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또 고심하여 생각해 낸 것이 있었으니, 그건 곧 방심하게 하여 기회를 엿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순결과 몸을 주고, 둘만의 여행을 제안하여 강호를 유람하던 중에 객방에서 녹림왕을 가까스로 죽인 후에 도망치게 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수하들이 쫓아와 이곳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자 괴녀는 마치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마냥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담유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 또한 이에 상응하는 어떤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꾸며낸 이야기를 한 것에 불과했지만 혹시라도 이런 비슷한 일을 당한 것이라면 실제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하니 도리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성급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사연을 캐묻는다면 도리어 일을 그르치고 그녀를 도울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상기하고 큰 슬픔에 젖은 것처럼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꽃다운 나이에 흉포한 산적 두목에게 순결을 잃고,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질렀으며, 이제는 쫓기는 신세가 된 여인의 비감이 얼굴 가득 떠올랐다.
괴녀는 이후 아무 말이 없었고 담유설 또한 말없는 시간을 보냈다. 굴 안에 먹을 것이라곤 과일들과 무와 마른 야채 몇 가지, 그리고 통에 들어 있는 그리 신선하지 못한 물이 전부였지만 두 사람은 적게 먹고 마시며 견뎌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아침이 되었을 때, 담유설은 괴녀에게 오늘 해질 무렵 이곳을 떠나겠노라 말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갈 때 괴녀는 담유설의 허벅지를 가리키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상처가… 상처가…….”
돼지 피를 발라놓은 옷은 이제 바짝 말라붙은 상태였지만 그 때문에 더욱 흉하고 상세가 악화된 것처럼 보였기에 괴녀는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몸이 좀 더 낫거든 가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담유설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언니에게도 피해가 갈지 몰라요. 저는 곧바로 제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에요.”
괴녀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니?”
그녀의 얼굴엔 어떤 커다란 감동을 받은 듯한 표정이 가득 들어찼다. 그건 마치 이제껏 언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그 새까만 얼굴로 다시 두 줄기 눈물을 흘렸다.
“가기 전에… 내 이야기를 해줄게요. 혹시라도… 혹시라도 힘들 때면…… 날 생각해요. 그러면… 힘이 날지도 몰라요.”
담유설은 비로소 그녀의 입이 열리게 되자,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에 마음이 기뻐졌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정작 더 놀란 것은 자신이 진심으로 그녀의 사연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이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괴물처럼 여기고 또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한데 며칠 지내보니 그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다. 어느새 정이 든 것인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일까?’
“사실…. 잊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 이야기를 듣고서 생각나 버렸어요. 언제까지… 그냥 잊고 있길 바랐는데…… 그래도 내 말이… 작으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기가 났어요.”
띄엄띄엄 말하는 괴녀의 말에 담유설은 문득 이 말을 듣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혼동이 일었다.
‘우리가 보기에 불안해 보이고 불행해 보여도 어쩌면 이 언니에겐 이 삶이 가장 최선은 아닐까? 괜히 평안한 삶에 끼어들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 것은 괴녀의 이 생활상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여자로서는 결코 지낼 수 없는 생활임에도 마치 이 생활이 가장 평안한 것처럼 여기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바로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마을 사람들을 생각해 봐.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언니를 괴물로 여기고 쫓아낼 게 분명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사정을 듣고 해결책을 찾는 것도 나쁘진 않아.’
담유설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띄엄띄엄 이어지는 괴녀의 말을 들으면서 담유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괴녀는 분명히 미친 것이 아니었고, 더러운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괴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다. 이름은 진원혜.
그녀의 운명이 한순간 파란만장하고 끔찍스런 나락으로 빠진 것은 열여섯의 생일을 맞이한 날이었다.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일날이면 장식품을 선물로 받는가 하면, 맛난 음식을 먹는다고 했는데, 그날도 그녀는 밭에 나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어도 식구들로부터 단 한 마디 축하의 말을 듣지 못한 원혜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호젓한 산길을 거닐었다.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에 올라 무릎을 끌어 모으고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의 처지가 여간 불쌍한 것이 아니었다.
