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40화 (40/125)

# 40

“아무렴요.”

“좋아, 실행에 옮기도록!”

“후흑(厚黑)!”

“그래, 후흑!”

운중산 자락을 타고 한 사내가 빠른 신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산과 땅, 나무와 풀들은 이 사내의 이름도 모르고, 전혀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지만 언제나 모두에게 공평했던 것처럼 이 사내가 지나가는 길을 소탈한 표정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사내의 신법에는 극도의 절제가 묻어났다.

이 사내, 흑막에선 그를 본명 대신 무심강(無心江)이라 불렀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처럼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탓에 붙여진 별호였다.

이제껏 그는 지시된 대부분의 살행(殺行)에서 깔끔한 결과물을 가져왔다. 그때마다 그는 들뜨거나 만족해하는 표정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어쩌다 아주 가끔 실패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단지 그의 표정만을 보고서는 그가 살행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런 탓인지 그의 살수로서의 직급은 빠르게 상승했다. 만 십 년을 채웠을 때 그는 어느덧 일급 살수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의 본질은 주위의 평가와는 사뭇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감정적인 인간이었고, 매 순간마다 요동치는 격정을 지닌 자였다. 도리어 그것을 표출하게 되면 나중에 스스로가 감당치 못할 것이 두려워 자신의 육체 속으로, 심장 안으로 파고들어 가 스스로의 모습을 감춰 버리곤 했다.

그의 첫 번째 살인은 뒷골목의 노숙자였다.

청부를 받아 이루어진 살인이 아닌 살인 연습인 셈이었다.

오랜 시간 씻지 않아 멀리서도 골골한 냄새가 풍기는 노숙자는 길바닥에 드러누워 새우처럼 잠을 청하고 있었다.

무심강은 등에 칼을 꽂았고, 그 고통에 놀란 노숙자가 웅크린 몸을 쫙 펼치면서 돌아볼 때 눈과 눈이 마주쳤다.

당혹! 고통! 의문!

노숙자의 눈은 수만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 눈을 응시하며 무심강은 덜덜거리는 상태에서 칼을 더욱 깊게 박아 넣었다. 중간에 살인지 뼈인지 모를 것들이 둔탁하게 잘려 나가면서 결국 노숙자가 숨을 거두었을 때 무심강은 자신의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맛보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는 것!

이제 뒤돌아본다고 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 사람을 죽임으로써 자신도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철저히 명령에 순응하며 살인을 자행했다.

그런 그를 가리켜 흑막에서는 무심강이란 별칭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결코 무심(無心)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인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죽여야 할 이가 천하에 악독한 자라면 그는 비록 그 살행이 어렵더라도 기쁘기 그지없었고, 죽여야 할 이가 선한 자일 경우에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살인을 계속했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했고, 살인이 그만 삶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흑막으로 돌아가는 지금 그의 얼굴은 무심하기 그지없었으나 이번 살행이 악덕 고리대금업자였기에 그래도 마음은 여간 홀가분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곁에 제법 칼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있어 잠시 진땀을 빼긴 했지만 어린아이나 여자, 혹은 힘없는 자를 죽여야 할 때에 비한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빠르게 발을 놀리던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바라본 하늘 위에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온히 날아가던 비둘기를 매가 덮치는 광경이었다.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뜻밖에도 비둘기가 쉽게 잡히지 않고 갑작스레 급강하를 하면서 매의 발톱을 피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둘기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뜻했다.

‘둘 중 하나이리라.’

비둘기 중에 유달리 특출난 놈이든지, 아니면 강호의 어느 무림 방파에 의해 길들여진 전서구일 터.

그는 전서구 쪽에 무게를 두었다.

첫째는 비둘기의 종류가 굴비둘기였기 때문이다.

특징은 허리 쪽은 흰색에 날개는 회색, 그리고 그 가운데 넓은 검정색 띠가 두 줄이 나 있는데 일반적인 집비둘기보다 동작이나 날아오르는 속도가 훨씬 빠르고 힘이 좋아 대부분의 전서구가 바로 굴비둘기였다.

둘째는 비둘기들은 대개 무리를 짓게 마련인데 그는 이 주위에서 여태껏 비둘기 무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서구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비둘기는 낮게 날아 내리며 숲 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흠, 어느 곳에서 훈련을 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정성을 들였겠는걸.’

