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56화 (56/125)

# 56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면서 심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공을 익힌 자는 확실히 아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마을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굳이 생각해 본다면 혐오스러움 정도랄까? 산에서 불쑥 마주치게 되면 괜히 겁이 나긴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괴인의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미씨, 여태 집에 안 들어갔어요?”

괴인의 목소리는 띄엄거리고 또 무뚝뚝한 편이라 좀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뭐야? 지금 개미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야?’

말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그냥 살짝 맛이 간 사람 정도일 뿐이었다.

괴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 응… 나쁜 아저씨들이 날 괴롭혀서 난 매우 슬펐어. 무섭기도 하구.”

개미는 상당히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친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땅벌레님이군요. 아까… 연기가 나서 좀 힘들었죠? 네? 지금 바쁘시다구요? 네… 다음에 뵈요…….”

심온과 일행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괴인을 바라보았다.

심온은 이제 슬슬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슬쩍 검지를 뻗어 지풍을 날렸다. 슥, 하는 소리와 함께 지풍이 공기를 가르면서 괴인의 수혈을 찍자, 괴인은 그대로 고꾸라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심온은 즉시 가까이 다가가 수하에게 굴 안을 살펴보라고 일렀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괴물이 바로 이 괴인인지, 아니면 이 괴인은 다른 강력한 힘을 가진 괴인의 수하일 뿐인지 알아보는 것이 첫째고, 또 하나는 괴인의 인상착의와 장소를 촌장에게 대조해 보고 맞다면 굳이 이 괴인을 쫓아낼 필요는 없고, 도리어 밝은 곳으로 인도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게 하자는 것이었다.

굴 안에 들어가 살피던 수하 하나가 나와 보고를 올렸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물건들이 보입니다. 아마도 괴인은 혼자가 아니라 아내가 있는가 봅니다.”

그 말에 모두는 입을 쩝쩝거렸다. 혼자도 아니고 여자까지 이 좁은 곳에서 산단 말인가. 이러다 아이를 낳아도 이곳에서 기른다면 어찌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심온은 혹시 다른 뭔가가 있을까 싶어 잠든 괴인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맷자락에 이어 가슴 부분을 들춰내고 더듬어가던 순간 심온은 화들짝 놀라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이건 뭐야? 여자잖아!”

그 말에 담유설이 다가가 태연하게 가슴을 주무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맞네요. 그것도 그다지 나이가 많은 것 같진 않아요. 많아봐야 이십대 중반이겠어요.”

모두의 표정엔 경악이 물들었다.

“어떻게 여자가 이럴 수 있지?”

괴인은 닳고 얼룩진 옷을 둘둘 말아 입다시피 하고 있었고, 얼굴은 숯검댕이를 바른 것처럼 검어서 도저히 본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보통 여자라면 이런 모습에 좌절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을 정도의 몰골이었다.

심온은 잠시 괴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심각하게 바라보다가 만추당주 진효를 불렀다.

“네, 말씀하십시오.”

“진 당주, 일단 촌장에게 가서 이곳에 머무는 이 여자가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말하던 괴물인지 알아보고, 만약에 맞다면 괜히 쫓아낸다 어쩐다 헛수고하지 말고 각자 자기 일들이나 열심히 하라고 해.”

“존명!”

진효가 안개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심온은 한참 동안이나 괴녀를 바라보았다.

***

5. 촌장 부부, 밤하늘을 날다

촌장은 내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들고자 했다. 촌장이란 모름지기 마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어려운 일일수록 앞장서고, 두려운 일에 의연히 대처해야 한다.

내일이면 괴물 같은 놈을 이 고장에서 아예 쫓아낼 것이고, 그로써 마을의 결속은 더욱 굳건하여지고 평화로워질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아까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오십 회, 발차기 백 회, 주먹찌르기 이백 회로 체력 단련까지 했다.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셈이었다.

침상에 들자 아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일 정말 가실 거예요?”

“아무렴, 가야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꼭 해야만 되는 일이야.”

“솔직히 당신도 그 괴인을 멀리서 보기만 했을 뿐 어떤 피해를 입힌 것을 직접 보지는 않았잖아요? 또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들도 막상 자세히 물어보면 엉뚱한 소리나 하고 그러는데… 도리어 우리가 괜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야, 그렇진 않아. 그놈은 아직 뚜렷하게 어떤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피해를 입힐 가능성은 충분하거든. 그러니 미리 방비를 하는 차원에서 쫓아내는 것도 나쁠 건 없어.”