귀한 보물을 선물로 받고자 한 것도, 특별하고 진귀한 음식을 맛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라면 약간 서운하긴 해도 마음에 쌓인 답답함이 눈 녹듯이 녹을 것만 같았다.
오늘이 속절없이 가버리고 나면 또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을 살게 될 테니 이 시간이 아깝기 그지없었다.
“아가씨는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나요?”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원혜는 눈이 휘동그레져서 좌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놀란 것은 아니었는데, 그건 상대방의 목소리가 매우 부드럽고 포근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왼쪽을 돌아보다가 한 사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틀림없었다.
“누구시죠?”
반달이 떠 있었지만 사내가 서 있는 곳은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로 추측해 보건대 이십 세 전후의 미공자일 것만 같았다.
“저는 그저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이지요. 지나는 길에 문득 소저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여 그만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말과 함께 가까이 다가온 사내의 모습에 원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려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아차 싶어 손으로 입을 가렸을 때는 이미 감탄하는 소리가 터지고 난 뒤였다.
“죄, 죄송해요.”
“하하하, 죄송하다니요. 무엇이 말입니까?”
다행히 사내가 굳이 거론하지 않자 원혜는 마음을 놓으면서도 속으로 스스로를 질책했다.
‘원혜야, 이게 무슨 짓이냐. 처음 본 사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모자라 감탄을 하다니. 에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이야.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해진 거니?’
사내의 얼굴은 실제로 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었다. 살짝 짓는 눈웃음은 가슴을 진탕시켰고, 목소리는 영혼까지 울리는 듯했으며, 얼굴은 조각으로 빚은 듯 섬세하여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원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큰 도시에서 생활한 적이 없었기에 주로 보아온 사내들은 우락부락하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청년들뿐이었던 터라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곁에 앉아도 될까요?”
사내는 그렇게 물었을 뿐 대답도 듣지 않고 바위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원혜는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마음만 그저 콩닥거릴 따름이었다.
“제 이름은 무기명(無記名)이라고 하오. 혹 소저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름을 묻는 것은 큰 실례였으나 원혜는 그런 것에 대해 잘 몰랐고, 또 당황하고 있던 터라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후 무기명이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는 달과 밤하늘의 별들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왜 이곳에 혼자 나와 있는지를 물었고, 원혜가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과 가족들에게 서운함을 이야기했다.
무기명은 몹시 안타까워하고 또 위로하면서 정성껏 원혜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원혜는 뜻밖에도 밤이 되어 멋진 남자가 나타나 생일을 축하해 주자, 아까까지 서운했던 것은 지금 이 시간을 빛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을 만큼 기뻐했다.
“혹시 소저는 운명이란 것을 믿습니까?”
“운명이라뇨?”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알 수 없어 원혜가 되묻자 무기명은 잠시 원혜의 눈을 빨아들일 듯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난 이제껏 운명 따위는 믿지 않았다오. 하지만 당신을 보고 나니 이젠 믿지 않을 수가 없구려. 내가 늘 꿈에서 그리던 여인을 이렇듯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건만 이렇게 이루어지다니요. 하늘은 간절히 바라면 이뤄주신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군요.”
원혜는 가슴이 더욱 거칠게 뛰고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건 필시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잘되었네요. 좋은 결실을 맺길 바랄게요.”
“소저,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말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외다.”
무기명이 그 말을 할 때는 진심이 가득 넘쳐 나 원혜는 감동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남자를 사귀어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천하의 미남자가 속삭이듯 하는 말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이 되었다.
“나와 함께 갑시다. 일평생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소. 손에 흙이나 물을 묻히는 일이 없게 하겠소.”
너무나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무기명의 미소를 대하자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남자라면 평생을 함께하는 데 망설일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용기와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산에서 밭이나 일구는 여인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장 떠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가족들이 비록 각박하게 살아 마음에 여유가 없다지만 이 남자를 직접 본다면 마음을 놓을 것이니 정식으로 고한 연후에 함께 떠나자고 해야겠다.’
