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이 자식은 내가 음식으로 보이나? 왜 군침을 삼키고 지랄이야?”
그건 명백히 독백조였다. 심온이 흠칫하고 바라보자 담유설도 흠칫해서 심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 그녀는 다시금 조용히 중얼거렸다.
“혹시 이놈 내가 속으로 씨부린 말을 들은 건 아니겠지?”
순간 심온은 오른손으로 심장 쪽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자자, 문주님, 어서 말씀해 보셔요. 호호호호!”
그녀의 강력한 태연자약에 심온은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입을 열었다.
“담 당주, 내가 요즘 신기한 능력이 하나 생겼는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라네. 그러니 내 곁에 있을 때는 생각하는 것도 좀 가려서 해주었으면 싶군.”
심온은 화를 내거나 혹은 삐닥하게 맞서 조롱하지 않고 지혜로운 말로 대처하자 담유설이 환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쳐댔다.
“하하하, 역시 문주님이시군요. 제가 졌습니다. 용서를 빌지요. 자, 그럼 말씀을 들려주실 거죠?”
심온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만족하여 말했다.
“강호(江湖)에서 떠도는 말 중 ‘허망(虛妄)함이 하늘을 수놓고, 후흑(厚黑)은 바람처럼 세상을 휩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담유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음, 하지만 짐작해 보자면 바람처럼 세상을 휩쓴다라는 후흑은 후흑문을 뜻하는 것일 테고, 하늘을 수놓는 허망함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걸요.”
“이런이런, 심각하군. 그 말은 강호에 견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거늘. 하늘을 수놓는 허망함은 ‘허망회(虛妄會)’를 일컬음이지.”
“허망회라뇨? 그것도 무림의 한 문파인가요?”
“마땅히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것도 신기루 같은 문파라고나 할까?”
“오, 그러니까 개방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허망회’ 사람들이라는 것이로군요?”
“맞아. 아주 황당하고 허망한 놈들이지. 하하하하!”
“그런데 제가 보기에 문주님은 상당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음, 싫어할 이유가 없지. 그놈들이 하는 짓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황당함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유익한 것들이거든.”
“유익한 것들요? 아니, 그럼 개방 방주를 괴롭히고 있는 그 온갖 추접한 일들이 정녕 개방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요?”
“물론이지. 지금은 때가 무르익지 않아 개방에 이야기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까닭에 대해 설명해 줄 참이야. 아마 그때가 되면 개방은 과거의 명성에 훨씬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될걸.”
“에휴,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네요. 그 온갖 추잡스런 짓거리들이 뭐가 유익이란 것인지…….”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저절로 수긍이 가게 될 거야.”
담유설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그건 제2대 허망회주의 숭고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2대 허망회주의 죽음은 강호의 두 거대 문파인 무당과 화산의 분쟁이 원인이었다.
두 문파는 정파로서 기본적인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검(劍)을 논함에 있어 호적수의 관계인 터라 경쟁자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생각은 문파의 장문인으로부터 문지기까지 마음에 새겨진 까닭에 강호의 생리상 가끔씩 시비가 붙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시비 중에도 무림의 시선을 의식하여 도를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은 서로 간에 자제했다.
그러던 차에 그만 화산의 제자가 무당의 제자를 죽인 일이 벌어졌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은 직계제자가 아닌 속가제자였지만 일은 점점 더 커져 무당과 화산의 전면전으로 비화되어 갔다.
소림을 위시한 여러 정파에서 분쟁을 조정하려 했으나 이미 서로의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한 터라 그 누구의 만류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두 문파는 제삼(第三)의 지역에서 승부를 가리기로 하고 고수들이 모여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일촉즉발의 상황. 누구 한 사람이 섣불리 몸을 날린다면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는 결코 물러설 수 없게 된 바로 그때, 홀연히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두 문파가 대치하고 있던 곳은 협곡이었는데 나타난 사람은 협곡의 중간 정도 높이에 불쑥 튀어나온 암석 위쪽이었다.
“멈추시오! 이 무슨 해괴한 짓인 게요!”
온 협곡이 쩌렁 하고 울렸다. 양 문파는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가 내공의 조예가 깊은 것을 보곤 놀란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의를 걸친 육십 전후의 노인이었는데 멀리서 보아도 기상과 위엄이 절로 느껴졌다.
