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57화 (57/125)
  • # 57

    심온은 물끄러미 송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포의 말은 논리 전개상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 그 부분도 생각은 해야겠지.”

    심온의 긍정에 힘을 얻은 송포가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엔 마을 사람들을 잘 설득해서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 마찰이 없게끔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생각은?”

    심온이 쭉 둘러보며 묻는 말에 이번에는 문자겸이 나섰다.

    “제가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심온을 위시한 만추당원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문자겸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실 문자겸은 만추당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자였고, 후흑문 전체로 보더라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입을 열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입을 열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실되어 가히 그저 지나칠 말이 없다는 것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미쳤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떤 계기로 미치게 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각 마을마다 정신 이상자가 한둘은 꼭 있게 마련인데, 그들 대부분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정상적인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하지요. 한데 지금 그녀는 사람들과 일체 만나지 않고, 산의 뭇 곤충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니 이건 필시 인간에 대한 혐오나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 등으로 마음 깊숙한 곳까지 환멸과 두려움이 뒤엉켜 저와 같은 삶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 그녀를 보고 문득 미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문자겸의 말이 끝나자,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어보느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심온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문자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자겸의 말이 맞다. 솔직히 미쳤다면 헤헤거리면서 세상천지가 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거나 또 느닷없이 슬퍼 우는 모습이어야 할 텐데 그녀는 그저 두려움과 불안만을 보였지 않은가. 이건 미쳤다기보다는 어떤 강박증에 가까운 게지. 음, 일단 그녀의 사정을 알아낼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을 정리한 후 심온이 입을 열었다.

    “자겸의 말을 들어보니 역시 자겸이 송포보다 머리가 좋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녀에게 접근하여 속사정을 알아내는 것이다. 자, 그럼 여기에 대한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여공추였다. 그는 눈이 매우 작아서 별명이 새우인데, 웃을 때는 그저 이마 아래로 줄 두 개가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눈이 작은 자였다. 후흑문에서는 아직까지 그의 눈에서 흰자위를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대다수일 만큼 고도로 작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어, 그래. 새우 말하게.”

    여공추는 이미 전임 문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름 대신 ‘새우’라는 별칭으로 불려진 탓에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에는 장장 육백 하고도 서른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만 그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겁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죠. 빠르기로 치면 패서 뇌를 자극하는 방법이 최고겠습니다만, 지금 괴녀는 이미 상당한 심적 충격을 받은 상태이니 아무래도 잘 달래서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온이 말을 마친 여공추를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다가 두 손의 뼈마디를 마구 눌러젖혔다.

    우드득. 뚜드득.

    “말 다 끝난 거 아니지?”

    여공추는 앉은 채로 엉덩이를 빼며 조금 물러서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제 이야기는 다 끝났습니다만… 하하하하…….”

    심온이 담유설을 향해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쟤 좀 패라.”

    그러자 담유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몸을 거칠게 날려서는 그대로 주먹을 뻗어 여공추의 면상을 갈겨 버렸다. 그 광경이 어찌나 과격한지 근처에 앉아 있던 만추당원들은 모조리 썰물처럼 그 주위에서 물러났고, 그 뒤로도 담유설은 개 패듯이 무지비하게 손과 발을 놀려 패버렸다.

    심지어 명령을 내린 심온마저도 여공추가 안쓰러워져서 말릴 지경이었다.

    “어이, 방종당주. 이제 그만 하지.”

    담유설은 잠시 손을 멈췄다가 심온을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조직의 기강을 위해서라도 이런 놈은 본때를 보여야 합니다. 여기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도 말장난을 한단 말입니까? 위대한 후흑문의 문주님 앞에서 농지거리를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 놈은 가만두면 안 됩니다.”

    그렇게 전혀 맞지 않는 논리를 늘어놓으면서 담유설은 잠시 동안 주먹을 날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거의 백 대 정도를 가한 후에 담유설은 아주 큰일을 했다는 듯 제자리로 가서 앉았고, 여공추는 그 자리에서 새우처럼 웅크린 채 옅은 신음 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흠흠……. 자, 누가 의견을 내놓겠느냐?”

