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물론 이런 결정이 쉽게 내려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화화궁의 수뇌부는 크게 두 부류로 갈렸는데 궁의 치부를 숨기진 못 할망정 굳이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나팔을 불어댈 필요가 있겠냐는 이들과 이대로 시간만 끌며 세월을 낭비할 순 없다는 무리들이었다.
궁주는 ‘의뢰’를 택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농락했던 놈들이 제2, 제3의 도발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며, 그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강호에 떠벌리고 다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의뢰를 반대했던 이들은 잠시 항변하긴 했으나 신속히 일을 매듭 지어야 한다는 것과 후흑문이 의뢰인들의 비밀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기로 이름 높은 것을 인정하고 모두 마음을 모아주었다.
그런데 막상 의뢰를 하려고 하니 사건의 내용을 서신으로 전한다는 것이 화화궁으로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예비 궁주가 음욕을 견디지 못했다는 등등의 내용을 일일이 글로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난감했고,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려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리하여 화화궁에서는 직접 만나 사건의 내용을 말하기를 원했고, 거기에 따라 후흑문에서는 접선 장소를 서신으로 보내게 되었다.
서신 속에는 낙양의 서쪽 외곽에 자리한 ‘녹금전(錄金典)’이란 이름의 전당포라는 것과 오직 한 명만 찾아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런 사연 속에서 화화궁의 대표로 녹금전에 이른 요화가 짜증이 난 것은 전당포 속에 담긴 의미를 예민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건네고 그 대가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전당포의 특성처럼 이제 궁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내용을 말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못내 짜증스럽고 신경질이 난 것이다.
게다가 여자의 몸으로 이번 사건을 낱낱이 고해야 한다는 점도 그녀의 짜증을 배가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문제라면 남자가 나서주면 간단한 일이겠으나 화화궁은 전 구성원이 여자이니 그중 제일 재수없는 인간이 나서야 하는데 바로 그 지독히 재수없는 사람으로 궁주와 수뇌부는 그녀를 선정해 버린 것이었다.
말이야 젊은 세대 중 가장 두드러진 실력을 갖추었고,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미모가 뒷받침되는 인재 중의 인재라고 한껏 추켜세웠지만 요화는 솔직히 궁에서 탈퇴하고 싶은 마음이 일 정도였다.
이제 녹금전이라는 다 낡아 빠진 현판 앞에 선 요화로서는 그저 후흑문의 인사가 쭈그랑땡 노파이거나 최소한 여자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문을 열자 위쪽 경첩이 떨어져 나간 문이 대롱거리며 열렸다.
그뿐인가. 문 위쪽에 걸린 녹금전이라는 현판도 덩달아 떨어질 것만 같이 덜렁거렸다.
“아주 가관이군.”
열린 문으로 드러난 건 계단이었다.
그 폭은 매우 좁아 고작 어른 한 사람이 어깨를 좁혀가면서 올라가야 할 정도였다.
만일 위쪽에서 누가 내려오기라도 해서 중간에서 마주친다면 누군가는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될 성싶은, 그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우러나는 그런 계단이었다.
“휴우.”
그녀는 한숨인지 큰 호흡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숨을 토해내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에 오르자 아주 작은, 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만한 소리가 그녀의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어서 오시게. 비밀의 화원에 온 것을 환영하는 바, 그대는 앞으로 열 걸음을 걷고 다시 거기에서 왼쪽으로 꺾어 열다섯 걸음을 걸으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꺾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대가 이 말을 무시하고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다면 진정 후회할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일단 다짜고짜 반말을 해대는 것이 기분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목소리를 통해 그저 신비로운 척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단한 실력자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저 그런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자라면 그다지 크게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나 그녀는 화화궁 내에서도 인정받는 고수였기에 상대가 얼마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단번에 간파했다.
일단 그녀의 첫 놀람은 상대방의 목소리가 도무지 어느 쪽에서 울려 나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어느 정도의 나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전혀 추측하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소리의 음절이 마디마디 조각난 채로 적어도 열 사람 정도가 각기 한 조각씩을 내뱉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조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진정 고명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힌 자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정보 취합은 눈이고, 그 다음이 귀, 그리고 그 다음이 감각이다. 점점 나아갈수록 눈보다는 귀로, 귀보다는 마음으로 간파하게 되는데 지금 그녀의 귀와 마음은 상대가 굉장한 고수라는 것을 알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오늘 만날 사람이 후흑문의 최고위급에 속한 자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다른 의미로 보자면 후흑문이 화화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말이었고, 자신의 책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녀는 신중한 걸음으로 일단 음성이 지시한 대로 열 걸음을 옮겼다.
