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42화 (42/125)
  • # 42

    그러자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게 변하고 말았다. 개중에는 지금 자신의 등 뒤에 귀신이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난 결정했소. 비록 흑막이 많은 청부를 받지 못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두 분의 말씀을 받들어 그 ‘세 부류’에 대하여는 결코 살인 청부를 수락하지 않기로 말이오. 자,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하여 이의가 있다면 손을 들어주시오. 지금 손을 들지 않고 이후에 이 문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거나 재론하는 일이 있다면 그를 극형에 처할 것을 약속하오.”

    수뇌들은 서로 눈치를 살필 뿐 아무도 손을 드는 자가 없었다.

    “좋소. 그럼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으로 선포하는 바이오.”

    막주 금총이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제까지 말한 내용은 그가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었다.

    심복인 월영에겐 미리 언급을 해놓은 상태였으니 나중에라도 드러날 일은 없었다.

    그가 이런 결정, 즉 ‘세 부류의 청부 제외’을 한 것은 이것이 바로 ‘후흑문이 요구 사항’ 이기 때문이었다.

    심온이 호숫가에서 요구했던 것이 바로 ‘세 부류의 청부 제외’였고, 그것을 수락한 금총으로서는 차마 후흑문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 그리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이처럼 귀신 이야기를 빌어 수뇌들을 설득하게 된 것이었다.

    심온이 화화궁을 통해 흑막을 견제하고 화화신녀도를 잃어가면서까지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꾸며간 데는 흑막에게 ‘세 부류의 청부 제외’를 실현코자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목표한 바가 달성되었으니 심온으로서는 비록 사랑스런 화화신녀도를 잃었지만 보이지 않는 더 큰 것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흑막의 살수들은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조금씩 섭섭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위치와 주변의 눈 때문일 뿐 사실 또 대부분의 살수들은 겉과 달리 속마음에 있어서는 흡족하게 여겼다.

    그들이 비록 살인 무기로 키워졌지만 ‘세 부류’에 대한 살인이 주어질 때면 그로 인해 번민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흑막은 그렇게 싸늘하지만 또한 따뜻한 시간들을 보냈다.

    ***

    8. 필사방의 회개

    육(肉) 자 문신의 위력은 대단했다. 필사방인들은 더 이상 민첩해지기 힘든 속도로 움직였고, 받은 명령에 헌신했다.

    문신이 새겨진 이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그 이상의 가혹한 상황을 당하지 않으려 총력을 기울였고, 문신 없이 상대적으로 편안한 길을 걸어간 이들은 육(肉) 자의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을 감시하는 눈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밤이든 낮이든, 심지어 용변을 보든 자기네들끼리 소곤거리든 모든 것이 검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 그들은 ‘온 천하에 기연은 바로 곁에 있다’라고 외쳤지만, 이젠 기연은 꿈일 뿐이며 참된 삶은 일상 속에서 보람을 찾는 것임을 전파했다.

    주로 그들의 행로는 기연 서적에 고명하다고 추천된 장소들이었다. 하나같이 깊은 산중이라 고생이 적지 않았으나 불만을 겉으로 터뜨릴 순 없었다.

    그러나 점점 일정을 거듭하면서 그들은 속으로 품고 있던 불만마저도 점점 옅어졌다. 그건 기연 서적에 심취해 절벽에 추락하려던 십여 명의 젊은이들을 구해내면서부터였다.

    이제 겨우 열두세 살의 소년부터 이십대 중반까지 구해내는 중에 그들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막 뛰어내리려던 중에 제지를 당한 기연 소망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말리는 필사방인들에게 호통을 아끼지 않았다.

    “왜 영웅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오? 그대들이 지금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얼마만큼이나 거스르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오!”

    “지금 나를 막음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함을 얻지 못하게 될지 상상이나 해봤소이까? 나를 내버려 두시오!”

    “이 사파의 무리들, 너희들이 벌써부터 지존의 길을 방해하고자 날 찾은 게로구나! 오냐, 내 맞서리라! 그리고 장렬히 기연을 얻으리라!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내 기꺼이 절벽으로 추락할 테니 말이다!”

    기연 소망자들은 기연을 사모함이 완전히 광적인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영웅이 된 듯 천하를 구할 구세주의 입장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열변했다.

