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후흑문주 심온 3
1. 그의 사연
불사천마의 마음에는 오로지 우화등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는 만박귀자 홍추를 찾아내고 다시 후흑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을 쓴 것에 대해 그다지 흡족치 않았다.
사람의 생명이란 도무지 그 앞날을 점칠 수 없기에 자신이 비록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여유를 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여유가 철철 넘쳐 났더라면 아마도 후흑문을 찾은 그의 행동은 폭력으로 시작해서 폭력으로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상자조차 내지 않고 모든 가공할 공격들을 받아준 것은 일을 크게 부풀려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네 명의 장로의 목숨은 지금쯤 장담하기 힘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계산으로는 후흑문에 남겨졌을지 모를 승천의 비법을 습득하더라도 이후 실제 승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써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공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지 모르는지라 여러모로 무리하지 않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정녕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더란 말이냐?”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인 평심전으로 들면서 불사천마는 탄성과도 같이 물었다.
그가 이같이 물은 것은 심온이 말하길,
“사부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오늘 일을 미리 알고 말씀해 두셨습니다.”
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떠나시기 얼마 전부터는 이미 사람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으니까요. 자리에 앉으십시오.”
“놀랍구나, 놀라워.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불사천마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쉽게 드러내지 않는 법인데 이 순간 그는 감탄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나타냈다.
그는 이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승천의 길에 대한 것도 마땅히 남겨놓았겠구나?”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심온은 유심히 불사천마를 살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생일을 맞아 부모님께 선물 받기만을 기다리는 표정이잖아. 수백 년을 산 지독한 악당치고는 꽤나 순수한걸.’
“어서 보여다오.”
뭘 더 망설이냐는 식이었고, 오래 기다리게 했다간 탁자를 뛰어넘어 덮쳐 버릴 듯 얼굴을 쑥 내미는 천마였다.
심온은 몸을 뒤로 살짝 빼는 시늉을 하고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답했다.
“여기에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괜히 시간을 끄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저 또한 이번 일을 속히 마무리 짓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요.”
“여기에서는 어렵다니. 그게 무슨 말인 거냐? 남긴 구결만 있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서 넘기도록 해라.”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구결을 남겨놓긴 하셨습니다만 모두 본 문의 암호로 기록해 놓으셨기에 가져가신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남기신 말씀 속에서 모든 구결을 한꺼번에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까닭인즉 미리 다음 단계의 과정을 읽게 되면 수행 중인 상태의 길을 방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한 단계를 지나면 그제야 다음 단계의 구결을 들어야만 의식의 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으음, 일리있는 말이야.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불사천마는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와 같은 무학의 이치는 고차원의 무학에서 적용되는 것으로, 다음 단계의 구결을 미리 아는 것은 주화입마의 지름길이며, 극독을 복용하고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첫 단계에서 산을 오르라고 했는데, 두 번째 단계에서 올라간 산을 다시 내려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아서 두 번째를 아는 순간 굳이 산을 다시 내려올 텐데 산을 오르는 과정이 굳이 필요하겠는가는 생각이 들어 제대로 된 수행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부님께서는 부득불 제가 직접 한 장소로 가서 수행을 도우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심온이 우화등선에 최적의 장소라며 불사천마를 인도해 간 곳은 대천산 안쪽에 깊숙이 자리한 동혈이었다.
이곳은 과거 심온이 고된 수련의 나날을 보냈던 장소였다. 그런데 굳이 심온이 불사천마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까닭은 사부의 뜻이라기보다는―사실 사부가 어느 특정 지역을 거론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수하들의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불사천마의 무공 경지는 워낙 높기에 들키지 않고 행적을 쫓기는 매우 힘든 일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충 가는 방향만이라도 안다면 수하들이 미루어 짐작하여 찾기란 또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서신 속의 사부의 유시대로라면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나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나름의 대비는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곳이 바로 사부님께서 우화등선하셨던 장소입니다.”
심온은 역시 얼굴 두께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후흑문주답게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거기에 더해 표정 또한 가히 예술이라, 과거 사부님의 승천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떠오른 채였다.
