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그는 주인의 당부 중 하나는 이루고 또 하나는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훌륭하게 보필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무환이 뜻밖에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을 원하면서였고, 후흑문과 긴밀히 상의한 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독태는 잠든 어린 주인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을 꼭 찾으십시오. 저는 손꼽아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10. 개방 방주의 수난
개방 방주 종표(棕票)는 호리병을 들어 거칠게 입에 부어 넣었다.
그는 나이 스물아홉에 천하제일방파라는 개방의 방주가 되는 영광을 얻었지만 방주가 된 지 일 년이 넘어가는 지금 그의 마음과 얼굴은 참담히 일그러져 있었고, 삶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처럼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종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휴, 도저히 이대로는 방주 자리에 있을 수 없소이다. 장로들께서는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오.”
그가 앉은 탁자 주위로 개방 팔대장로 중 네 명의 장로가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방주님, 어찌 그리 심약한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백만을 헤아리는 형제들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장로들의 간곡한 만류가 이어지자 방주 종표가 술 호리병을 거푸 들이 마시다 거세게 내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닥치시오!”
어찌나 세게 내려쳤는지 호리병이 산산조각나고 안에 든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종표의 말이 이어졌다.
“왜 내가 희생을 치러야 한단 말이오! 그대들이 직접 고역스러움을 당해보지 않았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이오! 장로들 중 누구라도 직접 경험해 보면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내 결심은 확고하외다! 나는 방주 자리에서 물러날 뿐 아니라 앞으로 개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다음 방주가 정해질 때까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터이니 속히 차기 방주를 알아보셔야 할 거외다!”
단호함을 지나 처절하기까지 한 방주의 웅변에 네 장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방주의 강한 반발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기재(奇才)라는 소리를 들으며 개방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방주의 고난을 그들은 누구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매번은 아니지만 그 처절함을 듣고 보았다.
‘왜 갑자기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
장로들의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팠다.
도대체 개방 방주가 이처럼 괴로워하게 된 일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일은 종표가 개방 방주에 오른 뒤 한 달이 막 지날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종표는 방주가 되어 한 달 동안 개방의 체제를 온전히 가다듬어 모자란 부분은 채우고 넘치는 부분은 적절히 조절하여 거대한 조직이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솔직히 그동안의 개방은 명성에 걸맞지 않은 시절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그 세월이 자그만치 백여 년이었다.
전전(前前) 방주가 무리하게 무공 성취를 향해 나아가다 주화입마하여 세상을 뜬 후 개방의 무공을 온전히 전수하지 못하여 개방은 숫자만 많을 뿐 극강의 고수를 배출해 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십육 세에 개방에 들어온 종표는 전임 방주의 가르침을 받으며 오 년 만에 스승을 능가하는 무위를 보였고,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중이어서 개방의 옛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렇게 방주가 된 종표가 바쁘게 개방을 재정비할 즈음에 고난은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그 시작은 하남표국을 통해 전달된 한 통의 서신으로부터였는데 서신의 겉장을 뜯어낸 순간 종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기엔 커다란 글씨로 ‘도전장(挑戰狀)’이라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무공이 결코 약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무림에서 최절정에 이른 것도 아니었기에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전장의 내용은 처절했다.
중원의 모든 거지들의 왕초이자 가장 더러운 개방 방주는 보아라. 그대가 과연 거지들의 총수로서 자격을 갖추었는지 우리들은 보고자 한다. 비겁함이 없다면 우리들의 도전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그 뒤로도 길고 긴 문장으로 도전에 대한 강한 의욕과 의미를 기록하고서 장소와 일시가 적혀 있었다.
종표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방주가 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시점에서 도전을 무시한다면 비겁하다는 소문이 돌 것이고, 도전을 받아들이자니 혹여 실수하여 지기라도 한다면 개방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혼자 고민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종표는 개방의 팔장로를 불러 머리를 맞대고 이 일을 상의했다.
여덟 장로의 안색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들 중 절반은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고 또 나머지는 유치한 장난에 불과할 것이라며 아무것도 아닌 일로 넘기자고 말했다.
