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50화 (50/125)

# 50

심온과 오교가 신속히 달려가며 ‘멈춰라!’를 외칠 때에는 어느덧 천마와 네 장로의 싸움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도 상호 간에는 빛살같이 빠른 움직임으로 치고 벗어나며, 장력과 지풍이 난무하는 상황이었는데 후흑문의 고수들 중에서도 사분의 일을 제외하고는 어떤 움직임이 어떤 의미를 두고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 깨닫기도 힘든 대결의 양상이었다.

서로 간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공방이 치열하게 펼쳐자 네 명의 장로는 표현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현 세상에 이런 고수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온 것인지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는 팽팽한 대결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상대가 많은 여유 속에서 맞서고 있다는 것을 싸우면 싸울수록 느끼는 중이라서 당혹스러움은 커져 갈 따름이었다.

“장로들은 즉시 물러서라!”

내력이 가득 실린 심온의 음성이 들리자 장로들은 손을 뺄 태세를 갖추었다. 초절정고수들 간의 대결에서는 바늘 구멍만큼의 허점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는지라 공격을 갑작스럽게 멈춘다는 것이 비단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길을 연 것은 도리어 천마였다.

그는 밀려드는 장력들에 반발하지 않고 그 힘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뒤쪽으로 훌훌 날아 멀리 간격을 두고 선 것이다. 그와 같은 광경은 강한 경력을 도리어 마치 구름을 타고 이동하는 듯 부드럽게 승화시킨 것이었기에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고, 그 한 수만으로도 이제껏 천마가 손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네 장로는 즉시 포권을 취하는 것으로 예를 표시했다.

“훌륭한 무공이오. 오늘 대결은 앞으로 잊지 못할 것 같소이다.”

장로들은 상대가 패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손에 사정을 두어 스스로 악의를 품고 온 것이 아니란 것을 밝힌 것이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하하하, 그대들도 썩 괜찮군, 썩 괜찮아.”

천마 또한 홍추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진심으로 느낀 터였다. 섣불리 살인을 자행했다간 오늘 이곳에서 함께 죽게 되었을 것이고, 그가 원하던 우화등선 또한 물거품이 되고 말 일이었다.

이제 문주로 짐작되는 노인이 호의를 가지고 달려오는 듯하니 잘하면 뜻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심온과 오교는 거의 나란히 달려왔던지라 천마는 새파랗게 젊은 심온이 아닌 오교 쪽을 보고 문주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오교가 장로들 곁에서 멈추고 심온이 가까이 다가오자 살짝 천마의 고개가 꺄우뚱해졌다.

‘이 꼬마 녀석은 뭐지?’

심온이 그 앞에 멈춰 서더니 정중히 입을 열었다.

“후흑문의 문주 심온입니다. 영접이 늦었습니다.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널리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천마가 멍해진 사이에 심온은 뒤를 돌아 크게 외쳤다.

“모두 해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기등등하던 수백의 고수들이 하나둘 스멀거리며 자취를 감추더니 이내 모두가 사라졌다.

남은 자는 겨우 네 명의 장로와 총관 오교가 전부였다.

“하하하, 저를 따라오십시오.”

천마는 여유 있는 심온의 응대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마치 내가 무슨 뜻으로 온 것인지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괴이한 일이로다.’

앞서 걷는 심온과 그 뒤를 따르는 불사천마.

과연 불사천마는 심온으로부터 우화등선의 비법을 얻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

외전. 마교 멸망 비사

(작가 주.

순심선행대전의 숭고한 결말 부분에서 예고했던 마교 1차 수난사를 밝히고자 합니다. 지난날 마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당황, 황당, 경악, 좌절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 * *

어느 시대든 정(正)과 사(邪)는 각을 세우고 대립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선악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한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리라.

어느 시대에는 정파가, 또 다른 시대에는 사파가 우위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정(正)은 위태롭고 사(邪)는 강대해 보인다.

거기에서 바로 사필귀정(事必歸正:모든 길은 끝내는 바른 길로 가게 마련이다)이 등장한다.

어찌하여 꼭 결말에 이르게 되면 바름이 그릇됨을 꺾는지 명쾌하게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순심선행대전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은 사필귀정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파의 모든 힘을 다 합친다 해도 그 힘은 고작 마교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파인들의 목숨은 폭풍 속의 찻잔과 같이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마교에서 약간이라도 독한 마음을 품게 되는 날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정파인들의 목숨은 보전되기 어려워 보였다. 그렇기에 되도록 마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애처롭게 펼쳐졌다.

