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53화 (53/125)
  • # 53

    “안 됩니다. 이제껏 저를 가까이 두고도 믿지 못하면 어쩝니까. 다 믿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러면 너도 이 노부를 믿어라.”

    “아니, 보자 보자 하니까 젊은 놈의 자식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젊은 놈? 허허, 내가 젊어졌다고 하여 힘까지 약해진 것으로 생각하는가 보구나.”

    그 뒤 심온은 뒤질 만큼 얻어터졌다. 그는 비록 외형적인 나이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의 무공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던 것이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전에 비해 오랜 시간이 이어졌다.

    이제 계절은 겨울의 중심에 선 터라 온 세상은 눈으로 뒤덮였고, 심온은 눈이 올 때면 눈을 잡아채는 놀이 겸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달이 지났다.

    불사천마는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그의 외형은 이제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 되는 꼬마가 되어 있었기에 심온은 쭈뼛쭈뼛 선 채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동혈에서 걸어나오는 불사천마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는데, 옷은 더 이상 몸에 맞지 않고 헐렁해져서 더욱 귀여운 모습이었다.

    “허허허허…….”

    심온은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허허거렸다. 이외의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불사천마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자, 다음 단계로 가자.”

    이미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하여 조금 여유를 가질 법도 하건만 불사천마는 조금의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다음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왔다. 불사천마는 급기야 오륙 세의 아이 모습이 되었는데, 그 모습만으로는 너무나 귀여워서 볼때기를 꼬집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불사천마의 말투 또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약간 혀 짧은 소리를 냈기에 심온으로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헛갈릴 따름이었다.

    비록 사숙인 희락동자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었지만, 희락동자는 처음 볼 때부터 그랬던 것이고 불사천마는 고작 두 달 사이에 이렇게 변하고 만 것이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가 되자 비로소 불사천마는 심온에게 독과 진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구나. 나의 갈 날도 머지않은 듯하니 네 고민을 덜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해독법은 사실 매우 간단한 것이다. 매일 감초를 진하게 우려내서 식전에 한 사발씩 복용하고서 운기를 해준다면 한 달 정도가 지나기 전에 독기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네? 감초라구요?”

    “왜 그러느냐?”

    되묻는 불사천마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휴, 이제까지 속고 있었군요.”

    “하하하,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거라. 오히려 귀찮지 않아서 좋지 않더냐.”

    그렇다. 불사천마가 심온에게 독이라고 하여 복용시킨 건 독이 아니라 그저 몸을 가볍게 보하는 약일 따름이었다.

    이 세상에 감초만 다려 먹어서 해독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무공이 강할수록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있지. 아무 약이나 복용시키고 협박하면 거의 통하는 법이거든. 설마 이 정도의 고수가 거짓말을 하겠는가라고 생각하는 한편 어떤 특이한 말을 해도 정말 그럴 것이라고 믿게 되거든. 그동안 마음 고생 많았다.”

    심온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진법은요?”

    이것은 가짜일 리가 없었다. 이미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모른다.

    “진법은 한 달 뒤에 저절로 해제되도록 해놓을 테니 염려 말거라.”

    심온은 불사천마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일단 그 말을 믿었다.

    이제 남은 구결은 두 단계였다. 남은 기록엔 사설은 없고 오직 구결만 적혀 있었기에 심온으로서는 도무지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구결을 들은 불사천마는 이번에는 동혈이 아닌 동혈 밖 양지에 가부좌를 틀고 몰두했다.

    까닭인즉 구결 내용 가운데 신체의 변화로 인한 양기의 부족을 태양으로부터 받으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겨울임에도 날씨는 포근하고 흐리지 않아 그의 길을 밝히 열어주는 느낌이었다.

    다시 구 일 정도가 지났을까.

    그 옆에서 개미가 가는 것을 지켜보던 심온이 뭔가 빛이 반짝이는 듯하여 불사천마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백색 광휘가 불사천마를 휘감더니 그의 몸이 붕 떠올랐고, 다시금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완연히 변화가 일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그의 모습이 이제 겨우 돌이 됐을까 싶은 갓난아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정녕 괜찮으신 겁니까?”

    이렇게 되면 말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것이 아니었다.

    ―놀라지 말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기쁠 따름이다.

