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48화 (48/125)

# 48

보통 사람이 생각할 때는 스스로의 망상에 사로잡혀 한심한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혀를 찰 일이었다.

그러나 홍추는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었다.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라면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확실했다.

강호에서 그는 ‘움직이는 무림사(武林史)’로 통한다.

그가 모르고 있는 일이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단정해도 좋았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강호는 살수 조직을 찾고, 곤란이 있을 때 강호는 후흑문을 찾으며,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만박괴자를 찾는다.

이제껏 많은 조직과 강호인들이 그에게서 해답을 얻어갔다.

또 어떤 이들은 그의 입이 조직의 허물을 토설할 것이 두려워 죽이려고도 했다.

시도는 많았으나 그는 언제나 건재했다. 죽었으면 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 그가 살아 있기를 원하는 무리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건재한 데는 그 스스로가 강한 힘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강호십괴(江湖十怪) 중 한 명이자 기관진식에 통달하여 설령 어떤 조직이 숫자로 그를 무력화시키려 해도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만박괴자일진대 그는 지금 너무도 쉽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가만히 가옥을 돌아보았다.

소박한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장은 없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무릎 높이의 풀이 자리했다. 평상 하나, 저만치 항아리 일곱 개, 밭을 일구는 기구들이 기대서 있다.

한쪽에는 빨랫줄에 옷이 널려 있다. 탁자와 그에 맞는 의자 네 개. 그 모든 것에 정감이 어렸다.

그는 잠시 푸근한 느낌에 불안한 마음이 작으나마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더라도 올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 이제 맞을 준비를 해야겠지?”

그는 안쪽에서 탁자를 꺼내 뜰 중앙에 놓고 그 위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어쩌면 술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아니더라도 자리를 펴놓으면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충 자리가 마련된 후 그의 손이 한순간 허공을 향해 대여섯 번 뻗어갔다. 아무렇게나 뻗은 의미없는 장력인 것만 같았으나 곧바로 변화가 찾아왔다.

우우웅!

미세한 진동과 함께 울리던 소리는 짧게 멈췄다.

눈으로 확인된 그 무엇도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어떤 물체의 이동도 없었고, 주위의 풍광도, 그렇다고 침입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 외부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이 차단되는 진법이 발동된 것이다.

그러나 홍추는 이 진법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불안의 실체가 얼마나 빠른 시간에 진법을 돌파할 것인가가 보고 싶었고, 그로 인해 불안의 실체의 수준과 경지를 짐작해 보고 싶었다.

그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반인반수인지, 생명이 아닌 그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 시진이 지나갈 무렵 배치해 둔 의자에 앉아 있던 홍추는 가슴이 옥죄오는 통증에 숨이 막혀오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정작 그 실체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님에도 압박은 마치 산악이 자신에게로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왔다!’

그는 기력을 돋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쾌하고 깔끔한 타격음이 들렸다. 질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비슷했는데 그 깨지는 소리가 청명함을 유지한 채 길게 늘어진 듯한 소리에 가까웠다.

파~앙~!

소리가 들린 직후 그는 전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몸은 지면으로부터 반 장(1.7미터가량) 정도 떠올라 허공에 매달렸다.

이 기이한 현상은 비단 그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탁자는 물론이고 그 위에 놓인 술잔과 술병들, 빨래들, 심지어 땅을 구르던 돌과 집을 두르고 있는 풀들까지 뽑혀진 채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떠오른 모든 것들은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 허공에 뜬 채로 한 지점에 머물렀다. 홍추로서는 이런 현상에 대해 당혹해하다가 문득 사부의 음성이 떠올랐다.

“무령초공진(無靈超空陣)을 와해시킬 수 있는 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중에는 아마도 진법을 해석하여 들어오는 경우가 아닌 통째로 돌파할 자가 있을 것인데 그때는 땅이 힘을 잃게 되고 진 안의 모든 것들이 허공으로 떠오를 것이다. 만약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결코 그 사람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상념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문득 그의 몸은 다시 지면으로 내려섰다. 더불어 모든 것들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홍추는 자신의 면전에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홍추는 그가 불안의 실체임을 알 수 있었지만 순간 짙은 의혹이 떠올랐다.