    결코 과장하거나 억지로 웃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었기에 필사방인들은 기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이 글쟁이들을 잡아다 온갖 기연에 관한 헛된 이상을 심을 때만 해도 정녕 이 정도까지일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필사방주 노제강은 기연 소망자들이 길길이 날뛸 때면 수하들을 향해 가만히 외쳤다.

    “붙들어라!”

    그리고는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했다.

    기연 서적을 쓴 글쟁이들이 어떤 억압을 당한 채로 기연서를 작성하였는지, 원활한 유통을 위해 어떤 뒷거래가 이루어졌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는지.

    처음 노제강은 논리에 의거하여 설명했지만 기연 소망자들이 전혀 믿지 않으려 들자 그들을 설득시키며 강변하는 중에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연 소망자들의 마음은 철벽과도 같아 돌아서지 않았다.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는 것이오?”

    “하하하, 이 사람들 아주 사람을 바보로 아는군.”

    “육(肉) 자 문신이라……. 재미난 상상력이란 건 인정하겠소. 하지만 거기까지요. 어서 길을 비키시오.”

    “이 호로 상놈아, 영웅이 될 분 앞에서 어찌 그리 속된 말을 내뱉는단 말이냐?”

    결국 노제강을 비롯한 육(肉) 자 문신자들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아랫도리를 내리고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어떤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던 기연 소망자들은 ‘고추’에 새겨진 문신에는 모두들 무릎을 꿇었다.

    제아무리 미친놈이라 해도 스스로 ‘고추’에 지우기 어려운 문신을 새길 놈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랑이처럼 길길이 날뛰던 그들은 곧바로 순한 양처럼 필사방인들에게 공손히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총총걸음으로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매번 좋은 결과만을 목도한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뛰어내리는 광경을 본 것이 네 번이었고, 절벽 바로 아래쪽에서 넝쿨에 목이 감겨 죽은 시체도 다섯 건이나 목격했다.

    이런 까닭에 필사방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는 한편 기연의 허구를 밝히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덧 그들의 여정은 북망산(北邙山)에 이르렀다.

    북망산의 정경을 대하자 지난날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갔다. 북망산 자락에 숨어 있는 기연들이 그득하다며 많은 헛바람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어느 계곡 쪽엔 용이 승천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폭포의 물줄기가 약해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리고 있어 그곳에서 용을 기습한 후 내단을 취한다면 절세의 내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서적도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확인해 보러 막상 가게 되면 그들은 폭포의 물줄기가 강하게 내리 꽂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용은 이미 승천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북망산은 워낙 넓은 터라 필사방인들은 거의 이십여 일에 걸쳐 작업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조로 나누어 활동했는데 제1조는 기연 장소에 팻말을 세웠고, 2조는 절벽 아래쪽을 돌면서 시체의 유무를 확인하고 발견시 양지에 매장하는 일을 맡았다.

    제3조는 산 아래 등산의 시작 지점에서 가슴패기를 대각으로 가로지른 띠를 두르고―띠에는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인사를 하며, ‘기연이 여러분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땀의 가치를 아는 일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처음엔 잡상인이나 기이한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인가 하고 눈살을 찡그렸지만 몸을 붙들거나 끌지 않고 외치기만 하자 비로소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수고한다는 인사말을 건넸다.

    등산객들 중 산에 올라가 먹으려고 준비했던 음식을 나눠 주는 이들도 있었는데 비록 많은 양이 아니었어도 필사방인들은 저마다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수하들이 목청껏 외치는 사이 방주 노제강은 가장자리에 서서 예리한 눈초리로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등산객 중에 산에 오르는 데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의복이나 신발, 또는 애써 눈길을 피하려거나 안색이 굳어진 이들을 골라내서는 한쪽으로 불러다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고, 마지막 결정타로 아랫도리를 내려 ‘고추’를 보여주는 것으로 확실하게 기연에 관한 소망을 끊어놓았다.

    물론 개중에 사람을 엉뚱하게 불러내 아랫도리를 깠다가 뺨따귀를 얻어맞은 적도 있었고, 여자 기연 소망자일 것이라고 추정하여 ‘고추’를 공개하였을 때에는 발길질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숨이 콱 막혀 쓰러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에 있어서는 그의 예측이 적중하였기에 한두 차례의 실수에 대해서는 쓰게 웃으며 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약 이십여 일의 뜨거운 열정의 날이 지나면서 필사방인들은 더욱더 자신들의 죄의 깊이를 깨달았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고, 부모와 생이별을 하게 만든 것에 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는 정녕 그들의 생명을 돌이킬 순 없으나 앞으로 그런 덧없는 희생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북망산의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 필사방인들은 천왕봉에 자리를 함께했다.