    갓난아기가 된 불사천마는 전혀 입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 상태에서 전음을 발한 것이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건가요? 무공을 발휘하거나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건가요?”

    그 말에 대한 답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졌다.

    갓난아기의 몸이 된 불사천마가 무릎 걸음으로 가히 경이롭다고 할 만큼 파다다닥거리며 긴 것이다.

    ―나는 이 상태로도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

    심온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그렇겠군요. 이제 길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흐흐, 그런 셈이지. 너 또한 결코 수고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내 곁에서 지켜주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구결을 말해 다오.

    심온이 구결을 읽어나가자 불사천마는 앙증맞게 손을 흔들면서 좋아했다. 심온은 이 엽기적인 상황에 머리가 어찔거리고 속이 울렁거려 당장이라도 토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구결까지 다 들은 불사천마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앙증맞은 입술을 굳게 닫은 채로 어설프게나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도에 임했다.

    그렇게 다시 삼 일이 지났다.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쳐서 심온은 그 주위에 나무로 틀을 짜서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제 시간은 점점 흘러 드디어 진법이 해제되는 날에 이르렀다.

    아침 햇살이 떠오름과 동시에 진법이 풀렸다. 그 사실을 안 건 진법이 해제되면서 담유설과 수하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두 달여를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고통은 진법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보다는 담유설의 지랄의 극심함으로 인해 정신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 더 컸다.

    “아무 일 없으십니까?”

    “응, 난 괜찮아.”

    “그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니, 설마 하니 이런 아이까지 납치했더란 말입니까? 날씨도 추운데 이 아이는 도대체 어찌 이곳에 앉아 있는지요?”

    심온은 쉿 하는 시늉을 하고는 불사천마에게서 떨어져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하하, 그걸 지금 믿으란 말씀이십니까?”

    “굉장히 썰렁한데요.”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을씨년스러운데 이러시면 어쩝니까.”

    모두들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말에 심온은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하지만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던 담유설의 말에는 치솟는 화를 가눌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끝내 일이 벌어지고 말았군요. 그렇게 사랑의 도피를 하더니만 결국 이처럼 아기를 낳고 싶었던 건가요?”

    심온은 아가리를 날려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서 중얼거렸다.

    “다들 머리 박아라.”

    최후의 변화는 뜻밖에도 그날 정오 무렵에 찾아왔다. 불사천마의 코에서 무지갯빛 광채가 뻗어 나오더니 그 빛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의 몸을 휘감아 도는 것이었다. 이미 심온은 그전에 이런 빛의 발현이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지켜본 터였기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이것은 비단 불사천마가 반로환동을 통하여 전 세상 혹은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는 것의 의미를 넘어 전 인류의 비밀일 수도 있는 것이었기에 소중한 순간이랄 수 있었다.

    훗날 어쩌면 자신 또한 이와 같은 길을 걸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부가 남긴 구결은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될 터였다.

    사부는 이 일을 하나의 유희인 양 적어놓았지만, 사실 사부의 괴팍한 성격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진실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이런 긴장된 마음은 비단 심온만 갖는 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낄낄대면서 믿지 못하겠다던 만추당주를 비롯한 그 소속원들은 이 무지갯빛에 압도되어 비로소 심온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위대한 순간의 현장에서 모두는 숨도 멈추고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로 지켜보았다. 무지개 광채는 점점 더 짙어지고 빨라졌고 급기야 불사천마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거의 일 장(약 3.3미터)가량 솟구치더니 서서히 허공에서 돌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지켜보는 눈동자들은 더욱 커지게 되었는데, 한 바퀴 한 바퀴 돌 때마다 기이하게도 점점 더 작아졌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어!”

    “이게 정녕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

    “오……!”

    말을 하는 동안에도 불사천마의 몸은 점점 더 작아져 이젠 거의 막 태어날 때의 모습이 되었고, 천천히 돌면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약 반 장 높이로 내려선 상태였다.

    ‘땅에 내려선 순간이 곧 이동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심온은 심장이 떨리는 걸 애써 붙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급기야 주먹보다 더 작아진 불사천마의 몸은 지면에 거의 이르러서는 무지갯빛이 흩어지면서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건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사실이었다.

    심온은 너무 감동한 나머지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다른 이들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절을 올리니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이제 신선이 되셨으니 부디 저희들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굽어 살펴주십시오!”

