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어서 이야기나 해보시오.”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말하지 않겠소.”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이오. 이건 너무 일방적이지 않소.”
“사정을 알게 되면 우리가 무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후흑문의 힘이 필요없다면 더 이상 막주는 머물 필요가 없겠구려. 안녕히 가시오. 멀리 배웅하진 않겠소이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 나라 선녀님들이…….”
심각하게 말하다가 눈이 온다는 내용을 읊는 소리에 막주 금총은 다시금 웃음보가 터질 것만 같아 이를 앙다물고 온몸을 떨면서 웃음을 참아냈다. 여기서 만약 웃어버리면 그야말로 개망신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저만치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수뇌부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온갖 잔혹한 생각을 떠올리며 간신히 웃음을 쫓아내고 말했다.
“좋소. 계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봅시다.”
“꼼꼼히 살펴보시길 바라오.”
심온은 계약서를 건네고는 무심한 시선으로 낚시대 끝을 바라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펄펄 눈이 옵니다.”
그 소리에 다시 금총이 몸을 흠칫 떨고는 계약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일단 벗어났다. 그는 애써 웃음을 참고 계약서의 내용을 보고는 진중한 낯빛으로 변했다.
뒤쪽에서 심온이 연신 선녀님들이 눈을 뿌려주네 마네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약 일 다경 정도를 고심하다가 심온의 옆 자리에 다시 앉았다.
“계약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좋소이다. 그럼 서명을 하도록 하시오.”
“서명은 하겠소. 하지만 먼저 이야기를 듣고 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소이다만…….”
“싫으면 관둡시다.”
“이보시오, 왜 그리 성질이 급한 거요?”
금총은 욱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이어 작게 중얼거렸다.
“씨바.”
“방금 뭐라고 하셨소?”
“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이다.”
“흠, 내가 잘못 들었나?”
심온은 고개를 갸웃하더니만 금총이 그랬던 것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개새끼, 못 들었을 줄 아나 보네.”
“개새끼라니? 그게 무슨 막말이오?”
심온이 얼른 손을 저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이다만…….”
금총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먼저 욕을 한 것도 있으니 화를 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명을 마친 후 심온이 입을 열었다.
“화화궁의 분노는 그들이 수치를 당하였기 때문이오.”
“수치를 당하다니? 우리 흑막은 그녀들의 옷깃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건만 그게 무슨 말이오?”
“그게 아니오. 여자들에게 수치란 뭐겠소? 즉, 흑막의 인물 중 하나가 욕을 보이고 말았단 말이오. 그 여자는 화화궁에서 매우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오.”
“그자가 누구요?”
“그보다는 먼저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해 부가 설명을 드리겠소. 그녀는 다음 대 화화궁을 이끌 자였소. 그 소녀는 가히 천재적인 두뇌와 자질을 소유한 소녀였는데 아주 특별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중이었소. 그러던 차에 그만 흑막의 한 사람이 그녀의 순결을 앗아가 버린 것이지요.”
흑막의 막주 금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차기 궁주라면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얼마나 많은 기대와 투자가 이루어졌겠는가. 그런데 능욕을 당했으니 분노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가 누구요?”
심온은 전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금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돌아서는 금총의 귀로 심온의 무심한 노랫가락이 들렸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 나라 선녀님들이…….”
하지만 금총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는 웃을 수 없었다.
‘당장 저놈을 포박하라!’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소리에 추명은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현재 그의 나이 예순일곱.
삼 년 전이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욕정을 채웠던 그 일이 이렇듯 지금에 와서 목을 죄는 사슬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소녀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그냥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대가로 듬뿍 돈도 안겨주었다.
무림의 속성상 알려진다 해도 그리 대수로울 것이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당시 그 소녀가 화화궁의 사람이었을 줄이야.
추명은 뇌옥의 모퉁이에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처박으며 비통에 젖었다. 그가 받은 형량은 이십 년이었다. 과도한 형벌이 주어진 것은 그가 초기 대응 방법을 주장할 때 화화궁과 전쟁을 벌이자고 소리 높여 이야기한 영향이 컸다. 자신의 과오를 혼란 속에 잠재우려 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후흑문의 계획은 상당히 간단하면서도 엉뚱했다.
전체를 놓고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지만 톱니바퀴처럼 하나둘 맞물리며 나아가게 되면 기묘하게 아귀가 맞아들어 갔다.