뜨거운 공방이 이루어지는 중에 종표는 턱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나 이렇듯 과감히 서신을 보낼 정도라면 도전을 회피했다는 소문을 강호에 퍼뜨리고도 남을 사람들이 아니겠소이까. 아직 기간이 한 달여 남아 있으니 그동안 항룡십팔장 수련에 매진하고 내공 수련에도 힘을 다해 개방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만천하에 보여주고 말겠소.”
신임 방주의 다부진 말에 모든 장로들은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해 방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일치단결된 장로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종표는 다음날부터 개방조직을 다지는 일은 뒤로한 채 무공에 매진했다.
다시 한 달여가 지나고 정해진 시간이 되었다.
개방 방주 종표는 다섯 일행과 동행하여 약속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섯 일행 중 개방 인물로는 팔장로 중 두 명인 염천과 송각이었고, 외부 인사로는 화산파의 장로 매화칠현 악예와 곤륜파의 장로인 운편 진인 소명, 그리고 강호의 재담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소요자 방숙이었다.
굳이 외부 인사들이 참여한 것에는 이번 일을 정식 도전으로 받아들인 상태였기에 대결의 결과를 공증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도전장에 명시된 장소인 추자원에 이르러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크고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꽤 넓은 공터가 형성되어 있어 비무를 벌이기엔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추자원에는 일행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충 해를 보며 시간을 가늠해 보던 이들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도전자를 기다렸다.
다들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실제로 종표의 입장에서는 얼굴과는 달리 진정으로 느긋할 수 없었다.
그전에 강호에서 무공을 겨뤄본 경험이 많이 있었으나 방주가 되고 나서는 처음으로 벌이는 결투였다. 이제는 개방의 명예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라 마음에 다가오는 압박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혹여 싸움에서 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결론 내려지기에 부담이 없었지만 지금은 전체 개방의 흥망과 영광과 수치를 결정 짓는 싸움이 되는 것이다.
‘사부님, 그리고 역대 조사들이시여, 부디 힘을 주소서.’
잠시 눈을 감고 용기를 구한 종표는 눈을 뜨자마자 저만치서 걸어오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하지만 한눈에도 그들이 도전장을 보낸 사람들은 아닐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들의 복장은 너무도 추레했고 얼굴은 윤곽을 뚜렷하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오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무림 방파 중 개방이 거지들의 연합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사상을 의미할 뿐 실제로 구걸을 하거나 옷을 더럽게 입고 다니거나 하는 일 따윈 없었다.
세 사람은 흐느적거리며 걸어오다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아이고, 이거 우리가 늦었구랴. 미리부터 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구먼.”
“아, 그러게 내가 일찍 나서자니까.”
“무슨 소리야. 거지의 체면이 있지. 부지런함은 우리의 원수라는 것을 잊은 겐가?”
“아하, 그렇지. 깨달음을 줘서 고맙네.”
거지들은 인사와 함께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며 말을 나누었다. 종표는 휘청하며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뭔가 거창한 도전자들을 생각했고, 그 때문에 화산파와 곤륜파, 그리고 소요자까지 대동했다. 그런데 이들의 몰골은?
충격은 종표만 받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두 장로의 얼굴이 핼쑥해진 것은 물론이고 악예와 소명, 그리고 방숙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까이 이른 세 거지는 입심 좋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후후, 겁을 먹은 게요? 많이도 대동하고 오셨구랴. 하긴 우리가 좀 무섭긴 하지. 킬킬킬.”
“우리가 오늘 이날을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지 안다면 아마 기절하여 영영 일어나질 못할 것이오. 그래서 기절하는 일이 없도록 그동안의 사연을 말하진 않겠소이다.”
“개방의 헛된 명성을 깨뜨리고 전 중원에 진정한 거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하루가 될 것이오. 벌써 마음이 설레고 떨려오는구먼.”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하는 이들을 보며 종표가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개방에 도전장을 보낸 사람들이오?”
“그렇소!”
확신에 찬 말에 종표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도전을 하고 어떠한 까닭이 들어 있는 것이오?”
종표는 답답함을 간신히 억누르고 예의를 지켰다.
“흥, 그대 방주는 우리의 도전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군.”
오른쪽에 있던 거지가 거기까지 말하고 멈추자 바로 그 뒤를 이어 중간에 있던 거지가 말을 이었다.