불사천마는 천천히 사방을 훑어보고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곳이로구나.”
심온은 겉으론 비록 태연자약하긴 했으나 내심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는데 불사천마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곳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저 같은 소인은 아무리 좋은 곳에서 도를 닦는다 하여도 결코 하늘로 승천할 수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의 사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위와 같은 곳이 있느냐고 심온이 물었을 때, 심온은 사부로부터 욕을 한 바가지나 얻어먹었다.
“이 쓸개와 간이 거덜난 놈아! 하늘과 땅이 저 하늘과 이 땅으로 생각했더란 말이냐! 땅은 바로 인간이며, 나 자신이고, 하늘과 닿음은 각기 마음속에서 연결 지어져야 하건만 어찌 이다지도 멍청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세상에 너 같은 놈이 세 명만 더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썩은 냄새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이다. 도대체 너의 멍청함은 어느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멈추려는 것이냐, 이 개구리 껍질 같은 놈아!”
이런 과거의 쓰라린 대화를 심온이 응용하여 다시 끄집어낸 건 진정 사부의 말대로 이 노인장이 얼간이인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허허, 그런 것이었구나. 우화등선의 길이 아무 곳에서나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겠지.”
불사천마는 뭔가 심오한 것을 깨달은 양 말했다. 그의 태도는 대천산에 이르면서부터는 사뭇 진지해졌는데 장원 쪽에 있을 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런 변화는 마치 ‘이제 곧 승천할 몸이니 체통을 지켜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심온은 실소를 금치 못할 지경이었으나 그렇다고 표시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같은 높은 경지에 이른 분이라면 이곳에 온 이상 이미 신선이 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조롱을 퍼부었다.
‘정말 머리가 비었다 비었다 해도 이렇게 비기도 힘들 것 같소만, 노인장, 참 한심하외다.’
“허허허허…….”
‘허허허허? 이미 통달한 듯 웃는구랴. 불쌍한 양반.’
그러나 잠시 후!
“왜, 왜 그러십니까? 말 잘들을게요. 착한 아이가 될 게요. 제, 제발요~!”
심온의 애걸과 절규에도 불구하고 불사천마는 냉정히 심온의 혈을 제압하더니 입 안에 단약 하나를 집어넣었다. 심온은 어떻게든 삼키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단약은 속절없이 목구멍으로 쭈욱 내려가고 말았다.
단약이 넘어간 것을 확인한 불사천마는 즉시 심온의 혈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심온은 여전히 혈을 제압당한 사람처럼 굳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무 염려할 건 없다. 삼 개월 이전에는 결코 독이 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승천하기 전에 반드시 해독할 것을 약속하마.”
그렇다. 심온이 복용한 건 극독이었다.
심온은 불사천마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는 것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고도의 수련을 하는 동안에는 곁으로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가와 자칫 신체에 충격을 주게 되면 곧바로 치명적인 화를 당하게 되는데 도대체 무얼 믿고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인가 의아해했던 심온으로서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면 그렇지, 늙은 생강이 맵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불사천마의 용의주도함은 극독을 복용케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멍한 상태인 심온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는데, 처연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심온은 그 모양새를 보고는 완전히 맥이 탁 풀려 버리고 말았다.
‘저, 저 늙은 생강이…….’
심온의 눈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면 늙은 생강이 하는 짓거리는 진법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진이 아닌 매우 고명해 보이는 것이라 심온으로서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문의 고수들이 이곳을 찾는다 해도 결코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괜히 진을 뚫는다고 소란을 떨면 즉시 자신을 죽여 버릴 수도 있는 문제고, 해독약을 주지 않고 튀어버리면 그보다 난감한 일은 없을 터였다.
진의 구성은 거의 반나절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동안 심온은 동혈의 안쪽 구석탱이에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채 누워 있다가 밖에서 ‘허허허’ 하는 웃음소리가 나자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고 나갔다.
이제 날은 저물어 사방이 어둑해져 가고,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어 산에서 맞는 저녁은 제법 찬 기운이 돌았기에 심온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웠다.