솔직히 후흑문에서는 흑막의 누가 지목될 것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 놈이라도 살수의 길을 걸어오면서 강간을 경험했을 것이며, 막주가 다 안다는 식으로 윽박지르면…….
살수의 특징 중 하나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정을 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것을 통해 아무나 한 명을 찍은 것인데 그 사람이 바로 추명이었다.
추명으로선 굉장히 재수없는 경우라 할 수 있었다.
후흑문의 회의실. 모일 수 있는 수뇌들이 모두 참여했다.
주제는 화화궁이 흑막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 어떻게 화화궁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냐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거의 해결책이 나온 것이라 오늘의 회의는 최종 결정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흠, 이제 남은 건 화화신녀도(花花神女圖)를 건네는 일뿐입니다.”
총관 오교의 말에 심온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었다.
오교의 말은 화화신녀도를 화화궁에 준다는 뜻이었다.
그건 화화궁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흑막이 정식으로 사과를 한다고 해도 화화궁이 사과 따윈 필요없다며 막무가내로 싸움을 걸어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심온이 생각했던 것은 강호십괴 중 한 명인 만박괴자(萬博怪子:그의 이름은 홍추(洪追)로 그는 강호상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자로 통했다. 그를 가장 잘 설명한 말 중엔 이런 말이 있다. ‘그가 모르는 것은 강호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뿐이다’)에게 의뢰하여서 현 화화궁주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알아와서 그녀를 협박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의견은 어느 누구의 동의도 얻지 못했다.
까닭인즉, 만박괴자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말해 줄 리 만무하고, 설혹 강제로 입을 열게 한다고 해도 화화궁주가 도리어 수치심에 목표를 흑막이 아닌 후흑문으로 수정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염치없는 심온이라도 뻔한 결과를 두고 억지를 쓸 수는 없었기에 다른 제안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화화신녀도를 선물하자는 것이었다.
화화신녀도는 신필괴공(神筆怪公)이 그린 한 장의 그림이었다.
신필괴공은 만박괴자와 마찬가지로 강호십괴 중 한 명인데 그의 붓놀림은 가히 신의 경지에 필적하여 글자는 놀리는 대로 살아 움직이고, 풍경을 그리면 바로 곁에 산과 호수가 펼쳐지고, 사람을 그리노라면 당장에라도 그 사람이 그림 밖으로 나올 것처럼 되었다.
그중 화화신녀도는 신필괴공의 필생의 작품이랄 수 있는 일곱 개 중 하나에 꼽히는 것이었다. 일곱 개 모두 당대의 절세미녀들을 담았는데 기이한 것은 그가 일곱 미녀를 전혀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그렸음에도 마치 곁에서 본 것처럼 그 얼굴이 똑같았기에 절세칠미녀도는 그 가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중 화화신녀도는 화화궁의 전대 궁주인 청화선자 설유빈의 모습이 담긴 것으로 화화궁에서는 설유빈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화화신녀도를 찾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화화신녀도는 심온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을 찾은 뒤 얼마 있다가 사부로부터 받은 것으로 심온의 침상 벽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심온은 잠에서 깨어날 때나 잠들 때나 화화신녀도를 보면서 흐뭇하게 아침과 깊은 밤을 맞았는데 이제 화화신녀도와 작별해야 한다고 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심온이 당장에 무릎이라도 꿇고 빌 수 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교가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가로저었고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불쑥 방종당주 담유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주님, 뭘 그리 안타까워하십니까? 화화신녀도에 대한 미련은 버리셔도 됩니다. 앞으로 이 담유설이 벽에 매달려 있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저를 보는 기쁨을 누리시고 주무시기 전 저를 보고 주무신다면 꿈은 그야말로 황홀할 것입니다! 특별히 말만 잘 하시면 벽에서 내려와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하게 말했다.
심온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는 회의실의 긴 탁자를 뒤엎어 버리고 외쳤다.
“으아아악! 갖다 줘버려! 다 필요없어! 다 필요없다구!”
발악하듯 외치는 소리와 뒤집어진 탁자로 회의실은 순식간에 심란한 지경에 빠졌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심란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낄낄거리기 시작하더니 하나둘 자리를 뜨더니 모조리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된 심온은 소리를 지르고,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바닥을 떼구르르 구르면서 게거품을 물고 발광했다.
흑막은 정식으로 화화궁에 사과를 했다.