그런 와중에 어느 날 강호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일명 ‘매화(梅花)의 폭풍(暴風)’이라는 사건이었다.

여기에서 매화가 의미하는 것은 화산파의 젊은 검객 노천혁을 일컫는 것이고, 폭풍이란 그가 섬서성 운령 지방에서 화산의 매화삼십육검으로 마교의 섬서지부 소속 곡학을 베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작은 균열에 의해 커다란 방죽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대한 전쟁도 알고 보면 지엽적인 사건이 비화되어 큰 사태를 일으키게 되는 법이다.

훗날 사람들이 이야기만으로 그때 상황을 돌아보면서 고작 그런 일로 대전쟁이 일어났느냐며 안타까워하겠으나 실제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그리 간단한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마교의 곡학이 화산파의 여제자 소하를 강간한 뒤 살해한 것을 노천혁이 목격하여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마교는 감히 화산파의 일개 여제자 하나를 강간하였기로서니 마교의 제자가 살해당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대노했다.

마교에서는 즉시 노천혁 공개 처형과 화산파 장문인의 사과문을 강호상에 삼 일간 게재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시엔 화산파에 머무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고 쓸어버리겠다는 것이 마교의 강변(强辯)이었다.

이에 화산파는 주객이 전도되어도 유분수인지라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죽었으며 그에 따른 사과를 해야 할 자들이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모두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다 해도 맞서 싸우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보였고, 여기에 구대문파를 비롯한 여러 정파인들도 피가 끓는 심정으로 뜻을 같이했다.

이런 정파인들의 방어 연대에 마교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의 무공 서열 칠십삼위 정도에 위치한 수라혈마 전백 혼자의 힘만으로도 화산파 정도는 깨끗이 지워 버릴 수 있을 만큼 크나큰 무공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교 교주 사평은 강호를 향해 일갈했다.

“정파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추살하리라! 심지어 정파의 땅을 밟고 있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주겠다!”

전투력의 현저한 차이를 정파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두려웠고 승부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굴하게 용서를 구하여 목숨을 건지기는 더욱 싫었다.

혈향(血香)은 중원을 뒤덮고 있었다.

주된 힘인 마교에서는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정파를 멸할 날짜를 미리 선포한 상태였다.

예정된 날을 열흘 앞두고 마교 내 소광장에서는 총 백여 명의 고수가 집결하여 어떤 경로로 정파를 궤멸시킬지를 협의코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중 오십 명은 마교 서열 오십위까지의 고수들이었고 나머지 오십 명은 각 사파의 고수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마의 힘이었고 절정의 기량을 갖춘 고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소광장은 거대한 석실이라 부를 만했는데 원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이 덮여 있는 형태였다.

소광장 밖에서는 수많은 무리들이 지도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고 날이 지나도 그들은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후에 안으로 들어가 본 수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교 교주를 비롯한 백 명의 고수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파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강호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도대체 소광장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들이 전멸한 것인가.

그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오리온 은하계의 이드로 행성!

이 거대하고 발달된 문명을 지닌 행성에 중대하고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이드로 행성 전체의 운명이 달린 문제였다.

이드로 행성은 통합 국가로 덕망 높은 황제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는데 그만 장차 황제의 자리에 오를 황태자가 위독한 지경에 놓이고 만 것이다.

이드로 행성의 과학력과 의학 기술은 놀라우리만치 발전한 상태였지만 수만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도 황태자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다.

황제의 근심은 그칠 날이 없었고, 온 행성의 성민들은 어서 속히 황태자의 병이 회복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아무도 병세의 회복을 장담하지 못할 때 이드로 행성 최고의 과학자이자 현자라고 불리는 모스(Mos)가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 신 모스(Mos) 아뢰옵니다.”

“말하라.”

“극히 어려운 방법이긴 하나 마지막 수단을 강구해 보심을 권하나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라.”

“타 행성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하여 천재적인 의술가를 데려오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줄 아옵니다.”

현자 모스의 말에 황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끝내 그대는 시간 여행 장치의 개발에 성공한 것이로구나.”

“모든 것이 폐하의 은총으로 인함이옵니다. 폐하의 성덕에 힘입어 보잘것없는 미천한 재주를 이루게 되었나이다.”

“참으로 복된 일이다. 잘된 일이야.”

황제의 칭찬에 모스는 머리를 조아리고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먼저 뛰어난 요원을 선발하여 그를 타 행성 시간 여행 장치에 태워 행성으로부터 삼백 광년 떨어진 지구 별로 보내 그곳에서 화타라는 의술가를 불러온다면 그는 필시 황태자님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오호, 화타가 그리 대단한 사람인가?”

