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46화 (46/125)

# 46

“음하하하! 이것은 본때를 보여줄 때 사용하는 ‘흑륜(黑輪)’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위력적인 륜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그러나 거지 중의 최고의 거지라는 개방의 방주이니 본좌는 심히 기대하는 중이다!”

상묵의 목소리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윽고 성큼거리며 다가오더니 양손을 번갈아 돌리면서 마치 흑륜이 허공을 날아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칠 때 입으로 소리를 내고 손에 잡고 달려가는 것만 같은 형상이었다.

“슈웅! 쉬리쉬리쉬리리릭! 받아라!”

상묵은 입과 손을 쉬지 않고 놀리면서 흑륜을 몰고 와서는 강호의 방파로서는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개방 방주 종표의 심장 쪽에 흑륜을 꽂아 넣었다.

역시 이번에도 정작 소리는 상묵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푸욱! 으아악!”

종표의 가슴에 짓눌린 흑륜은 절반가량이 뭉툭해져서 어떻게 보면 꽂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정신이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웃음도 나오지 않을 상황이었다.

솔직히 종표는 때륜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땅히 피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기가 막혀 한순간 온 천지가 공허하게 느껴져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느라 때가 가슴에 박히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도전장을 받은 날로부터 얼마나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는지 모른다. 개방의 영광을 위해 잠도 하루에 고작 한 시진 정도로 줄이고 내공과 무공 수련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할진대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솔직히 이 자리에 개방 식구들만 있다면 지금처럼 당혹스럽진 않을 것이다. 한데 화산과 곤륜의 두 장로와 낙양의 입이라고 불리는 재담꾼 소요자가 멀쩡하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 종표는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다고 소문을 내지 않기 위해 이들을 다 죽여 없앤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말이다.

이것은 지켜보는 두 장로도 마찬가지라 이 엽기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고 그저 멍해질 따름이었다.

반면 화산과 곤륜에서 온 두 장로와 소요자는 실소를 역시 남의 집안 일인지라 솔직히 배꼽을 잡고 뒹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느라고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거창한 공증을 기대했건만 뜻하지 않게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구경을 공짜로 하게 되었으니 이곳까지 온 것이 결코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강호의 각 문파는 은근히 같은 정파 연대를 내세우면서도 자신들의 문파가 더 존귀히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들인지라 내색은 안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종표가 멍하게 있든 말든 상묵의 무기술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 흑륜을 만들었던 상묵은 양쪽 끝이 뾰족한 흑창(黑槍)을 만들었다가 지금은 흑도(黑刀)를 거의 완성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자, 조금만 기다리시오. 이번에 나타나는 도(刀)는 일명 흑살도(黑殺刀)라는 것으로 세상천지의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효용을 지니고 있다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종표의 안색은 점점 검게 변하였다. 또한 공증인 세 사람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입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그것은 분노해서가 아니라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어느덧 상묵이 때 무기를 곱게 갈무리하고 물러서자 이번에는 다른 거지가 종표 앞에 섰다. 이때에 이미 종표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내 이름은 황운, 그대에게 진정한 경공술을 보여주겠소. 상묵이 무기술을 보였으나 그것은 먼저 경공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오.”

황운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호리병의 마개를 열더니 머리에 붓기 시작했다. 물이 상했는지 아니면 원래 상한 물을 넣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괴한 악취가 호리병에서 퍼져 나왔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이들도 악취에 얼굴을 찌푸릴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황운은 선녀탕에라도 들어간 것마냥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 회전술!”

황운은 축축히 젖은 몸을 누이더니 땅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는 종표 앞까지 굴러갔다가 종표의 발에 닿자마자 다시 튕겨나오며 반대쪽으로 구르는 것을 반복했다.

삽시간에 황운의 몸에는 흙먼지가 가득해졌고, 점점 본래 형태가 사라져 갔다.

“회전술의 끝은 어디인가? 무기술보다 더 위대한 것은 회전술뿐이다.”

하는 짓과는 달리 황운의 목소리는 장엄하기까지 했다.

종표는 얼이 나가 버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때까지 다른 세상, 어둠의 한복판을 떠돌고 있는 중이었다.

황운이 자신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마치자 다음 차례인 원담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종표 앞에 섰다.