틀림없이 매의 발톱을 벗어나기 위해 숲을 택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야생의 사나움을 지닌 매 또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를 부끄러워하듯 매의 추격은 맹렬하지 그지없었다.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비둘기가 거의 숲으로 진입하려는 그때에 매의 발톱이 비둘기의 머리 위로 폭사했다.

‘끝인가?’

무심강은 흥미진진한 도주와 추격이 이제는 막을 내릴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훈련을 받았다 해도 비둘기는 비둘기며 매는 역시 매였다.

그러나 무심강의 예상은 그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비둘기가 갑작스레 몸을 회전하면서 매의 발톱이 비둘기의 어깻죽지와 발을 스치며 지나가고 만 것이다.

십여 개의 깃털이 흩날리면서 비둘기는 빽빽한 나무 사이로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잠시 하강하던 몸을 추스른 매가 다시금 비둘기가 사라진 곳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허허, 거참.’

한낱 금수들의 몸짓이었으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그 감탄의 한 부분에는 추격하는 매와 살수로서의 자신이 동일시되는 느낌 또한 포함된 것이라서 일말의 씁쓸함도 남는 무심강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속에서도 문득 그의 예민한 시신경이 뭔가를 포착했다.

‘깃털?’

깃털 쪽이긴 했지만 깃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곧 깃털 사이에 깃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추락하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전서구가 전달하고자 한 비밀 문서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는 그의 표정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표정의 안쪽으로는 묘한 기분이 감돌았다. 설렘과 흥분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몰래 여인의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둘둘 말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제껏 강호의 경험이 적다고 할 수 없는 그였으나 이렇듯 전서구가 흘린 비밀 문건을 발견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위에서 그런 경우를 겪었다는 이야기조차 그는 들은 적이 없었으니 이건 대단히 특별한 경험인 셈이다.

얇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치자 거기엔 한자(漢字)가 아닌 여러 가지 기호와 도형, 그리고 몇 가지 특이한 형태의 글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심강의 그 무심하기만 하던 얼굴에 옅게 미소가 떠올랐다.

십영해독술(十影解讀術)!

강호의 문파 중에는 문서를 변화시켜 그림자로 남겨두는 암호를 사용한다. 십영해독술은 바로 그 암호를 해독하는 기술이었다.

흑막의 일급 살수라면 이 공부를 통해 어지간한 암호문은 평범한 글자와 다를 바 없이 해독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이 암호를 훑어갔다.

후흑문이 알려온 악적(惡敵)은 흑막으로 밝혀짐.

최후의 결전은 한 달 뒤. 그날은 피의 날이 될 것이다.

조속히 궁(宮)으로 귀환 바람.

화화궁.

무심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크게 뜨고는 암호문을 해독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잘못 읽은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자신이 살행을 하러 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화화궁이 ‘최후’를 언급하며 피를 토하듯 분노한단 말인가.

그가 알고 있는 화화궁은 두려워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문지기부터 궁주까지 여자로만 구성된 단체. 그 여자들이 떼로 한을 품으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세력 간에 누가 이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승리하든 사실은 모두 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전서를 움켜쥐고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신형을 날렸다.

무심강이 신속히 자리를 뜬 지 일각 후.

숲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양쪽 어깨 위에는 매와 비둘기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노인은 여유롭게 걸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 제대로 걸려들었군. 작전은 성공이다. 이 녀석들, 수고했다. 이제 문주께 기분 좋은 소식을 알려야겠지? 둘 중 누가 갈 테냐?”

무심강이 들고 온 정보는 흑막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왜 느닷없이 화화궁이 광분한단 말인가? 막주를 비롯한 지도부 누구도 서로 묻기 바쁠 뿐 이유를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황당한 건 무심강이었다.

그야말로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여 미친 듯이 돌아온 것인데 모두들 태평하기 그지없고, 도리어 놀란 눈이 되어 자신에게 다그치듯이 물으니 이 상황 자체가 좀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막주 금총은 긴급히 수뇌부 회의를 열었다.

“화화궁이 집단으로 미친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마냥 굳건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이 암호문에는 후흑문이 화화궁에 결정적인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후흑문을 경쟁 상대로 삼든 어쨌든 후흑문이 그렇게 했다면 그건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냔 말이다.”

그렇다. 막주 금총을 비롯한 모두, 아니, 강호인이라면 누구라도 후흑문이 제공한 정보에 대해서는 지대한 신뢰를 보이는 것이 현실이었다.