“그러하옵니다. 그는 필시 뜻을 이룰 것이옵니다.”

“고맙다. 그대는 역시 이드로 행성의 보물 중의 보물이다.”

황제는 즉시 이드로 행성에서 가장 유능한 요원을 선발하여 현자 모스가 만든 타 행성 시간 여행 장치에 오르게 했다.

“반드시 화타를 데리고 오겠나이다.”

“그대의 어깨에 행성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잊지 말라.”

요원 요드란은 타 행성 시간 여행 장치에 몸을 싣고 행성 좌표와 시대, 그리고 시간을 입력했다.

슈우웅!

“으윽…….”

요원 요드란은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중도에 번개를 맞은 듯 기체가 흔들리고 그와 동시에 행성의 시대와 시간이 마구 뒤엉키는 것을 본 후 잠깐 동안 혼절했다가 깨어난 것이었다.

그는 도대체 이곳이 어디쯤인가 궁금하여 문이 열리는 버튼을 눌렀다. 기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위 천장 부분이 두 갈래로 나뉘고 앉아 있던 조종석이 위로 솟아올랐다.

주변을 보던 요드란은 거의 백 명 남짓 모여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요드란은 일단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고자 말을 건넸다.

“이곳은 어느 행성이며 너희는 무엇하는 존재들이냐?”

하지만 요드란의 음성은 백 명 남짓 되는 무리에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 정도일 것이다.

요드란으로서는 멀뚱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정작 황당하기로는 이들이 더했다.

이곳은 바로 마교의 소광장이었으며 요드란이 본 백여 명은 바로 정파를 궤멸시키기 위해 모인 마교의 최고 절정고수들이었다.

한참 회의를 진행하던 중 안개 같은 것이 맺히더니 광장 중앙에 은빛이 반짝이는 둥그런 기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학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인들에게 있어 시간 여행 장치는 괴상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뚜껑이 열리면서 나타난 사내가 대뜸 괴상한 말을 하자 마교 교주 사평은 분노로 타올랐다.

“이놈은 필시 정파에서 보낸 놈일 것이다. 잡아 죽여라.”

그 말에 사람들이 움직이려 할 때 요드란은 조종석으로부터 경고의 메시지를 받았다.

―뚜뚜. 살기가 느껴짐. 방어기제를 작동해야 합니다.

요드란도 느끼고 있었던지라 얼른 방어기제 버튼을 눌렀다. 방어기재 시스템은 매우 치밀하게 이루어진 장치로 상대의 살기를 감지하고 방어는 물론 그 살기의 양만큼 공격을 되돌려 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절정의 경공을 펼치며 몰려들자 어느새 조종석이 빠른 속도로 밑으로 내려가고 천장이 닫히더니 본체를 둥그렇게 백색 광채가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러자 수많은 장풍과 암기, 그리고 검기가 난무했지만 모두 튕겨지고 말았다.

분노한 교주 사평은 친히 애검을 빼 들고 기를 응집하더니 커다란 검강을 형성했다. 자줏빛 광채가 용의 몸처럼 꿈틀거렸고 이윽고 기체에 다다랐다.

엄청난 내력이 바탕된 공격인지라 일시 본체에 충격이 가해졌다.

거기에 놀란 요드란은 기가 막혔다.

“이놈들! 어서 물러나지 못해!”

밖을 향해 소리쳐 보았지만 그 말을 알아듣는 이는 없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언어 분석기를 통해 통역이 가능하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사평의 공격이 이어지려 하자 요드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것들 보게나, 그냥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그 결정과 함께 사파인들의 운명도 결정나고 말았다. 기체에서 수십 가닥의 은하 광선이 발사되어 그만 백여 명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마교 교주 사평을 비롯한 모두는 몸에 구멍이 뚫린 채 그렇게 죽고 만 것이다.

요드란은 다시 침착을 되찾고 시스템을 통해 이곳이 지구 별임과 중도에 문제가 생겨 화타의 시대보다 700년 정도 후세대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어 다시 본래의 시간으로 맞췄다.

‘이번에는 제대로 가야 할 텐데…….’

어느덧 타 행성 간 시간 이동 장치는 서서히 그 모습을 희미하게 하더니 마교의 소광장에서 사라졌고, 오로지 시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파의 고수들을 쓸어버린 의문의 고수, 전설로 남겨진 그 고수는 바로 ‘타 행성 간 시간 여행 장치의 요원’이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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