    잠시 만추당원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고, 심온이 세 번째 재촉할 때 초유량이 입을 열어 의견을 말했다.

    “속하가 생각할 때 만일 그녀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입을 열게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빠르게 열 때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낄 때이거나,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큰 난처함에 빠졌을 경우입니다. 그 상대방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이 방법은 네다섯 사람 정도면 충분히 연극을 꾸밀 수 있을 듯합니다.”

    심온은 단번에 마음에 들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오! 좋구나. 자세히 한번 들어볼까?”

    “그러니까 제 이야기인즉…….”

    모두의 고개가 앞으로 모였고, 초유량은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6. 그녀의 사연

    괴녀는 굴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 도대체 저들이 누구이며, 왜 가질 않고 있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싫었고, 그냥 이렇게 혼자 죽는 날까지 있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누가 다가오는 것도 싫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우린 나쁜 사람이 아니라구. 오돌오돌 떨면서 숨어버리면 마치 우리가 아주 흉악한 놈들 같잖아. 오해는 하지 마. 우린 바빠서 가봐야 하니까 잘 먹고 잘살아라!”

    음성에 이어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괴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진 못했다. 오늘밤은 달빛이 무척 밝다고는 해도 밤은 더욱 무섭기에 괴녀는 굴 안쪽으로 이동해 몸을 웅크리고 굴 입구를 주시했다.

    혹시라도 몰래 놈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몸은 긴장이 떠나지 않았다.

    꾸벅!

    잠시 졸았는지 목이 처지는 느낌에 스스로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전히 밤이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 놈들은 정말 멀리 떠나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어둠을 타고 숨찬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괴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했다.

    누굴까? 그놈들일까? 아니야, 이건 쫓기는 사람 같아.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음성이 뒤를 이어 들려왔다.

    “하하하,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지금이라도 네년이 용서를 빈다면 고통없이 죽여주도록 하마!”

    이 음성은 짙은 살기가 가득 배어 있어 괴녀는 순간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서는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마치 자신이 도망가는 여인인 것처럼 미약하게 중얼거렸다.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때 굴 입구 쪽에서 숨가쁜 호흡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괴녀는 굴 안쪽으로 더 이상 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뚫고 나갈 것처럼 발버둥 쳤다.

    순간, 굴 안으로 뭔가가 불쑥 들어왔다.

    달빛을 등지고 안으로 들어온 터라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괴녀는 말할 수 없는 공포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비명을 억눌렀다.

    당장에라도 침입자가 시뻘건 이빨을 드러내면서 물어뜯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쇠갈고리로 코를 뚫어 질질 어디론가 끌고 가버릴 것만 같았다.

    침입자의 몸에서는 피 냄새가 은은히 풍겼기에 괴녀는 더욱더 이 침입자가 벌써 많은 사람을 먹어치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침입자는 바로 곁에까지 다가왔고, 이내 입을 열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여기에 사람이 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군요. 저는 쫓기고 있습니다. 추적을 피할 때까지만 이곳에 머무를 테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 그건 틀림없이 여인의 음성이었다. 괴녀는 죽음을 예상하고 있다가 뜻밖에도 쫓기는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일단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여인이 아까 큰 목소리를 내질렀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으며, 옅게 피 냄새가 났던 것은 쫓기는 와중에 부상을 당한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괴녀는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었고, 쫓기는 여인과 함께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바깥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이 쥐새끼 같은 년이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거지? 으하하하! 그렇다고 우리가 찾아내지 못할 것 같더냐. 네년은 숨는다고 숨었겠지만 그건 단지 죽음의 시간을 잠시 연장한 것뿐! 이제껏 어떤 놈도 혈마이선을 피해 달아난 놈은 없었다.”