“중원에는 거지로 살아가는 이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방주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오. 개방은 크게 내세우길 거지들의 집단이며 방주는 거지들의 우두머리로 자처하고 있지만 과연 당신들의 모습이 진정 거지들을 다스리기에 합당한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오.”
종표는 가슴 가득 짜증이 끓어올랐지만 일단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다시 왼쪽에 있던 거지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방주 그대와 함께 진정한 거지가 누구인지를 가리고 싶소. 우리가 그동안 절치부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를 것이외다.”
종표는 그들의 비장한 눈빛을 보며 ‘이것들, 정상이 아니구나’고 생각했지만 주변에 공증인으로 참석한 자들도 있는 터라 애써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좋소. 세 분과 대결하도록 하겠소. 결과에는 깨끗이 승복하는 서로가 되어야 할 것이오.”
“그거야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지. 게다가 우리는 소인배가 아니니 세 명이 한꺼번에 덤비지는 않을 테니 겁먹을 것까진 없소.”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자연스럽게 동행했던 이들이 주변으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두 장로는 잠시 귓속말로 종표에게 그래도 방심하지 말 것과 상대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자들인 점을 감안, 혹여라도 암기나 독을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상기시킨 후 물러났다.
상대방도 한 명만을 남겨둔 채 물러서자 중앙 쪽에는 종표와 삼십대 초반의 거지가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자, 그럼 먼저 출수하시오. 내 삼초를 양보하리다.”
지위가 지위인만큼 종표는 적어도 삼 초 정도는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방주랍시고 덕을 보이려는 것이오, 아니면 뒤에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종표는 화가 치밀어 당장에 장력으로 머리를 깨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이놈은 당최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뒤에 하면 유리하다니……. 설마 전혀 무공을 모르는 놈은 아니겠지?’
종표가 의문과 분노가 뒤섞여 혼란에 겨워할 때 거지가 몸을 움직였다.
“내 이름은 상묵이라고 한다. 흥, 본때를 보여주지. 먼저 무기술(武器術)을 보여주마.”
상묵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거지는 말을 맺음과 동시에 냅다 웃통을 벗기 시작했다. 종표는 물론이거니와 그와 함께 공증인으로 참여했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웃통을 벗자 드러난 그의 몸은 일반적인 사람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다른 인종, 즉 흑인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상묵의 몸은 검기 그지없었다.
종표가 놀라 말을 더듬었다.
“너, 너는 대체 누, 누구냐?”
“흐흐흐, 벌써 겁을 먹은 게로군.”
상묵은 양손으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고, 그의 손아귀에는 겨울철에 눈을 뭉쳐 든 것마냥 때가 가득 잡혀 있었다. 사람의 몸에 그만한 때가 뭉쳐 있을 수 있다는 것만도 기절초풍할 일이건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상묵은 연신 때를 벗겨 모으더니 큰 덩어리를 찰흙처럼 빚으며 괴이한 모양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종표로서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몇 번 깜박거릴 따름이었고, 두 장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쳐 댔다.
“방주님, 독이 분명합니다! 선제 공격을 하셔야 합니다!”
“비겁한 놈들, 어찌하여 비무에서 독을 사용한다는 말이냐?”
그러나 종표는 이미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말을 꺼낸 터라 이제 와서 상황이 좋지 않기로서니 선제 공격을 한다는 것은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또한 강호에서 몸의 때를 독으로 사용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 장로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묵은 여전히 때를 버무리면서 즉시 반발했다.
“무슨 소리냐? 본좌는 지금 무기를 꺼내고 있는 중이지, 결코 독 따위를 쓰려는 것이 아니다! 멍청한 개방 늙은이들은 입을 다물라!”
모두가 더욱 어리둥절해져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상묵의 손 위에서 결국 그의 말대로 무기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적을 향해 던지면 강력한 회전력으로 살상한 후 다시금 시전자의 손아귀로 돌아오는 ‘륜(輪)’의 형태였다. 재질에 따라 금륜(金輪), 은륜(銀輪), 철륜(鐵輪)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시전자의 손속의 난폭한 정도에 따라 혈륜(血輪), 인륜(仁輪)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상묵이 만든 것은 굳이 이름을 붙이다면 ‘때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색깔이 짙은 회색이면서도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지켜보는 모두는 당장 속이 울렁거려 미칠 것만 같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