‘이 노인인가?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눈앞에 있어도 어떤 압력도 느낄 수 없지 않는가?’

정작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불안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 숨을 쉬기조차 불편했는데 이처럼 가까이에서 대면함에도 도리어 편안한 마음이 드니 그로선 이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한 가지 생각이 들며 마음이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렇군. 이 노인은 내게 물을 것이 있는 게로구나. 그렇기에 날 찾는 중에는 조급함에 가공할 살기를 드러냈다가 정작 날 찾으니 태평한 마음이 든 것이겠지.’

홍추의 짐작은 거의 맞아떨어졌다.

이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불사천마로 필사방인들의 말을 따라 홍추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괜한 짓을 했더군. 자네가 만박괴자겠지?”

그건 곧 진법을 발동시킨 것을 말함이었다.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홍추는 이제 예순 살을 넘기는 나이라 외모상으로는 불사천마와 그다지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불사천마는 이곳에 이르는 동안 필사방인들 앞에 드러냈던 모습과는 또 달라져 있었는데 원숙한 노년의 모습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한 외모였다.

그럼에도 홍추가 스스럼없이 존대한 것은 상대가 강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이 보는 것과는 달리 나이를 헤아리기 힘든 자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군. 자넨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인가? 허허, 내가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니었군.”

“앉으시죠.”

홍추는 준비된 술을 잔에 따르며 물었다.

“먼 길을 오신 듯한데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없을까 염려스럽군요.”

이 말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다는 뜻을 부드럽게 표현한 말이었다.

불사천마가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채워진 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고 말했다.

“조건이 있는 거로군. 돈은 아닐 테고, 뭘까? 궁금해지는걸?”

“어르신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라면 결코 제 입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죽어도?”

불사천마의 음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묘한 공포가 주변을 한순간에 물들였다.

“물론입니다.”

“타협의 여지는 없다인가?”

홍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어야지.”

홍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떤 타협이나 재요구 없이 이렇듯 간단히 자신을 죽이겠다고 선포하다니……. 자신을 찾기 위해 많은 날을 쉬지 않고 달려왔을 터인데 이렇게 무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으나 너무 쉽게 상대가 포기하자 도리어 이것이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처럼 느껴졌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그래도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

불사천마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한순간 평범한 노인에서 악마로 변했다. 눈은 붉게 타오르고, 손은 가시나무처럼 마르고 날카롭게 변해 홍추의 어깨를 붙들었다. 홍추는 공포에 질려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어떤 소리조차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아 그저 입을 벌리고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강호십괴 중 한 명이라는 명성과 힘은 도무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녕 이제껏 그가 불안해하던 모든 것이 현실로 닥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사랑하는 제자들, 그동안 지내온 인생의 희로애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러한 상념도 잠시 어깨 쪽으로 이제껏 체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 몰려들어 그는 황급히 눈길을 주었고, 즉시 처절함 속에 파묻혔다.

거기엔 어깨 밑으로 뽑혀진 자신의 팔이 보였다. 아직까지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떠냐? 나머지 한쪽 팔과 두 다리도 뽑아주었으면 하느냐?”

“날 죽여라!”

“하하하하, 기상은 좋다만 현실에서는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남은 왼팔이 붙들리고 막 뽑히려는 순간 정작 뽑혀 버린 것보다 그것을 기다리는 그 순간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솟구친 말을 가까스로 삼키고 눈을 감은 순간 왼팔도 뽑혀 나갔다.

“으아아아악!!”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고통과 공포를 한꺼번에 모아놓는다 해도 지금 이 고통과 두려움에는 비길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순간 어둠이 밀려오고 동시에 홍추는 머리가 어질하면서 정신을 잃기 직전에 작은 의식의 소리를 들었다. ‘정신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 없어’라는 속삭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어쩌면 이생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의식이 찾아들고 힘겹게 눈꺼풀을 올리면서 눈을 떴다.