“무당과 화산은 이 노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오! 강호무림에서 두 문파가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오늘날 어둠의 세력들이 준동치 못하는 까닭은 각 정파가 서로 다르면서도 마치 하나처럼 마음을 같이하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런 마당에 이처럼 분쟁을 하게 된다면 앞으로 제2, 제3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느냔 말이오!”
노인의 음성은 비단 명확이 들리는 것뿐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무당과 화산의 뭇 고수들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노인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어찌 다툼이 없을 수 있겠소! 하지만 매 다툼마다 온 집안이 들고일어난다면 단 하루라도 집안이 편할 날이 없을 거요! 게다가 여러분들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것이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여러분들은 애통해 하면서 ‘생명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소! 하지만 지금 주위를 둘러보시오! 지금 내 곁에 선 이들이 오늘 이 싸움에서 죽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단 말이오! 명확히 시시비비를 가려 사과해야 할 쪽은 과감히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고, 사과를 받을 쪽에서는 내민 손을 붙잡을 수 있는 광대한 포용력을 보여준다면 이 어찌 강호무림의 복락이 아닐 수 있겠소!”
거기에 이르자 분위기는 숙연해지기에 이르렀다.
처음과는 완연히 다른 기운이 협곡에 퍼져 갔다. 하지만 아직까지 뽑아 든 검을 제자리에 꽂지는 않았다. 자칫 누군가 말 실수라도 하거나 급작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 상태는 여전했다.
“하하하하, 내가 너무 건방졌구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이야기를 하다니, 내 그쪽으로 내려가리다!”
백의노인이 선 곳은 아래로부터 십여 장(33미터) 정도의 높이였다.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부담을 느낄 만했기에 무당과 화산인들은 모두들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노인이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고, 다시 몸을 비껴 돌면서 떨어지는 것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경공에 있어 나름대로 조예가 깊다고 자부했던 무당과 화산의 고수들도 저마다 탄복을 금치 못했다.
노인의 신형은 지면에 거의 이를 때까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변화를 보였다.
그리고 끝내 노인의 신형이 땅에 착지했다.
쿵!
순간 무당과 화산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현란하기 짝이 없던 신법의 소유자인 노인이 그만 착지를 함에 있어서 두 발이 아닌 어깨로 들이박으면서 맨 땅에 처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악!!”
참담한 비명이 협곡 전체에 울려 퍼졌고, 무당과 화산인들의 마음에는 황당함이 소름 돋게 피어났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누구도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노인은 입을 다물고 ‘흐음, 흐음’ 하고 신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나 좀 살려주시오.”
힘겹게 뱉어낸 말에 무당과 화산의 고수들이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달려들어 응급조치를 했다.
하지만 노인의 상세는 위급하기 짝이 없었다.
“노인장, 힘을 내셔야만 합니다!”
“이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들이 안타깝게 외쳤다.
그러자 노인은 고통 중에서도 웃음을 머금더니 두 사람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난 이제 가망이 없구려. 두 문파가 다투는 것에 내 마음이 갈가리 찢겨지고 헝클어져 내력을 운용하는 데 크게 실패를 하고 말았소이다. 내 마지막 소원은 부디 큰 뜻으로 서로를 포용하는 두 문파가 되길 바랄 뿐이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힘없이 눈을 감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기까지 심온의 말이 진행되자 담유설은 어이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심온을 바라보았다.
“그 노인장이 허망회주였단 말인가요?”
“그렇지. 달리 허망회겠어? 허망하게 가버린 거야.”
“에이, 설마 귀식대법이라든가 뭐 그런 것으로 죽은 척했겠죠.”
심온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진짜 죽었어. 이건 사부님이 직접 들려주신 이야기니까 틀릴 수가 없지. 가짜로 죽은 체했다 해도 사부의 눈을 속일 순 없었을 테니까.”
“아니, 그럼 정말 그렇게 죽어버린 거란 말예요?”
“허허, 그렇다니까 그러네. 뭐, 허망하게 죽긴 했지만 덕분에 무당과 화산은 화해를 하게 되었지. 당시 사람들은 그 일이 허망회의 작품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뒷날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허망회가 아니었을까라는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지.”
“허망회의 조직이나 그들의 무공 수준은 어때요?”