    음성은 크게 들렸다가 작게 들렸다가, 동쪽에서 났다가 북쪽에서 났다가 하였기에 괴녀는 이를 악문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도망녀는 그런 괴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면서 그녀가 안정을 취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날 밤이 지나 새벽이 오고, 다시 아침이 밝아오기까지는 다른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이 시간이 흘렀으나 괴녀에게는 거의 일 년 정도는 걸린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밤새 협박하는 소리가 온 산을 울렸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잠해졌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염려로 인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아침 햇살이 굴 안을 옅게 비추게 되었을 때, 도망녀가 감싸 안았던 팔을 풀면서 말했다.

    “피해를 끼쳐서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조금 더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아요. 놈들은 여간 집요한 게 아니라서 분명 어딘가에 숨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괴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사실 이제 그만 떠나라고 말하려 했으나 빛이 들어오면서 보게 된 도망녀의 허벅지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 벌겋게 젖어든 핏자국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 먹은 것이었다.

    “고마워요. 제 이름은 설유담이라고 해요.”

    설유담!

    이것은 담유설이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바꾸어 소개한 것이었다.

    초유량이 말한 전략에 따라 지난밤 유설은 쫓기는 여인으로 분하여 우연찮게 괴녀의 굴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물론 이때의 유설은 그녀의 장기를 십분 발휘하여 얼굴을 평범한 모습으로 바꾼 상태였으며, 돼지 피를 옷에 뿌려 극심한 상처를 당한 자가 되어 있었다.

    혈마이선이라는 거짓 추적자는 심온을 비롯한 만추당원들이었고, 이들은 밤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한껏 공포 분위기를 만든 것이었다.

    초유량의 계획은 일단 성공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담유설이 얼마나 지혜롭게 다가가 괴녀의 마음을 여느냐였다.

    담유설은 다시 하루를 머무는 동안 불안한 기색을 수시로 내보였다. 두 사람은 굴 안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은 상태로 바깥의 변화를 주시했고, 그동안 서로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 다시 새날이 밝았다.

    이때부터 담유설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다 주르르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설움에 복받친 듯 한쪽 구석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렇게 밤이 오고 달빛이 아스라이 굴의 입구를 비출 때, 망연자실 바깥을 바라보던 담유설의 귓가로 생소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 슬퍼 말아요.”

    여인의 음성, 괴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벙어리로 지내다 한순간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처럼 어색했고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마음의 배려가 느껴지는 그런 음성이었다.

    심지어 이제까지 그녀의 음성을 끌어내기 위해 눈물 연기를 펼쳤던 담유설의 마음이 한순간 뭉클해질 정도로 괴녀의 음성엔 염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들어… 줄게요… 만약 이야기하고 싶다면요.”

    괴녀의 말을 들으며 유설은 거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으며, 전혀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바깥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 상황은 초유량이 예측했던 부분이었고, 초유량은 이럴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방종당주님, 괴녀가 묻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묻게 된다면 말입니다, 절대 바로 사연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물이 흐르듯 척척 진행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어느 누가 있어서 처음 본 사람에게, 뭐 비록 위험한 순간을 같이 넘겼다곤 해도, 자신의 슬픈 사연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는 그 느낌은 오히려 더욱 큰 믿음을 주고 진실되게 보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담유설이 아무 답변이 없이 바깥만을 바라보자 괴녀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자신이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은 아닌가 싶어 여간 미안한 몸짓이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괜한 것을 물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담유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던 한순간 담유설의 눈에 이슬이 맺히더니 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에요. 말하고 싶어요.”

    “저… 그래도…….”

    “삼 개월 전의 어느 날이었어요. 녹림이라고 아세요? 쉽게 말하자면 산적들이죠. 전 그 산적들에게 잡혀갔답니다. 그리고는… 흑흑흑…….”

    담유설은 말을 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다가 다시금 꾸며낸 사연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녹림에는 녹림왕이라고 불리는 산적 두목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의 눈에 띄어 윤간을 당하는 수모는 피했으나 일평생을 포악한 산적 두목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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