“급히 화화궁에 사신(使臣)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다면 직접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급 살수 쾌충의 말에 곧바로 임환이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제 의견은 다릅니다. 그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만에 하나 오해가 아니라 실제 치명적인 곤란이 얽힌 것이라면 사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기름을 끼얹는 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추명이 강경한 어조로 나섰다.

“화화궁 따위에 사연을 들어보고 말고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우리를 치려는 계획이 확실한 이상 차라리 하루 속히 기습으로 그들을 섬멸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이 세 의견이 나온 후의 발언들은 대부분이 앞의 내용에 대한 지지와 비판들로 치열한 논리들이 자리를 뒤덮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일급 살수들의 수석인 여환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감히 용기를 내어 막주님께 아룁니다. 속하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아직까지 진위 여부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정면으로 화화궁과 맞대면하기보다는 제삼자를 통해 접근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그의 말인즉 암호문 속에 남겨진 후흑문에게 다른 각도에서 의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이 내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머리가 없어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막주가 취임사에서 밝히길 후흑문을 경쟁 상대로 정한 터라 후흑문을 거론할 시 막주의 반응이 날카로워질 것을 우려해 말을 아낀 것뿐이었다.

깊은 침묵이 흐르면서 모두의 시선이 막주 금총에게로 향했다.

금총은 두 눈을 감은 채 눈 주위를 꿈틀대다가 한순간 눈을 떴다.

“좋다. 후흑문과 접촉하여 내막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건 자존심 대신 흑막의 미래를 택한 강한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청조호(淸照湖)!

세상에 근심과 걱정이 없는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곳만은 어쩐지 근심과 걱정을 안고 왔다 해도 마음 한가득 평화로움이 깃들 것만 같았다.

숲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에는 이미 호수와 혼연일체가 된 열댓 명의 강태공들이 널찍한 간격을 두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광경은 가히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한없는 여유로움으로 영원할 것 같던 정적 어린 수묵화에 난데없이 한 사내가 표홀한 걸음걸이로 공간을 가로질렀다.

백색 장삼을 걸친 삼십대 초반의 사내.

그는 다름 아닌 흑막의 막주 금총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후흑문과의 접촉 때문이었다.

그는 곧장 걸어가 흑의(黑衣)에 초립(草笠)을 눌러쓴 낚시꾼 곁에 태연히 앉았다. 그러나 낚시꾼은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저 고요히 물가만 응시할 따름이었다.

금총은 마음속으로 약속된 암구호(暗口號)를 되새겼다.

후흑문에서는 약속 장소와 함께 외부적 특징으로 초립과 흑의, 그리고 서로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암구호를 교환하자는 내용을 전달했었다.

그가 해야 할 말은 두 문장으로 ‘곧 비가 쏟아질 것 같군요’와 ‘그럼 어떤 것이 내릴 것 같습니까?’였다.

그는 손을 들어 옅게 ‘흠흠’ 하고는 암구호를 발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군요.”

그 옆에 낚시꾼이 그 말을 받았다.

“비가 좀 내리긴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씨엔 천 번의 기우제라도 결코 비가 올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럼 어떤 것이 내릴 것 같습니까?”

“펑펑 눈이 옵니다. 하늘 나라 선녀님들이 눈을 뿌려주시겠지요.”

막주 금총의 안색이 희미하게 떨렸다.

굉장히 중요한 만남이라서 마땅히 긴장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만 웃음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솔직히 약속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고 그 아래 암구어가 기록되어진 것을 보고 그는 퀭해지고 말았었다.

정말로 이런 대화로 서로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후흑문을 상대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정말 엉뚱하다는 느낌이었고, 어쩌면 말만 이럴 뿐 실제로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너무도 태연히 펑펑 눈이 온다고 고즈넉이 말을 하니 거의 이를 악물다시피 하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웃음을 참아내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는 혼신의 힘과 여러 가지 심각한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심지어 해골 바가지 형태를 머리 속에 그려가면서 웃음을 참고 말을 꺼냈다.

“화화궁의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오?”

“거래를 하시겠다는 거요?”

“물론이오.”

“시간이 촉박하니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이야기를 들은 후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지불하겠소.”

“이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오. 흑막을 무시하는 건 아니나 제삼자의 개입이 없이는 이 일을 해결하긴 힘들 것이오. 물론 그 삼자는 후흑문이 되어야 할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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