“워낙 허망한 족속들이라 자세한 건 모르겠고 무공 수준은 대단하면서도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엉뚱하기도 해. 음, 예를 들자면 허망회주가 사부와 맞서서 지지 않았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담유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심온이 키킥거리면서 웃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야, 아주 웃긴 게 사부가 뒤지게 패는데 그렇게 맞고도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더란 거야. 나가떨어져서는 꾸역꾸역 일어나서 폴짝폴짝 뛰면서 ‘아직 승부가 가려진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덤벼대니 결국 사부가 귀찮아서 욕을 해주고 그냥 왔다더라고. 아, 물론 사부가 죽여 버리려고 했다면 더 이상 일어나고 말고가 필요없었겠지만 허망회는 유익한 녀석들이라 사부도 살수를 쓸 수는 없었던 게지. 하지만 그 와중에 그 매들을 버텨냈다는 게 어디야. 그러니 그 무공이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있겠냐구.”
“햐아, 거참 희한한 무리로군요. 허망회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주세요.”
“그럴까? 음, 이번에 나는 순심선행대전이 벌어진다고 했을 때 이것도 필시 허망회에서 계획한 것이 아닌가 했었지. 하지만 잠깐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겠더군. 왜냐면 순심선행대전은 아무리 봐도 선한 뜻으로 했다고 볼 수 없거든. 그런 짓은 아무리 허망회가 허망하다고 해도 하지 않지. 그 족속들은 대의명분이 있는 것을 좋아한단 말씀이야. 자, 그럼 허망회의 일 두 가지 정도만 오늘 이야기해 주지.”
심온은 그때부터 입을 열어 ‘주방장’ 이야기와 ‘위대한 청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작가 주:이 두 이야기는 3권의 부록으로 실린 외전에 기록)
***
12. 궁금한 것이 있다
“속히 무당으로 가라. 서두르지 않는다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니 가는 길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어야 할 것이다.”
제자에게 서신을 건네는 만박괴자 홍추의 음성엔 자못 비장함이 서렸다.
그 앞에는 두 제자가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는데 그중 대제자인 형표가 공손히 서신을 받들었다.
“제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어서들 일어나라.”
사부의 채근에 두 제자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떠나기 바로 전 형표는 입술을 깨물면서 무슨 말인가 물으려 했지만 스승의 다그침에 아무 말도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만박괴자는 두 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다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지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한숨은 안도인 것도 같았고 걱정인 것도 같았다.
닷새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거리며 피어났다.
어떤 까닭인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을 알 길이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은 계속 커져만 갔다.
급기야 어제부터 불안은 극에 달해 가만히 앉아 있을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자 그는 두 제자를 멀리 피신시키고자 무당에 다녀오라고 한 것이었다.
그가 두 제자에게 명한 무당의 운학 도장에게 전하라는 서신 속에는 그저 평범한 안부를 묻는 내용이 적혀 있을 따름이어서 언제 도착하든 상관이 없었다.
정확히 불안의 실체가 죽음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지만 죽음도 배제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제자들이 돌아올 때쯤엔 싸늘한 시체가 되어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솔직히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정든 곳이라지만 목숨이 끊어진 후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아예 거주지를 옮길 생각도 했고, 그게 아니라도 한 일 년 정도 다른 곳에 가 있거나 강호 유람을 하는 것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안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히 든 것이다.
마치 어둠을 피하고 싶다고 해도 시간이 되면 원치 않아도 밤이 임하듯 불안의 실체도 잠시 지체시킬지언정 떨쳐낼 수는 없다고 결론 지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선책으로 정한 것이 제자들의 도피였다.
먼 하늘을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자 떠나기 전 무슨 말인가 하려던 대제자 형표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이 어느새 그렇게 컸단 말인가. 고작 열여덟에 불과해 늘 어린아이 같더니 오늘 보니 어른이 다 된 것 같지 않던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날 염려하는 듯 눈빛이 아주 복잡했지.’
다시 눈을 떠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았다.
하늘을 향해 고마움과 서운함이 교차했다.
‘좋은 녀석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또 어쩌면 빠른 이별을 해야 할지도 몰라 서운합니다.’
첫째 형표를 거둔 지가 십 년째이고, 둘째 양문을 거둔 지가 사 년째이다. 늘 엄한 모습만을 보였지만 그의 마음 안에서 두 제자는 두 아들이었다.
‘이제 얼마나 남은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누구?’
의문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렇다. ‘누구’란 말은 잘못된 말이었다.
정작 그는 불안의 실체가 누구인지, 어떤 형태인지, 과연 사람이기나 한 것인지조차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죽음을 근심하고 이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