    모두들 진심으로 경외하는 심정이 되어 큰절을 올리느라 바쁠 때 희미한 소리가 모두의 귀가에 파고들었다. 그 소리는 사실 귓가에 파고들었다기보다는 머리에 파고들었다고 해야 옳았다.

    이 자리의 누구도 무공이 얕은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은 모두 이것이 전음의 수법임을 알아차렸다.

    ―살려줘~

    혹시 자기만이 헛소리를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른 이들까지 모두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잘못되었다! 이게 아니야. 날 구해다오.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심온은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어서 그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어르신,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신지요.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너무 덥다. 이곳은 너무 어둡고 덥다. 몸이 타 들어가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된 것이냐. 나를 구해다오.

    심온은 연신 두리번거리다가 번뜩 머리를 스치는 한 생각에 불사천마가 앉았던 곳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아주 미세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설마 어르신… 그냥 더 작아진 것뿐입니까? 선계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태양이 강렬히 내리쬐는 상태에서 물기는 당장이라도 말라 버릴 것만 같았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두려울 따름이다. 온몸이 타 들어간다. 난 죽어… 으아아아아아악……!

    공포에 가득 찬 비명 소리를 끝으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온은 어이없는 상태에서 이제는 말라 버려 아주 미세한 자국만을 남겨놓은 곳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간 게 아니었어. 여기서 죽은 거야. 더 작아져서는 햇볕에 타 죽은 거야.”

    심온의 말에 모두들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 심온의 말이 맞았다. 불사천마는 반로환동의 끝을 따라가다 결국은 수정체가 되고 만 것인데 그 상태에서 햇볕에 노출되자 그만 말라서 죽고 만 것이다.

    사람이 죽는 방법도 다 제각각이라지만 이 경우는 진정 황당함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단출하게나마 묘를 쓰도록 하자.”

    “관은 따로 준비 안 해도 되겠습니까?”

    “관? 땅 팔 것도 없다. 그냥 이 상태에서 흙만 수북이 쌓아놓자.”

    얼마 뒤 그 자리엔 묘비가 세워졌다.

    반로환동의 끝을 이룬 자. 여기에서 말라 죽다.

    ***

    3. 괴물

    반로환동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온 일당이 택한 것은 술이었다. 산 아래 마을의 주점에 들이닥친 심온 휘하 후흑인들은 주거니 받거니 해가면서 고주망태가 되어갔다.

    무림의 기상천외함이라면 숱하게 보고 들었던 후흑인들이었지만 이번 일은 솔직히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라 할 만했기에 술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광경을 혼자만 목격했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고 들었을 것이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집단 최면이나 집단적인 환상이 아닌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는 사실 앞에 모두는 이 충격을 해소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평소 주사가 거의 없는 심온이었지만 이날만큼은 그도 술을 마시는지 술이 자신을 마시는지 모를 만큼 퍼마셨다.

    문주가 그런 꼬라지로 술을 퍼마시니 수하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야말로 주점은 난리와 난리가 요동치는 한바탕이었다.

    이런 사태를 난감하게 바라본 것은 다름 아닌 주인장이었는데, 그는 거의 안하무인격으로 떠드는 소리들에 다른 손님들이 모두 욕하면서 나가고 새로 들어오려는 이들도 얼굴을 내밀다가 주점 안의 어지러운 상황을 보고 다시 나가버리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용히 술을 드셨으면 합니다만…….”

    주인장이 말을 건넨 사람은 만추당주 진효였다. 그가 보기엔 젊은 나이의 심온이 우두머리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그건 당연했다. 심온은 위압적인 자세는 고사하고 술을 마시고 흥얼거리고 기분이 나면 곁에 앉은 수하들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사람답게 보이는 것이 진효였다.

    그러나 주인장의 말에 진효가 답하기도 전에 그 사이로 불쑥 머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주인 어르신, 저랑 같이 춤추고 싶어요? 좋아요, 좋아.”

    이미 혀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담유설이 두 손을 내밀어 주인장의 손을 맞잡았다.

    “자, 즐겁게 춤을 추세. 세상사 별거없어. 오늘 호쾌하게 웃으면 지금 죽은들 어떠하랴.”

    두 손을 잡고는 빙글빙글 팔랑거리며 춤을 추는 담유설에게 주인장은 힘겹게 끌려 다니면서 연신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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