 보이는 듯하구려.”

    어설프게 설명하여 근심을 갖게 하느니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그럼 좀 쉬었다 가요. 이대로는 병이 나고 말 거예요.”

    “하하하,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오. 이거 사내대장부가 되어 너무 쉽게 맥없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려. 자, 그럼 엄살은 그만 떨고 더 빠르게 달려보리다.”

    선우현은 과장되게 말하곤 속력을 높이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는 하염없는 불안이 춤을 추었다. 그는 특유의 기감을 통해 보이지 않게 조여오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고, 불안의 강도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 정도라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추격자들은 그리 간단히 뿌리칠 수 있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불안이 현실이 되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이었다. 원혜는 전혀 느끼지 못하였으나 선우현은 이제 마치 곁에 적이 서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작은 굴을 찾아 원혜를 내려놓고 피 끓는 심정으로 말했다.

    “원혜,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당신은 느끼지 못하겠으나 지금 우리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오. 적의 추격이 우리의 목전에 임하였소.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있어요. 어떤 발자국 소리에도 나와선 안 되고, 심지어 내 목소리가 들려도 나와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내 반드시 돌아오리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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