“그냥 놔두면 안 될까?”

“허허, 안 된대두 그러……. 헉!”

무심결에 답하던 촌장은 그만 깜짝 놀라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건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불쑥 낯선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누구냐?”

촌장이 다급히 외쳤고, 부인은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만추당주 진효의 손이 그것을 용납치 않았다.

“쉿!”

순식간에 아혈을 짚자 촌장과 부인은 입을 벌린 채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때 진효는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촌장과 부인이 느끼는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저 아혈만 찍혔을 뿐이라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모든 신경이 기능을 정지한 듯 도무지 터럭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밤도 깊어가니 잠시 두 분 바람 좀 쐬러 갑시다. 다녀오면 잠도 잘 올 거외다.”

진효는 곧바로 두 사람을 각기 좌우 옆구리에 끼고서 방을 나서 바람처럼 내달렸다. 어찌나 빠르게 내달리는지 밤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리는 것에 살이 밀려가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진효는 낮에 봐두었던 마을 서쪽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에 이르더니 지체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놀랍게 여긴 촌장 내외는 이번에는 아예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혼자서도 오르기 힘든 이 높은 나무를 어른 둘을 각기 한쪽씩 끼고 손도 쓰지 않고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두 사람에겐 도깨비나 귀신을 만난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하염없이 오르던 진효의 발이 멈춘 것은 거의 나무의 꼭대기에 근접하였을 때였다. 꼭대기에서 얼마 내려오지 않은 지점의 큰 가지에 진효는 두 사람을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어놓았다.

워낙 높은 곳인지라 바람이 불어오면서 자칫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

진효는 두 사람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두려움이 배가되었다.

“으아악! 이걸 어떡해?”

“제, 제발 살려주시오! 원하는 게 대체 뭐요?”

그러나 진효는 저만치 가느다란 가지 위에 선 채로 물끄러미 달을 바라볼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여보, 무서워요. 나 떨어질 것 같아요.”

“꽉 붙들고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러다 촌장은 잠시 중심을 잃었다.

“으아악!”

그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으나 간신히 두 팔로 가지를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 이 높이에서 떨어졌다간 뼈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었기에 촌장의 부인은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난리였고, 촌장은 안간힘을 쓰면서 올라오려고 기를 썼다.

그렇게 간신히 올라온 촌장은 숨을 헉헉대면서 욕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야, 이 개 같은 놈아! 도대체 왜 사람을 붙잡아놓고 괴롭히는 거냐! 네가 정녕 사내자식이라면 대놓고 무슨 말이든지 해보란 말이다!”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석상처럼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서 있던 진효가 가만히 몸을 돌려 복면 너머로 바라본 것이었다. 복면 안에서 음성이 들렸다.

“저, 사내자식 아니거든요. 여자니까 문제없죠? 그럼 이만!”

진효의 목소리는 애써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낸 것이어서 정녕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상황에서 태연하게 여자 흉내를 내는 꼬라지가 너무도 황당해 촌장 부부는 말문이 콱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효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발을 굴러 가지를 출렁이게 만들었다. 촌장 내외는 얼굴이 노랗게 변해서는 기겁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미안하오, 미안해! 내가 잘못했소!”

“제발 아무 말 안 할 테니 이제 그만 좀 해요!”

진효는 두 사람이 사정을 하고서도 한참이나 발을 굴렀다 멈추고는 다시 멍하니 달빛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양측 모두 아무런 말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진효였다.

“몇 가지 물을 말씀이 있소이다.”

촌장 내외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을 기다렸다.

“듣자 하니 내일 어딜 간다고 하였지요? 그곳이 어딥니까?”

“대천산 중앙 쪽이라 할 수 있지요. 그곳에 괴상한 놈이 살고 있다오. 작은 굴을 파서 사는데, 도무지 사람인지 괴물인지 분간이 안 가는 놈이라오.”

진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이 말하는 지역은 바로 그 괴녀가 머무는 곳이 틀림없었다.

“그분은 괴물이 아니오. 사실 그분은 아주 지체 높은 분이시지요.”