화화궁은 겉으로는 마지못한 듯 사과를 받았지만 오히려 이번 일로 궁의 숙원이었던 화화신녀도를 얻게 된 터라 고난이 다 하고 복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속이 쓰린 건 허전한 벽을 바라보야만 하는 심온이었다.
화화궁과의 일을 마친 후 흑막주 금총은 수뇌부를 한자리에 불렀다.
후흑문이 요구해 온 보상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화화궁과의 일로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뇌들은 막주의 호통을 예상했다.
“오늘 여러분들을 부른 것은 흑막의 큰 틀을 수정하기 위함이오.”
하지만 막주 금총의 음성은 차분했다. 게다가 하대를 하지 않는 것을 통해 중요한 이야기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대 막주 또한 반말을 하다가도 깊은 심중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차분한 어조로 반공대를 하였었다. 모두의 시선이 더욱 집중되었다.
“사흘 전이었다오. 책상머리에 앉아 화화궁과의 일이며 후흑문에 대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인기척도 없이 다짜고짜 들어오는 것에 막 호통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소. 믿을 수 없게도 들어온 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니겠소. 깜짝 놀라 내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면서 술을 내오라고 하시었소. 시종을 부르면 그들이 놀랄 것 같아 난 서재에 보관해 둔 술을 가져다 놓았다오.”
거기까지 말하자 수뇌부 중 어느 누구 하나 황당하다는 표정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이것이 필시 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몸을 꼬집어도 보고 꿈이라면 즉시 깨어날 요량으로 속으로 여러 암시를 주면서 깨어나 보려 했었소. 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오. 두 어른과 함께 술을 마시는 중에 내가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소.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살아 생전에 무고한 자의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고 염라대왕께서 분노하셔서 지옥으로 가서는 송곳의 산과 화염의 호수에서 지내게 되었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네 아비가 온 것이 아니더냐. 함께 고통을 당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이제 다음 차례는 네 차례가 될 듯하여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더구나. 나는 즉시 염라대왕께 간절히 구하여 하루의 말미를 얻어 오늘 이처럼 너를 보러 온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지만 또 당시엔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소.”
막주 금총의 얼굴은 너무도 진지해서 도저히 장난을 치는 것으로 볼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께선 ‘흑막이 살인 청부를 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너도 우리와 같이 고통당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끓는 것 같다’시면서 지옥의 판결을 빗겨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하셨소이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내가 묻기를 바라는 것 같았기에 나는 그 방법이 뭐냐고 물었다오. 할아버지는 ‘앞으로 살인 청부를 실행함에 있어 세 부류만 피한다면 낙원엔 이르지 못하더라도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첫째, 어린아이들에 대한 청부를 받지 말고, 둘째,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의 목숨을 취하지 말며, 셋째, 뭇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이들을 살인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었소.”
거기까지 듣게 된 수뇌들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세 부류에 대한 살인은 도의적으로라도 피해야 할 것이긴 했지만 살수는 그러한 도의적인 의식조차 버리고 오로지 직업으로서 살행을 감행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배워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즉시 항변했다오. 비록 지옥에 가서 송곳의 산을 하루에 백 번씩 오르내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 말씀을 따를 순 없다고 말이오.”
이내 수뇌부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그 말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시더니 내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오. 두 분은 계속해서 거친 욕을 하더니만 ‘너 때문에 우리가 받을 죄짐이 더욱 무거워졌다. 나중에 네 아들놈이 지옥으로 오게 될 처지가 되면 그때는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라시면서 홀연히 사라지셨소. 나는 깜짝 놀라 두 분을 불렀지만 다시 두 분의 모습을 볼 순 없었소.”
그렇게 정리되자 수뇌들은 안도하며 한 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잘하셨습니다. 그건 그저 꿈일 뿐이니 마음 흔들리실 필요 없습니다.”
“요즘 신경 쓰실 일이 많아 심기가 많이 상하신 듯합니다.”
“취임사에서 열정적으로 외치셨던 그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먼저 가신 두 분 또한 훗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막주 금총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이야기는 다 끝난 것이 아니오. 난 그때까지 이것이 그저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오. 한데 바로 그때 밖에서 월영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소. 월영은 ‘막주님, 별고 없으신지요? 방금 전 두 사람이 나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데 그들을 쫓으려 하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소. 난 깜짝 놀라 월영을 불러 확인해 보았지만 월영은 같은 말만 반복할 따름이었소. 그러면서 탁자에 놓인 술병과 세 개의 잔을 보고는 그 두 사람이 다녀간 것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