밝은 빛이 눈 안 가득 들어오고 정면으로 낯익은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노인이 말했다.

“꽤 쓸 만하구나.”

홍추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두 팔이 아무 이상 없이 붙어 있다는 것과 주변에 흥건해야 마땅한 피가 없다는 것에 한순간 ‘아’ 하는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자신이 마치 잠깐 악몽을 꾼 듯했을 뿐 주변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람은 환술을 펼쳐 나를 시험한 거로구나. 환영이 펼쳐졌어도 전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었다니 놀랍기 그지없구나. 도대체 이 노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홍추의 의문은 누구냐가 아니라 무엇이냐로 바뀌어 있었다. 도무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후후, 결의가 그 정도라면 내 인정해야겠는걸. 좋다. 네가 죽을 때가 아닌가 보구나. 내가 묻는 것도 누굴 죽이기 위함이 아니니까.”

“말씀하십시오.”

“우화등선의 길을 아는가?”

홍추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화등선이라 함은 높은 경지에 이른 자가 극한의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이룰 수 있는 것이잖습니까?”

즉, 자신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고, 너는 가까이 이른 듯한데 왜 나한테 묻느냐는 뜻이었다.

“나는 길을 잃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홍추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라면 굳이 목숨을 내놓고 거부할 까닭이 없었다. 단지 과연 원하는 답이 될 수 있을지가 염려라면 염려였다.

“흠, 그런 사람을 알고 있긴 합니다만…….”

불사천마의 눈빛이 한순간 반짝였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그는 이미 우화등선하였습니다.”

“음…….”

먹구름이 불사천마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급하게 물었다.

“그의 제자는?”

홍추는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말을 해도 좋을지 가늠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내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우화등선한 이는 전대의 후흑문주이며 그의 제자는 현 후흑문주입니다.”

“후흑문?”

“신비 문파이지요. 강호에는 신비한 두 개의 조직이 있는데 하나는 후흑문이고 다른 하나는 허망회입니다. 후흑문은 얼굴이 두껍고 마음이 검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을 지닌 문파로 다른 말로는 해결의 문파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후흑문은 이제껏 수락한 의뢰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후흑문이라…….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더냐?”

“대단하지만 또 대단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후흑문주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들이 어떤 문제들을 해결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천하제일고수인 신비무영(神秘無影)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지요. 신비무영이 후흑문주인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음, 그 친구가 우화등선을 했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 한데 자넨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순간 천마의 눈이 번쩍였다.

‘설마 유체 이탈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놀라운 일이로구나.’

천마가 빙긋이 웃는 것을 보고 홍추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본래로 돌아왔다.

“굉장하군, 굉장해.”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묻거나 시인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인 시인이 오고 갔다.

“그러니까 자네 말로는 어쩌면 신비무영이 제자에게 우화등선의 길을 알려주고 갔을지 모른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후흑문은 쉽게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어르신의 능력이라면 틀림없이 후흑문 사람들을 다 죽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어르신도 죽습니다.”

한순간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먼저 정적을 깨뜨린 건 불사천마였다.

“하하하하하! 그럴 수밖에 없다면 다 죽어야지!”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

13. 기이한 의뢰자

뎅뎅뎅뎅!

깊고 긴 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흔히 사찰에서 울려 나는 종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일단 소리의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온 산야의 잠든 생명체들이 일거에 놀라 일어설 만큼 어마어마한 굉음이었던 것이다.

화들짝 놀란 새들이 밤하늘로 솟아올랐고, 여기저기서 기이한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어딘가로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종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고 있었는데 다섯 번의 울림이 있은 후로는 그 소리가 차츰 작아지더니 급기야 열 번째에 이르러서는 듣기 편안한 소리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 깊은 밤, 난데없는 소란을 피운 자는 다름 아닌 불사천마였다.

그는 만박괴자 홍추로부터 후흑문의 본거지를 전해 듣고 잠시도 숨을 돌리지 않고 이곳에 이른 것이었다.

홍추가 설명한 내용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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