‘열 걸음째에 반드시 왼쪽으로 가라고 했으렷다? 그런데 도대체 오른쪽엔 뭐가 있기에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의문이 다 끝나갈 쯤에 그녀는 열 걸음째를 밟고는 순간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쳐다보다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헉! 어떻게?”
절대 가서는 안 된다는 그 오른쪽.
그곳은 절대 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당황스럽게도 막혀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손을 뻗어 만져 보니 그곳은 단단한 벽이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복도 길은 왼쪽과 앞쪽, 그리고 걸어왔던 뒤쪽 길만 존재할 따름, 오른쪽 길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이건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앞으로 더 가야만 하는 건가? 아, 어쩌면 내 보폭이 너무 좁았던 것인지도.’
그녀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주 간단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바보 멍청이로 보였다.
찰나가 억겁처럼 여겨지는 그 순간,
“이봐, 거기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멍하니 서 있는 이유가 뭐냐? 오줌이 너무 마렵다 못해 그만 지리기라도 한 것이냐?”
아까의 목소리였다.
역시 이번에도 방향을 가늠하기 힘든 음성이었으나 그녀는 두리번거리다가 왼쪽으로 꺾어진 통로 저만큼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검은 두건과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어 나이와 성별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최소한 오십은 넘겼으리라.
“평소 귀지(귓밥)를 파고 다니지 않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왼쪽으로 오라는 말을 따르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그녀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분노가 마구 섞인 채로 떠올랐다.
‘이런, 요화야, 무슨 짓을 한 거냐. 긴장할 것 없어. 사실 저 성별도 구별되지 않는 시커먼 작자가 있지도 않은 오른쪽을 언급하는 바람에 혼동한 것뿐 너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그녀가 왼쪽으로 걸음을 내딛자 검은 두건은 작은 철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흔히 전당포에서 주인과 손님이 창살을 사이에 두고 현금과 물건을 교환하는 그런 장소였다. 마땅히 요화가 앉을 수 있는 의자도 그 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앉아라.”
“나는 화화궁의 요…….”
“됐다. 누군지 일일이 듣고 싶지 않다. 안다는 것이 모든 일에 꼭 유익한 건 아니니까. 특히 이런 일일수록 서로를 모르는 것이 편한 법. 그대는 오늘 해야 할 말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알겠어요.”
거추장스러운 것을 배제하는 전문가다운 말에 요화는 그만 ‘알겠어요’라고 답하고 만 것에 괜히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 험한 강호에서 ‘알겠어요’라니…….
‘요화야, 정신 차려. 어쩌자고 첫마디를 존댓말로 말해 버린 것이냐. 이제 와서 다시 반말로 하면 얼마나 웃기겠냐구.’
“자, 그럼 들어볼까?”
검은 두건이 채근하듯 하는 말에 요화는 주먹을 말아쥔 손을 입에 대며 ‘험험’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과부촌이었습니다.”
과부촌이라는 말을 마치고 요화는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낯선 사내 앞에서 막 옷을 벗으려고 단추를 푸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스런 점은 상대가 ‘과부촌?’ 하며 되물어오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은 점이었다.
“그곳은 일반적인 과부촌이 아니라 본 궁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외부와는 진법으로 차단되어 있지요.”
“음.”
크게 의미가 담기지 않은, 그저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는 듯 검은 두건이 침음성을 날렸다.
그러나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요화에겐 그것이 ‘이봐,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면 재미없을 줄 알아’ 정도로 들렸다.
“그러니까 본 궁만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선 음기(陰氣)가 강한 곳이 필요한데 그곳이 바로 음기가 강한 특징을 가진 곳이었죠. 그런 곳에 여자들만 거하면서 더욱 음기를 가득 채우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침입자가 발생한 것이죠.”
“흥미롭군.”
말투는 무덤덤했지만 뜻 자체에 조소가 포함된 터라 요화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녀는 이 검은 두건이 늙은 놈인지 젊은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자라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침입자는 두 무리였지요. 한 무리는 주체자인데 그들이 진을 뚫고 다른 한 무리의 남자들을 과부촌 내부에 버려둔 겁니다.”
“그런 추측의 배경은?”
“버려진 이들은 발견 당시 벌거벗겨진 상태였고,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군. 스스로 들어와서 옷을 다 벗고 잠을 자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니까. 아무리 변태라도 그건 좀 심하지.”
“본 궁이 찾고자 하는 존재는 바로 그 밀어넣은 작자들입니다. 그들은 진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했으며, 전혀 발각되지 않으리만치 무공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후흑문의 저력으로 부디 그들을 붙잡았으면 좋겠군요.”