물론 심온이나 불사천마가 추위에 몸을 떨 일은 없었으나 심온은 모닥불을 피워 심정적으로 안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채 두 사람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 불쑥 불사천마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찌하여 무공을 익히게 되었느냐?”
심온이 불씨에서 불사천마에게로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얼굴엔 어디에도 호기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도리어 자신이 어찌하여 무공을 익히게 되었는지를 중얼거리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전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는데 우연히 연이 닿아 사부님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랍니다.”
심온은 자신의 사연이 그리 간단치 않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털어놓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꼭 불사천마여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네 사연은 아주 평범하구나.”
그 말뿐 그는 더 자세히 묻진 않았다. 역시 질문이었기보다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다시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고 심온은 불사천마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내 사연을 들어보겠느냐?”
심온으로서는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면 알고 있는 만큼 이익인지라 흔쾌히 답했다.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불사천마가 눈을 멀리 두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어느새 지난 과거 속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난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단다…….”
이렇게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의 호기심은 주로 무림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에게 있어 무림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창공을 가르는 신법!
도와 검, 창과 화살!
슬며시 내민 손바닥에 으스러지는 바위!
입을 열지 않고도 뜻을 통하는 전음!
내공이란 신비한 힘!
기쾌무비, 현란오묘한 각각의 무공 초식들!
그는 어릴 적부터 글재주가 탁월하여 집안에서는 과거(科擧)에 급제하길 바랐지만 그의 마음은 그런 무난하기만 한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십오 세가 되면서 무림사(武林史)를 직접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뜻이 간절하면 결국은 이루는 법! 그는 십칠 세가 되어 결국 열망하던 강호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고금 이래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는 모양인지 그의 부모 또한 이 년여 동안을 시달리다가 결국은 허락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나그네 생활을 하며 주로 유명 문파 주위의 객잔을 돌며 귀동냥에 열중했다.
처음 생각에는 굉장히 막연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객잔을 몇 번 돌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걱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객잔마다에는 무림의 이야기들로 넘쳐 났기 때문이다.
그는 숱한 이야기들을 듣고 밤에는 객방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갔다.
중간중간 돈이 떨어질 때면 한두 달 정도 일반 개인 가정의 훈장 노릇을 하여 돈을 마련하고는 또 미련없이 길을 떠났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오 년여가 지났다.
오 년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는지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일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면 이미 들은 이야기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리되면서 그의 마음에는 좀 더 구체적인 기록에 관한 욕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웅들이 싸웠던 장소에서 직접 그 체취를 느끼고 싶었고, 그들이 거쳐 간 곳들이 궁금해졌다.
그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전설로 꼽히는 신마혈웅(神魔血雄)과 정의신검(正義神劍)의 대결 장소를 첫 번째로 정했다.
아니, 어쩌면 거기에서 충만한 영감을 다 얻는다면 첫 번째뿐 아니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두 사람이 등장한 시기는 강호상에는 암흑기라고 불리던 때였다.
흔히 ‘암흑기’라고 하면 사파 세력으로 인해 온 강호가 암울해진 시기를 생각하기 쉬우나 여기서 말하는 암흑기는 그런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질은 초절정의 기량을 갖춘 고수들이 미비하여 강호답지 않은 강호, 무림답지 않은 무림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때는 마교의 수뇌들이 까닭 모르게 증발해 버린 뒤였으며, 정파 내에서는 아직 특출난 고수가 나오지 않은 때였다.
그런 시대에 난데없이 등장한 이들이 바로 정의신검과 신마혈웅이었다.
각기 정파와 사파의 초고수인 두 사람은 그 아래 세력을 규합하기도 전에 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당시 격전을 우연히도 지켜본 이들은 가히 용과 날개 달린 호랑이와의 싸움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둘의 싸움은 워낙 격렬하여 거의 보름에 걸쳐 산과 바다를 지나며 싸우게 되었는데, 그들이 산을 지날 때면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에는 해일이 일었으며, 들판은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