이때 지켜보던 개방의 두 장로 염천과 송각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는 더 이상 이런 자리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여기고 방주 앞을 가로막고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개방은 거지들의 자유로움과 그 사상을 유지할 뿐 실제로 거지 생활을 하는 집단이 아니다! 오늘의 무례는 너희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벌하지 않겠으나 다음에는 결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라!”

말하는 염천의 두 눈에서는 불을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원담은 자신의 절예를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겁한 사람들이로군. 그럼 우리에게 순순히 패배하였음을 인정하도록 하시오!”

이때 염천과 송각은 얼이 나간 방주 종표를 부축하고 자리를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결코 이것이 끝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진정한 거지 왕초의 자리에 우리는 끝까지 도전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염천과 송각 두 장로의 마음은 살심으로 끓어올랐다. 아예 두 놈 다 죽여 없애 이번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공증인으로 따라온 이들의 눈이 있어 차마 죽일 수 없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자, 어서 가도록 합시다.”

두 장로의 재촉에 화산의 악예, 곤륜의 소명, 그리고 소요자 방숙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웃어서는 안 되는데, 절대 웃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도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 때문에 어떻게 되버릴 지경이었다.

* * *

개방 총타로 돌아간 종표는 비록 도전장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보름(15일) 정도가 지나자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동안은 기억이 너무도 생생히 떠올라 솔직히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이젠 어느 정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싶었는데 그 뒤로 큰 폭풍우가 몰아쳤다.

지난번 소동이 어떤 경로를 타고 전파되었는지 모르나 중원 천지에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한 자마다 웃지 않은 자가 없었고 중원의 지천에 깔린 수많은 걸인들마다 도전 정신을 키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소문의 경로는 원래 세 명의 거지에 의해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그저 우스갯소리로 생각할 뿐이었고 그리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낙양의 입’이란 칭호로 이름을 날리는 소요자 방숙의 입이 열린 후였는데 그는 참고 참으며 버티다가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가까운 지인들을 모아놓고 털어놓게 되었고, 그것을 기화로 불처럼 소문이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문제가 된 것은 단지 소문이 전해졌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중원의 수많은 걸인들이 도전 의식을 발휘하여 개방 방주를 찾아다니며 진정한 거지대왕을 가리자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의 거취를 파악하는지 어디로 숨고 변장을 하든 간에 그를 찾아내 대결을 벌이자고 성화를 부렸다.

심지어 이들 거지 무리가 어느 면에서는 개방보다 더 강한 세력화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방주 취임 한 달째부터 종표는 그렇게 거의 일 년간을 시달린 끝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 *

종표는 병째로 술을 꿀꺽거리며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내 말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오. 먼저 가겠소. 따라 나오지 마시오. 혼자 있고 싶소이다.”

술 취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 있어 장로들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큰 외침이 객잔을 울렸다.

“여기 거지 중의 상거지가 있다! 개방 방주 종표는 어서 나와 나의 본때를 받으라!”

종표의 얼굴이 삽시간에 푸르스름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광분했다.

“으아악! 나 좀 내버려 두란 말이다!”

다 때려치우겠다는 방주의 엄포에 장로들은 대책 마련을 위해 자리를 같이했다.

개방은 이제야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출발점에 섰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반드시 결론을 짓도록 합시다.”

집법 장로가 ‘반드시’라고 말한 것은 닷새 전부터 이틀 간격으로 머리를 맞대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그저 서로 탄식만 늘어놓다 해산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만 끌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역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전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방주라 생각하오. 그까짓 일로 마음을 상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외다.”

전공 장로가 하나마나한 소리를 꺼내자 처음 의도와는 달리 좌중은 이내 시끄러워졌다.

“아니, 그래서 그대가 방주가 되어 이끌어보겠다는 것이오?”

“내 말뜻을 잘 알잖소. 방주가 좀 더 책임감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강하게 충고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오.”

이쪽 저쪽에서 방주의 나약함을 탓하는 이며, 그게 지금 해결책이냐며 삿대질을 하는 이들과 그만 두라고 고함치는 소리까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난리 고성이 한순간 멈췄다.

문이 열리며 터진 외부의 호통 소리 때문이었다.