생각을 정리하여 말하니 무기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내겐 그리 많은 시간이 없다오. 그리고 지금 이곳을 떠나면 어쩌면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르오. 정녕 꼭 그래야만 하겠소?”
슬픔이 가득한 무기명의 얼굴에 원혜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 들어가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오늘 처음 본 것임에도 그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원혜는 밤을 재촉해 함께 떠나기로 마음먹고, 집 쪽을 향해 큰절을 올린 후 무기명과 함께 길을 재촉했다. 이날은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었고, 행복과 기쁨이 솟구치는 시작점이었다.
그러나 훗날 원혜는 이날을 얼마나 저주하고 원망했는지 모른다.
만약 그날이 자신의 생일이 아니었다면…
만약 그날 아버지나 어머니가 단 한 마디라도 따뜻한 말을 건넸다면…
만약 무기명이 그 길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날 몸이 아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더라면…….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는 가정일 뿐 현실은 냉혹했고 비참했다.
그의 이름은 무기명(無記名)이 아니었다.
무기명이란,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이 본래의 이름을 숨기고 거짓된 이름을 이야기했다는 뜻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사람을 우롱하는 것이었지만 순박한 시골 생활만을 해온 원혜가 그러한 숨은 뜻을 알 리가 없었다.
본명은 도요항이고, 그의 별호는 환락채홍사였다.
그가 자랑으로 삼는 무공은 환소기묘공(幻笑奇妙功)으로 이것은 미소만으로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색마공 중의 하나였다.
원혜가 그날 처음 보고 마음을 빼앗긴 것은 단순히 여자와 남자 사이의 호감 때문이 아니라 환소기묘공에 홀려 그 마음이 진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기명이란 가짜 이름을 쓴 도요항은 원혜에게 달콤한 말로 일평생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자고 말하였지만, 정작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추악함과 온갖 학대만이 숨 쉬고 있는 공간이었다.
처음 허름한 창고에 던져지면서 원혜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명, 이건 무슨 놀이인가요?”
그녀는 이제껏 이동하는 중에 그와는 매일 밤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이미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던 터라 가끔은 심한 장난도 자주 쳤었기에 조금 거칠게 내동댕이쳐졌어도 이번에도 뭔가 색다른 놀이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창고 문을 나서려던 도요항이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돌아섰다.
“오! 이런, 내가 아직 말을 해주지 않았었군.”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었다.
“내 이름은 기명이 아니라 요항이라고 하지. 하하하, 게다가 나이가 좀 많단다. 몇 달 뒤면 마흔이 되는 거니까 말이다.”
도요항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고작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기에 마흔이라는 말에 원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도요항이 채음보양술을 통해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까닭이었다.
“피, 그런 게 어딨어요? 또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삶이란 어떻게든 살아지는 법이거든. 앞으로 너와 더 이상 놀 수는 없겠구나. 난 이제 다시 가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야 하거든.”
도요항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잘난 것도 문제지. 쉴 틈을 주지 않거든. 자, 그럼 잘 있으렴. 언제 또 보게 될지 모르겠다만 살아 있다면 언젠간 보게 되겠지.”
그 말과 함께 창고 문을 쾅 하고 거칠게 닫고 나가 버리자, 그제야 원혜는 겁이 더럭 나 달려가 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목에서 피가 터질 정도로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리치고, 두드리고, 울고, 애원하다 결국 지쳐 잠든 원혜가 깨어난 건 허벅지에 타는 듯한 극렬한 통증을 느낀 뒤였다.
그녀는 마침 꿈에서 산속을 헤매다 호랑이에게 허벅지를 물렸기에 이것이 꿈이겠거니 했으나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고서야 통증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 명의 복면인이었다. 그들은 각기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원혜는 덜컥 겁이 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복면인에게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애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