촌장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으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설마 그럴 리가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굳이 능력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기를 협박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쪽 세계에서는 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큰 시련과 고행을 요구하는 법칙이 있지요. 온갖 모멸과 천대, 그리고 극악스러운 상황 속에서 견뎌냈을 때 비로소 지도자의 자격을 얻게 된다오. 그분은 지금 바로 그와 같은 시험 속에 있는 것이오.”

촌장 내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필시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더욱 강한 자가 되기 위한 어떤 수련 중 하나인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진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그분이 그곳에 계시다고 하여 이 마을에 피해가 가는 것은 없는 것으로 아오. 내 말이 틀렸다면 이야기해 보도록 하시오.”

“아, 아니올시다. 피해를 입은 것은 없지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대답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제껏 가장 큰 피해라면 괴인을 발견하고는 놀라 도망치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진 사람이 전부였다. 그 말이 소문을 타고 커지고 또 커져서 나중에는 괴물로까지 비화되었지만 촌장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혹여나 또다시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오르다 놀랄까 봐 쫓아내는 데 앞장서게 된 것이었다.

“그럼 부탁하겠소. 촌장이 좀 알아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주시오. 만약 보게 되더라도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으니 놀라지 말고 지나쳐 간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이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눈 뜨자마자 그렇게 하겠소이다.”

진효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이다. 사실 이곳에는 촌장만 모셔올 생각이었다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괴이한 꿈을 꾼 것으로 생각해서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어 부인까지 모셔오게 되었소. 부인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오이다.”

촌장의 부인도 대화로 잘 마무리가 되고, 괴인의 사연을 듣게 되니 여간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해로 비롯된 것이니 서로 조금씩 이해한다면 그다지 문제가 될 일은 없겠군요. 저는 원래 괴인을 쫓아내는 데 반대했던 사람이니 이 일을 꿈으로 여기는 일 따위는 없을 겁니다.”

“다행스런 일이군요. 음… 그래도 한 가지 더 장치를 마련해 두어야겠소이다. 내가 모시고 있는 분은 성격이 아주 지랄 맞아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아주 염병을 한다오.”

그러면서 진효는 품에서 작은 막대 같은 것을 꺼내고 말을 이었다.

“자, 소맷자락을 걷어 팔뚝을 내밀어보시오.”

두 사람이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리자, 진효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안심시켰다.

“두 분을 어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적어놓으려고 하는 것이오. 아침에 눈을 뜨게 되면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라고 내 두 글자를 적어드리리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두 사람은 팔뚝을 걷었고, 그 자리에 진효는 ‘현실(現實)’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하하하하. 자, 이제 됐소이다. 그럼 안녕히들 주무시구려.”

그 말과 함께 진효가 두 사람의 수혈을 짚었고, 촌장 내외는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한편 진효가 촌장 내외와 협상을 벌이는 동안 심온은 괴녀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수혈을 해제하자 아련히 눈을 뜬 괴녀는 사방이 어두운 중에 문득 자신의 눈앞에 멀뚱거리는 사람의 얼굴을 대하자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허겁지겁 기어가 처소인 굴로 들어가 버렸다.

심온은 인상을 찡그리고 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말을 걸었다.

“이보세요. 저희 나쁜 사람 아니거든요. 겁먹지 말고 나와서 이야기 좀 하죠.”

안에서는 옅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 묵묵부답이었다.

“사실 마을 사람들이 소저를 쫓아내려 하고 있어서 우리가 소저를 도울 일이 없는가 이렇게 해결책을 찾아보려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으르르르…….”

뜬금없이 짐승의 목울림이 들리자 심온은 뜻밖의 상황에 그만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리고 말았고, 그로 인해 바로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끅, 히끅. 허허… 이거참. 히끅.”

“으르르르… 으르르르…….”

딸국질 소리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장단을 맞추자, 담유설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 정말 멋진 화음이로다.”

심온은 한차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굴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정말 말 안 들을래? 어서 이리 나오지 못해?”

그러자 담유설이 냅다 심온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렇지 않아도 겁을 먹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심온은 비록 하극상에 당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돌아서서 모두와 상의하기 시작했다.

“자, 각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의견을 내보도록.”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송포가 말했다.

“문주님, 제가 볼 때 저 여자는 그냥 단순히 미친 겁니다. 뭐, 이유고 뭐고가 없는 것이죠. 문주님의 얼굴이 지금 이렇게 잘생기고 또 제 얼굴이 멋있는 것은 어떤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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