    방주 노제강은 북망산에서의 작업을 최종 점검하고는 수하들에게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오늘 북망산을 떠나는 기념식을 거행하겠다.”

    단주들과 수하들이 일제히 의문을 띠고 바라보았다.

    바위는 어른 키보다 머리 두 개 정도 더 높았고, 부피는 대략 여덟 사람 정도가 빙 둘러 팔을 벌려 맞잡아야 할 정도였다.

    대부분은 바위에 글을 새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시간들에 대한 죄스러움, 혹은 바른 삶에 대한 짧은 교훈의 문구.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이 녀석을 밀어버린다.”

    노제강은 아래 위 이빨이 훤히 보일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바위를 말입니까?”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홍보단주와 수정단주의 말은 비단 그들만의 의문이 아니라 모두의 의문이었다. 세상에 힘을 쓸 데가 없기로서니 멀쩡히 잘 있는 바위를 왜 밀어버린단 말인가. 비록 바위가 절벽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까짓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낸다면야 못할 것도 없겠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얼간이 같은 짓이었다.

    “너희가 보기에 이 바위가 어떠냐?”

    그 말에 수하 중 하나가 공손히 답했다.

    “제 생각엔 천왕봉의 절경과 매우 적절히 어울린다 싶습니다. 뭐랄까? 균형을 잡아주는 듯도 하고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꽉 채워주는 느낌입니다. 그냥 두시는 편이 산에도 또 저희에게도 나을 성싶습니다.”

    노제강이 기다렸던 말이었는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이 바위를 밀어버리려는 것이다.”

    그는 말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이 바위가 이곳에 있으므로 천왕봉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각도를 달리하여 바위를 바라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도대체 이 바위는 어떻게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주위를 보라. 어디에도 이 바위와 비슷한 바위들은 찾아볼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 이 바위는 너무도 태연히 절벽 가장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더란 말이다.”

    그제야 필사방인들은 잔뜩 눈에 힘을 주고 바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굴러왔다라고 생각하자니 이곳은 산의 중턱이 아니라 봉우리였다. 굴러서 내려왔다라는 말은 그러려니 하지만 굴러서 올라왔다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주변 땅의 암석이 깎여서 바위가 되었다고 하기에도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일단은 주변 암석과의 색깔이 달랐고, 척 보기에도 같은 종류의 암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풍우에 의해 깎였다면 어찌 이 하나의 바위만 존재하겠는가.

    또 한 가지는 바위가 절벽 끝자리에 위치해 있어 마치 사람으로 견주어보자면 막 뛰어내리려는 자세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제 좀 이해가 가느냐? 산이 좋아 오른 등산객들이라면 마냥 기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기연 소망자가 이곳에 섰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바위 위로 올라가 멋진 자세로 몸을 던질 것이 아니겠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필사방인들은 우르르 달려들었다.

    “방주님의 영명하심에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하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힘을 다하겠습니다.”

    “이 정도 바위는 애들 장난입니다.”

    약 백여 명에 이르는 필사방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바위를 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영차!”

    “하나, 둘, 셋!”

    “영차!”

    우렁찬 기합과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지만 바위의 저항은 예상 밖으로 막강했다. 바위는 뒤로 밀리는가 싶더니 다시금 흔들 하면서 돌아오고 흔들 하다 돌아오고를 반복했다.

    “하아, 쉽지 않은걸.”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 다음 그들이 취한 방법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다섯 개의 통나무를 구해서 아래쪽에서 쳐 올리고 나머지는 힘을 다해 밀었다.

    “영차!”

    크르르!

    급기야 바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으라차차차차!!”

    “끄아아아악!!”

    함성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힘을 다해라! 이 바위를 밀어냄에 있어 최소한 백여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구한다는 일념으로 힘쓰자!”

    방주의 외침은 모두에게 초인적인 힘을 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바위는 지면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그 거대한 몸뚱이를 이끌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한순간 두 팔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필사방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리가 해낸 거야!”

    “그렇지! 대단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