“이런, 좀 서운한걸. 벌써 이야기를 접으려고 하면 곤란하지. 그것만으론 후흑문이 아니라 후흑문 할아비가 온다고 해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야.”
“좋아요. 궁금하신 것을 말해 보세요. 무엇을 알고 싶은 거죠?”
어쩔 수 없다는 듯 도화가 되물었다.
“먼저 그 버려진 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뒤 과부촌의 여인들은 그들을 어떻게 했지?”
“그게 중요한가요?”
요화가 쌍심지를 돋우었다.
“중요하고말고. 그놈들이 과연 무엇을 원했고,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니까.”
“흠.”
요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정적이 공간을 뒤덮었다. 그리고 한순간 요화의 입이 열렸다.
“달려들었죠.”
“달려들어? 하하하하! 그러니까 먹어치운 거로군.”
검은 두건은 체통없이 박수를 치며 공중에 몸을 붕 띄울 정도로 흥분했다.
“흥, 아무래도 강호의 소문은 잘못된 것 같군요. 후흑문이 이렇듯 의뢰한 내용을 가지고 조롱거리로 삼을 줄은 몰랐네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음기가 강한 상태에서 남자를 보게 되면 그렇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때까지 활활 타오르듯 웃던 검은 두건이 웃음을 뚝 그쳤다.
“난 웃길 땐 웃어야 하고 화가 날 땐 그 자리에서 화를 내야만 한다. 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결코 웃지도 화도 내지 않는다. 그것이 뭐가 그리 잘못이란 말이냐?”
“흥, 변명이 아주 궁색하군요. 그래, 또 뭐가 궁금하죠?”
“어떤 피해를 입었지?”
“그게 무슨 말이죠?”
요화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잘 알 텐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만으로 과연 화화궁에서 본 문에 의뢰를 해야 할 만큼의 피해냐는 것이야.”
검은 두건의 말에는 정녕 피해를 본 것은 사내들이며, 도리어 여자들은 신바람이 난 것이 아니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건…….”
“누군가 있었군 그래. 아주 중요한 사람이 있었던 거야. 설마…….”
요화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그분은 아니에요.”
그분이란 궁주를 일컬음이었다.
굳이 궁주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건 대화의 내용이 그 자체만으로도 궁주를 격하시키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명사로 지칭한 것이었다.
“정말인가? 너무 강하게 부정하니 좀 미심쩍군.”
요화는 말하지 않았다가는 오늘 하루가 다 가도록 물을 것 같아 사실을 고하자고 마음먹었다.
“휴, 사실은 차기 궁주로 내정된 분이었어요.”
“음, 기간과 횟수는?”
“네?”
“얼마 동안, 그리고 얼마나 했는지를 알아야 적의 원한 정도를 파악할 것 아니냐.”
“이십 일, 그리고 약 한 사람당 오십 번 정도.”
요화의 목소리에 경련이 일었다.
“그럼 주로 여자들이 위에 있었겠군.”
“이봐요, 도대체 의도가 뭐죠?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요?”
“위쪽에 있었다면 얼굴을 기억하기가 더욱 쉬운 법이거든. 좋다. 수락하도록 하겠다.”
“흥, 아주아주 고마워서 절이라도 올려야겠군요.”
“고운 얼굴에 인상을 쓸 필요 있나? 흠흠, 그나저나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군.”
“뭘 더 물어볼 게 남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잘 아는 객방이 있는데 잠깐 우리 함께 쉬었다 가는 건 어떨까 해서 말이야.”
그 순간 요화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 새끼! 이 변태 자식!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의뢰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내 오늘 널 찢어 죽이고 말겠다!”
요화의 손이 치솟아 뿌려지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쇠창살이 일거에 잘려 나갔다.
??헉!“
검은 두건은 짧은 경악성과 함께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추격을 뿌리친 검은 두건이 호젓한 산길에 이르러 두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심온이었다.
“허, 그 처자, 뒤지게 무섭네. 요즘엔 여자들이 왜 이렇게 무서워졌을까?”
“후흑문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서신을 건네받으며 화화궁주 옥청향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서신을 개봉하여 읽어나가던 옥청향은 중도에 서신을 구기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흑막, 이 죽일 놈들! 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당장 비상회의를 소집하라!”
“어떻게 됐어?”
“화화궁에선 자신들이 해결할 테니 이제 후흑문은 신경 쓰지 말라는군요.”
“흠, 역시 예상대로군. 그럼 2단계 작전으로 진행해야겠지?”