“지금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요!”

바라보니 그곳엔 방주가 슬픔과 분노가 섞인 얼굴로 서 있었다.

“내가 이 꼬라지를 안 보려면 죽어야지. 죽는 게 백번 나아.”

방주 종표가 절규하듯 외치자 장로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였다.

그날 밤 다시 장로들이 모였다.

그들은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져 있었다.

솜들은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다 한 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젠 욕을 먹어도 좋소. 난 솔직히 개방이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이젠 인정하리다. 우린 그들을 막을 수 없소. 누구인지도 어떤 목적으로 접근한 것인지도 모르오.”

독백처럼 중얼거린 건 집법 장로였다. 그는 자존심이 강할 뿐 아니라 개방의 위신과 체면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였던지라 다른 장로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집법 장로의 말이 이어졌다.

“굳이 말을 돌리지 않겠소. 이 말이 끝난 다음 내게 돌을 던져도 좋소. 지금의 난 후흑문을 떠올리고 있다오.”

다른 장로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의 얼굴엔 분노한 기색 대신 씁쓸함과 연민이 혼재된 채 드러났다.

집법 장로가 저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내부 갈등을 겪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개방은 대대로 무림 방파 중 정보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떤 문제를 해결코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은 후흑문이 되었다. 사실이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개방의 마음이었다.

옛 명성에만 기댄 채 내부에서는 최고를 외쳐 댔다. 그런데 이제 집법 장로가 감추고 싶은 깊은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다른 장로들은 돌을 던지는 대신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모두를 대신하여 하기 힘든 말을 해주시니 고맙소이다.”

“현실을 직시할 줄 알고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자가 끝내 승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옳으신 말씀들이오.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의 명성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던 게지요. 새로 시작해 봅시다.”

계속된 동의 속에 장로들은 더욱 낮아졌지만 그렇게 한마음이 되면서 그들 전체로 볼 때는 더욱 큰 자들이 되어갔다.

***

11. 허망함이 하늘을 수놓다

심온이 집무실에서 두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고 느긋이 기대 앉아 있을 때 불쑥 담유설이 찾아왔다.

심온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녀의 직책명이 떠오르면서 모든 것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방종당주!

방종을 기본으로 하는 당주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들어온다거나 인기척을 내면서 들어온다면 그 어찌 방종당주라 할 수 있겠는가.

“아, 심심해. 뭐 재밌는 일 없어요?”

심온은 들은 척도 않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내민 발을 밀면서 까닥까닥거릴 뿐이었다.

담유설은 반응이 없자 여기저기 새끼 쥐처럼 눈을 굴리다가 책상 위에 약간 구겨진 채 놓인 서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버릴 건가 보죠?”

그녀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서신을 읽어나갔다.

그녀는 중간 정도 읽다가 실실거리며 웃으면서 다시 구겨서 옆에 놓았다.

“후후, 어느 놈들인지 개방 흉내를 그럴싸하게 냈군요.”

“그거, 진짜 개방에서 온 거야.”

심온이 까닥까닥 움직이면서 답했다.

“네? 설마 그럴 리가요. 제아무리 개방이 과거 같지 않다고 해도 어느 누가 이렇게 희롱할 수가 있죠? 게다가 이게 사실이라면 왜 버리려는 듯 구겨놓은 건가요?”

구겨진 서신의 내용은 개방의 집법 장로가 기록한 것으로 그동안의 고충과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의뢰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담유설로서는 애들 장난도 아니고 설마 하니 개방이 이런 농락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심온은 책상에서 번쩍 다리를 내리고는 눈에 힘을 주며 담유설을 바라보았다.

“이거이거, 방종당주는 강호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후흑문에 몸을 담고 있는 자라면 척 보면 ‘아!’ 하는 감탄사가 나와야 하는 거야.”

그 말에 담유설은 그냥 배시시 웃었다.

“흠, 좋아. 그럼 이 문주 어르신께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지.”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이 말을 할 때 담유설은 무척이나 애교스러웠기에 심온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내 심온은 자신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의식을 단번에 떨쳐 냈다. 그건 담유설이 속으로 독백해야 하는 말을 속으로 하지 않고 조용히 읊조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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